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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와 倭의 關係 -570~572년 고구려 사절의 越 표착과 귀환 과정을 중심으로- = The Relationship between Koguryo and the Japanese Wa(倭) -Based on the process of a Koguryo envoy drifting ashore of Kosi (越) and returning between 570 and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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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article for a Koguryo envoy drifting ashore of the Kosi(越) and returning in the biography of Emperor Kimmei(欽明紀, kinmeiki) and the biography of Emperor Bidatsu(敏達紀) of Nihon Shoki(日本書紀) is an important material which shows th...

      The article for a Koguryo envoy drifting ashore of the Kosi(越) and returning in the biography of Emperor Kimmei(欽明紀, kinmeiki) and the biography of Emperor Bidatsu(敏達紀) of Nihon Shoki(日本書紀) is an important material which shows the fact that Koguryo participated in the diplomatic activities toward the Japanese Wa. Even though this is an important material which delivers the situation that two countries faced to each other for the first time, its details have not been analyzed properly in the previous studies.
      The Koguryo envoy was fooled by a powerful clan in Kosi(越) who impersonated the king of Japanese Wa and he was able to deliver the Japanese Wa after staying more than 2 years in the Japanese Wa. This fact shows that Koguryo participated in the diplomatic activities toward the Japanese Wa with little knowledge regarding the Japanese Wa, and the improvement of th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Wa was not that easy. In this respect, the fact that Koguryo envoy who went to the Japanese Wa in 570 stayed there for more than 2 years ha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negotiations between two countries. Now only he was able to expand the knowledge regarding the Japanese Wa, but also he had a chance to examine the Japanese Wa’s strategies toward outside countries. The dispatch of additional envoys in later time supports this understanding.
      On the other hand, the knowledge of the Japanese Wa’s envoy who accompanied the Koguryo envoy helped the royal court of the Japanese Wa to reevaluate Koguryo. The fact that Koguryo participated in the diplomatic activities toward the Japanese Wa was sufficient enough to bring a misunderstanding that Koguryo faced a significant threat. It was highly possible from the Japanese Wa’s standpoint. If there was considerable gap between the Japanese Wa’s understanding and actual reality in Koguryo, the knowledge of the Japanese Wa’s envoy was able to correct the Japanese Wa’s understanding.
      Through the envoy who stayed in the Japanese Wa for 2 years, Koguryo was able to gain the knowledge regarding the Japanese Wa and establish the strategies toward the Japanese Wa, and the knowledge of the Japanese Wa’s envoy who visited Koguryo became the starting point for the Japanese Wa to reevaluate and accept Koguryo as one party to negotiate. This is why we must consider that the period between 570 and 572 is very important in the history of negotiations between two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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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日本書紀』 欽明紀·敏達紀에 수록된 고구려 사절의 월 표착과 귀환 기사는 고구려가 對倭外交에 나섰다는 사실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양국이 처음으로 대면한 사정을 전하�...

      『日本書紀』 欽明紀·敏達紀에 수록된 고구려 사절의 월 표착과 귀환 기사는 고구려가 對倭外交에 나섰다는 사실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양국이 처음으로 대면한 사정을 전하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연구에서는 내용 분석이 미진하였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사절은 倭王을 사칭한 월 지역의 豪族에게 농락당하였고, 2년 넘게 왜국에 체류한 뒤에야 國書를 왜국 조정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왜국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섰으며, 왜국과의 관계 개선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점에서 570년에 왜국에 건너간 고구려 사절이 2년이 넘는 기간동안 현지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양국의 交涉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기간에 걸친 왜국에서의 체류에서 얻었을 見聞도 그러하지만 왜국의 대외전략을 살피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후속하여 사절 파견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준다.
      한편 고구려 사절에 동행했던 왜국 送使의 견문은 왜국 朝廷이 고구려를 재평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나섰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대외관계가 실제 이상으로 위협에 처해 있다는 오해를 불러오기에 충분하였다. 왜국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왜국의 인식이 고구려의 실상과는 괴리가 있었다고 보면, 왜국 송사의 견문은 그것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왜국에 2년 간 체류했던 사절을 통해 고구려는 왜국에 대한 無知에서 벗어나 왜국의 실정에 대응하는 대왜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고, 고구려를 다녀온 송사의 견문은 왜국이 고구려를 재평가하고 교섭의 상대로 인정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양국의 교섭사에서 570~572년의 시기를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연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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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성제, "학문승 구라쓰쿠리노도쿠시, In 고대 환동해교류사-1부 고구려와 왜" 동북아역사재단 2010

