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에서 정조가 겨냥한 문체 비판의 대상은, 개인적인 글쓰기에 해당하는 문예문 보다 공적, 제도적인 글쓰기인 관각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주자학과 당송고문의 재정립을 표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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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Korean
문체반정 ; 경화사족 ; 경화문화 ; 소품 ; 소설 ; 실용 ; 실학 ; Munchebanjeong ; the culture of the nobilities who Lived in Hanyang ; the Essays ; practicality
151
KCI등재
학술저널
89-1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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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에서 정조가 겨냥한 문체 비판의 대상은, 개인적인 글쓰기에 해당하는 문예문 보다 공적, 제도적인 글쓰기인 관각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주자학과 당송고문의 재정립을 표방하였...
문체반정에서 정조가 겨냥한 문체 비판의 대상은, 개인적인 글쓰기에 해당하는 문예문 보다 공적, 제도적인 글쓰기인 관각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주자학과 당송고문의 재정립을 표방하였지만, 정조가 실제로 더욱 강조한 것은 국가를 경영하고 정책을 펼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문체, 궁극적으로 ``실용을 추구하는 글쓰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확장하여 정조가 당대의 문화를 선도해간 경화사족에 대하여 취한 비판적 시각과 대응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른바 京華文化는 서울과 경기도를 생활 근거지로 삼고 전대의 사림이나 동시대 鄕班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간 京華士族의 문화를 범칭한다. 정조시대의 경화사족은 도시적 생활, 물질적 토대를 바탕으로 중국에서 유입한 문화를 대단히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바, 소설과 소품의 성행, 서화골동, 원예와 같은 심미적, 예술적 취향이 그 대표적인 양상이었다. 정조는 ``唐學``이라 하여 중국 열풍의 부정적 현상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실용, 실질과 무관하다는 관점에서 명청의 소설과 공안파의 소품을 가장 비판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 관료들부터 실질이 있는 문체로 국정에 실익이 되는 글쓰기에 힘쓰기를 요청하였다. 직접 주도한 각종 서적 편찬, 책문, 중국 서적 금지령 등을 통해 정조는 적극적으로 문체정책을 펼쳐 나갔다. 또, 문체반정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경화사족에 대한 정조의 대응을 살펴보면, 당색과 신분을 초월하여 정조의 측근 관료들 중 소설과 소품, 서학 등에 경사된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각 사례마다 비판의 강도와 정치적 조처의 수위를 달리 하였는데, 여기에도 실용을 중시하는 정조의 관점이 일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is about literary movement performed by King Jeongjo which is called "Munchebanjeong" and the culture of the nobilities who lived in Hanyang. King Jeongjo made so many comments on literary style critically and tried to change writing style ...
This study is about literary movement performed by King Jeongjo which is called "Munchebanjeong" and the culture of the nobilities who lived in Hanyang. King Jeongjo made so many comments on literary style critically and tried to change writing style of his officials. He criticized new types of writing like the Essays and nobles. He sought for contents and literary style of Ku-wen. He sometimes made political issues about literary style. However the most important fact is that King Jeongjo put much emphasis on practicality in official writing or systematized writing, not in private literary works. Many nobilities of the time of King Jeongjo enjoyed aesthetic or artistic tastes and immersed themselves in impractical knowledge or literary works. King Jeongjo criticized those trends and wanted to lead his officials into practical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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