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1890년부터 1933년까지 홀 여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루었던 선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890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는 홀 여사를 보구여관 의료선교 책임자로 조선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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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9
학위논문(석사) --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 실천신학 , 2009. 2
2009
한국어
서울
71 p. ; 2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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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1890년부터 1933년까지 홀 여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루었던 선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890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는 홀 여사를 보구여관 의료선교 책임자로 조선에 파...
본 연구에서는 1890년부터 1933년까지 홀 여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루었던 선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890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는 홀 여사를 보구여관 의료선교 책임자로 조선에 파송함으로써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홀 여사의 활동 주 무대는 서울과 평양이었고 이 두 곳에서 특수교육과 여의사 육성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에 노력하였다.
홀 여사는 조선에서 서구적인 맹인교육과 농아교육을 최초로 시작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함으로 후에 맹인학교와 농아학교를 세울 수 있었고 많은 맹인들과 농아들이 교육을 통해 일반인과 동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홀 여사의 노력은 특수 장애인들을 향한 사회의 편견들을 깨뜨리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홀 여사는 여의사 육성을 위해 일평생 노력하였다. 그녀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 활동"을 목적으로 조선에서 자립된 의료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다. 홀 여사가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점은 사회의 편견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에 근거해서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했던 칠거지악, 삼종지도, 여필종부, 남녀 칠세 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제도들은 조선인들의 생각과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런 사회적 편견들을 바꾸기 위해 그녀는 노력하였다. 신문의 글을 보도함으로 또는 직접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성들도 남자와 동일하게 의사가 되어야 함을 강하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홀 여사는 여의사 육성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서울과 평양에 각각 의학 훈련반과 여성 의학반을 만들어서 여성의료교육을 시켰고 조선 여성들을 일본, 중국,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의학공부를 하게 했으며 여자의료교육기관을 만들기 위해 장로교와의 의료사업 통합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서 여학생들이 청강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말년에 와서는 경성여자의과전문대학의 모체가 되는 여자의학 강습소를 직접 세워 많은 여성들이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홀 여사는 조선에 많은 병원을 세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평양에 여성 병원 광혜여원을 세웠고 기홀 병원, 에디스 마가렛 병원을 세우는 데에도 주축이 되어 노력하였다. 특별히, 기홀 병원과 에디스 마가렛 병원은 남편과 딸의 죽음이후로 세워진 병원으로 가족 사랑이 조선 사랑으로 승화되어 세워진 병원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평양정진학교에 맹인학급이 생기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고 농아학교인 남녀 게암학교의 건립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홀 여사의 선교 활동은 우리나라에 의료교육과 특수교육이 발전하는 데에 큰 이바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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