      2 양기석, "백제 위덕왕대의 대외관계-대중관계를 중심으로" 19 : 2003

      3 정운용, "관산성 전투와 집권세력의 변화, In 사비도읍기의 백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07

      4 이근우,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2008

      5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회 (137) : 1-32, 2007

      6 이성제, "高句麗의 對倭外交와 東海交涉路-6세기 후반∼7세기 초 고구려·왜·백제 3국의 상호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겸하여-" 고구려발해학회 43 : 79-101, 2012

      7 李成市, "高句麗와 日隋外交-이른바 國書問題에 관한 一試論"

      8 李弘稙,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9 "隋書 (이상은 中華書局本)"

      10 加藤謙吉, "蘇我氏と大和政權" 吉川弘文館 1983

      1 이성제, "학문승 구라쓰쿠리노도쿠시, In 고대 환동해교류사-1부 고구려와 왜" 동북아역사재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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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운용, "관산성 전투와 집권세력의 변화, In 사비도읍기의 백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07

      4 이근우,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2008

      5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회 (137) : 1-32, 2007

      6 이성제, "高句麗의 對倭外交와 東海交涉路-6세기 후반∼7세기 초 고구려·왜·백제 3국의 상호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겸하여-" 고구려발해학회 43 : 79-101, 2012

      7 李成市, "高句麗와 日隋外交-이른바 國書問題에 관한 一試論"

      8 李弘稙,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9 "隋書 (이상은 中華書局本)"

      10 加藤謙吉, "蘇我氏と大和政權" 吉川弘文館 1983

      11 小嶋芳孝, "考古學에서 본 渤海와 日本의 교류사, In 東아시아 속의 渤海와 日本" 2008

      12 井上直樹, "第5章古代山城と高句麗, 南山城地域における文化的景觀の形成過程と保全の關する硏究, 平成18年度京都府立大學地域貢 獻型特別硏究成果報告書" 2007

      13 小嶋芳孝, "第1章日本海岸世界との交通-七世紀の越と日本海對岸世界, In 日本海域歷史大系" 淸文堂 2005

      14 森公章, "第1章古代難波における外交儀禮とその變遷, In 古代日本の 對外認識と通交" 吉川弘文館 1998

      15 高澤裕一, "石川縣の歷史" 山川出版社 2000

      16 津田左右吉, "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 In 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 岩波書店 1924

      17 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 卷二" 岩波書店 1963

      18 平野卓治, "本古代の客館に關する一考察" 89 (89): 1988

      19 小島憲之, "日本書紀" 小學館 1996

      20 李弘稙, "日本書紀所在高句麗關係記事考" 1 (1): 1954

      21 田溶新, "日本書紀, In 完譯日本書紀" 一志社 1989

      22 平野卓治, "日本古代の王權と交通-倭王權と高句麗の公的交通の始まりと展開" 121 : 2004

      23 盧鏞弼,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一潮閣 1998

      24 田中俊明, "後期の王都, In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25 森公章, "倭國から日本へ, In 日本の時代史-倭國から日本へ, 3" 吉川弘文館 2002

      26 "三國志"

      27 小澤毅, "Ⅰ. 飛鳥の都, In 日本の時代史-倭國から日本へ, 3" 吉川弘文館 2002

      28 이재석, "6세기 야마토 정권의 對韓政策, In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29 金恩淑, "6世紀後半新羅와 倭國의 國交成立過程" 15 : 1994

      30 김희선, "6∼7세기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長安城-도성의 가로구획방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43) : 39-82, 2006

      31 이영식, "5~6세기 고구려와 왜의 관계" 11 : 2006

      32 李成制, "570年代高句麗의 對倭交涉과 그 意味-새로운 對外戰略의 추진 배경과 내용에 대한 재검토" 2 : 2009

      33 井上直樹, "570年代の高句麗の對倭外交について" 九州大學校朝鮮學硏究會 11 : 2008

      34 井上直樹, "570年代の高句麗の對倭外交と高句麗-新出, 裵遺業墓誌, の檢討を中心に, 고구려 중기 국제관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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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4-12-17 학회명변경 한글명 : 동국사학회 ->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영문명 : Dongguk Historical Society -> Dongguk history & culture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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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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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36 0.36 0.3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8 0.4 0.758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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