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正祖代 후반 王世子 冊封禮와 그 意義 = The Installation Ceremony and the Meaning of the Crown Prince in the Latter Half of the King Chongjo's Reign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T13400839

      • 저자
      • 발행사항

        경기 : 단국대학교, 2014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단국대학교 , 사학과 , 2014. 2

      • 발행연도

        2014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 발행국(도시)

        경기도

      • 형태사항

        v, 67 p.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김문식

      • 소장기관
        •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천안) 소장기관정보
        • 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1800년(정조 24) 2월 2일에 진행된 왕세자 순조의 冊封禮와 冠禮의 의식 절차와 정치적 배경을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는 다른 왕세자들과 달리 같은 날에 관례도 함께 진행되었고, 嘉禮의 준비도 진행되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두 가지 의식을 진행하면서 의식 절차는 간소화 되었다. 또한 정조는 책봉례 이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대화합을 보여주었다.
      왕세자 책봉례를 비롯한 이번 행사에 대한 논의는 1800년(정조 24) 1월 1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전부터 신료들은 세자의 책봉을 치르도록 요청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원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예절을 갖추길 바라였고, 관례와 책봉례를 같이 거행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자 하였다. 관례와 책봉례의 준비는 정조의 전교를 통해 절차가 이루어졌는데 의식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가례 절차인 世子嬪 揀擇도 함께 진행되었다. 정조의 사망으로 再揀擇까지만 진행되었으나, 정조는 金祖淳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하였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와 관례는 1800년(정조 24) 2월 2일에 集福軒에서 거행되었다. 책봉례에 앞서 먼저 관례가 진행되었다. 관례를 이끌 賓은 領議政 李秉模, 贊은 禮曹判書 李晩秀였다. 본래 국왕이 仁政殿에서 빈·찬을 임명하지만 정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관례 의식은 빈 이병모와 찬 이만수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순서에 따라 왕세자가 時服에서 初加에는 袞龍袍를, 再加에는 絳紗袍를, 三加에는 冕服을 착용하였다. 이후 醮禮와 命字禮가 진행되었다. 왕세자의 이름은 李玜, 자는 公寶였는데 정조가 직접 지어 주었다. 이후 會賓客의식은 생략되었고 朝謁은 책봉례 때 箋文을 올리는 절차로 대신하였다.
      왕세자 책봉례도 정조가 참석하지 않았다. 왕세자는 책봉의 상징물인 敎命․冊․印과 관례 때 받는 訓書도 이때 같이 받았다. 책봉 문서를 받는 절차가 끝나면 왕실 어른들께 箋文을 올리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집복헌에서의 책봉례 의식 이후 절차는 축소되거나 생략되었다. 조알의식은 왕세자가 책봉 문서를 받은 후에 왕, 왕대비전, 혜경궁전, 중궁전 상궁에게 차례로 箋文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백관들의 朝賀의식과 왕세자에게 올리는 백관의 하례는 權停例로 진행하였다. 왕과 행사를 준비한 관원들이 만나는 會朝, 왕비와 내외명부가 만나는 命婦會朝는 생략하였다.
      왕세자 관련 행사의 준비기간은 짧은 편이었다. 1800년 1월 1일 행사가 결정된 후 불과 한 달 만에 관례와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짧은 시간임에도 행사가 진행될 수 있던 이유는 행사의 절차와 규모를 간소화 시켰기 때문이다. 정조는 세자 책봉과 관례, 가례도 한 번에 진행하기 위해서 세자의 성장을 기다렸고 행사를 같이 진행함으로써 불필요한 절차를 줄일 수 있었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는 사도세자의 追王을 위한 갑자년 구상을 실현하는 예비 단계였다. 정조는 이번 행사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존재를 나타냈다. 관례와 책봉례 장소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이었고, 행사 전후에는 경모궁에 배알하였다. 또한 세자빈 간택에서 김조순의 딸을 택한 이유로 현륭원 참배 때 받았다는 사도세자의 계시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등 사도세자와 연관시키는 작업을 통해 갑자년 사도세자 추숭 작업에 대비해 나갔다.
      정조는 세자의 책봉례를 마친 다음날 대대적인 사면조치를 발표하여 罪案이 불명확한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정조의 대화합 정책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죄인들을 사면해 준 것은 ‘정조의 의리’에 입각한 조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의록』 의리에 반하는 죄인들까지도 사면해 주었으며, 이들을 모두 자신의 의리 안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의 주모자가 아닌 주변인물이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죄인들이었다. 정조는 이들에 한해서 죄에서 벗어나 平人이 되도록 하였고, 이들에게 다시 왕권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번역하기

      이 논문은 1800년(정조 24) 2월 2일에 진행된 왕세자 순조의 冊封禮와 冠禮의 의식 절차와 정치적 배경을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는 다른 왕세자들과 달리 같은 날에 ...

      이 논문은 1800년(정조 24) 2월 2일에 진행된 왕세자 순조의 冊封禮와 冠禮의 의식 절차와 정치적 배경을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는 다른 왕세자들과 달리 같은 날에 관례도 함께 진행되었고, 嘉禮의 준비도 진행되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두 가지 의식을 진행하면서 의식 절차는 간소화 되었다. 또한 정조는 책봉례 이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대화합을 보여주었다.
      왕세자 책봉례를 비롯한 이번 행사에 대한 논의는 1800년(정조 24) 1월 1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전부터 신료들은 세자의 책봉을 치르도록 요청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원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예절을 갖추길 바라였고, 관례와 책봉례를 같이 거행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자 하였다. 관례와 책봉례의 준비는 정조의 전교를 통해 절차가 이루어졌는데 의식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가례 절차인 世子嬪 揀擇도 함께 진행되었다. 정조의 사망으로 再揀擇까지만 진행되었으나, 정조는 金祖淳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하였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와 관례는 1800년(정조 24) 2월 2일에 集福軒에서 거행되었다. 책봉례에 앞서 먼저 관례가 진행되었다. 관례를 이끌 賓은 領議政 李秉模, 贊은 禮曹判書 李晩秀였다. 본래 국왕이 仁政殿에서 빈·찬을 임명하지만 정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관례 의식은 빈 이병모와 찬 이만수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순서에 따라 왕세자가 時服에서 初加에는 袞龍袍를, 再加에는 絳紗袍를, 三加에는 冕服을 착용하였다. 이후 醮禮와 命字禮가 진행되었다. 왕세자의 이름은 李玜, 자는 公寶였는데 정조가 직접 지어 주었다. 이후 會賓客의식은 생략되었고 朝謁은 책봉례 때 箋文을 올리는 절차로 대신하였다.
      왕세자 책봉례도 정조가 참석하지 않았다. 왕세자는 책봉의 상징물인 敎命․冊․印과 관례 때 받는 訓書도 이때 같이 받았다. 책봉 문서를 받는 절차가 끝나면 왕실 어른들께 箋文을 올리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집복헌에서의 책봉례 의식 이후 절차는 축소되거나 생략되었다. 조알의식은 왕세자가 책봉 문서를 받은 후에 왕, 왕대비전, 혜경궁전, 중궁전 상궁에게 차례로 箋文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백관들의 朝賀의식과 왕세자에게 올리는 백관의 하례는 權停例로 진행하였다. 왕과 행사를 준비한 관원들이 만나는 會朝, 왕비와 내외명부가 만나는 命婦會朝는 생략하였다.
      왕세자 관련 행사의 준비기간은 짧은 편이었다. 1800년 1월 1일 행사가 결정된 후 불과 한 달 만에 관례와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짧은 시간임에도 행사가 진행될 수 있던 이유는 행사의 절차와 규모를 간소화 시켰기 때문이다. 정조는 세자 책봉과 관례, 가례도 한 번에 진행하기 위해서 세자의 성장을 기다렸고 행사를 같이 진행함으로써 불필요한 절차를 줄일 수 있었다.
      왕세자 순조의 책봉례는 사도세자의 追王을 위한 갑자년 구상을 실현하는 예비 단계였다. 정조는 이번 행사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존재를 나타냈다. 관례와 책봉례 장소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이었고, 행사 전후에는 경모궁에 배알하였다. 또한 세자빈 간택에서 김조순의 딸을 택한 이유로 현륭원 참배 때 받았다는 사도세자의 계시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등 사도세자와 연관시키는 작업을 통해 갑자년 사도세자 추숭 작업에 대비해 나갔다.
      정조는 세자의 책봉례를 마친 다음날 대대적인 사면조치를 발표하여 罪案이 불명확한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정조의 대화합 정책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죄인들을 사면해 준 것은 ‘정조의 의리’에 입각한 조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의록』 의리에 반하는 죄인들까지도 사면해 주었으며, 이들을 모두 자신의 의리 안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의 주모자가 아닌 주변인물이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죄인들이었다. 정조는 이들에 한해서 죄에서 벗어나 平人이 되도록 하였고, 이들에게 다시 왕권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1
      • Ⅱ. 王世子 冠禮․冊封禮의 논의와 진행 4
      • 1. 冠禮·冊封禮의 논의 4
      • 2. 世子嬪의 揀擇 9
      • Ⅰ. 머리말 1
      • Ⅱ. 王世子 冠禮․冊封禮의 논의와 진행 4
      • 1. 冠禮·冊封禮의 논의 4
      • 2. 世子嬪의 揀擇 9
      • 3. 冠禮․冊封禮의 의식절차 13
      • Ⅲ. 王世子 冠禮․冊封禮의 意義 31
      • 1. 冠禮․冊封禮의 통합 시행과 의식의 간소화 31
      • 2. 甲子年 구상의 예비 43
      • 3. 대화합을 위한 사면 조치 49
      • Ⅳ. 맺음말 61
      • 참고문헌 63
      • 일문요약 66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