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후보
      • KCI등재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에 만족하는 30~40MPa 이상의 순환골재 콘크리트 제조를 위한 실험적 연구

        우경섭,김정호 한국건축시공학회 2024 한국건축시공학회지 Vol.24 No.6

        South Korea to strengthen the safety of building structures, the durability design standards for concrete structures were recently revised to design compressive strength of 30MPa or more when exposed to the outside and subjected to rain. As such, the Korean government has recently increased the compressive strength of concrete to ensure the safety of building structures. However, the compressive strength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s limited to 27MPa or less when applied to building structures, and the scope of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s greatly reduced when applying the revised Concrete Structure Durability Design Standards and temperature correction strength, so even the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n the construction field will be very limited and difficult. Therefore, for the wider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first of all, it is necessary to develop a technology to produce stable 30-40MPa recycled aggregate concrete. Therefore, this study analyzes the physical, mechanical, and durability properties of 30MPa and 40MPa recycled coarse aggregate substitution rates by development the chemical admixture used in recycled aggregate concrete and using it to provide basic data for the production of high quality and high durable recycled aggregate concrete and promote the widespread utilization of recycled aggregate. 우리나라는 건축물 구조체의 안전성 강화를 위해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KDS 14 20 40)을 개정하여 외부에 노출 되어 비를 맞을 경우 압축강도를 30MPa 이상으로 설계하도록 개정하였다. 이렇듯 최근 한국 정부는 건축물 구조체의 안전 을 위해 콘크리트 압축강도를 상향시키고 있다. 그러나 순환골재 콘크리트는 과거 기준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으로 건축물 구조체에 적용 시 압축강도를 27MPa 이하로 한정하고 있으며 개정된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KDS 14 20 40) 적용 시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적용 범위는 크게 감소되어 고품질 순환골재 콘크리트가 제조되어도 건축 분야에서의 순 환골재 콘크리트 적용이 매우 제한적이고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많은 활용을 위해서는 우선 안정적인 30~40MPa 범위의 순환골재 콘크리트 생산 기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품질 개선 및 강 도 증진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품질편차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 준(KDS 14 20 40)에 만족하는 품질편차가 없는 고품질 순환골재 콘크리트 제조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순환골재의 많은 활용을 도모하고자 한다.

      • KCI등재
      • KCI등재

        월정학파(月汀學派)의 형성과정 및 학풍에 관한 시론(試論)

        우경섭 근역한문학회 2013 한문학논집 Vol.36 No.-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명나라로부터 새로운 문풍을 도입하여 조선 학계의 일신을 도모하였던 학자이자,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원군청병(援軍請兵) 등 명나라와의 외교 현안을 주관하였던 관료였다. 또한 그의 문하에서는 17세기 전반 대중국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던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명청교체를 전후한 시기 조선왕조의 명운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학파적 관계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되지 못했던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 글은 그러한 문제를 해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활약했던 윤근수와 그의 문인들은 중국이라는 현실적 규정력을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당대 서인학통(西人學統)의 주류로 떠오르던 사계학파(沙溪學派)와는 상이한 학풍과 현실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윤근수가 도입한 진한고문론(秦漢古文論)이라는 사상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단지 문장론의 차원에 국한되어 발현된 것이 아니라 1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격변 과정 속에서 한대(漢代)를 국가 운영의 전범으로 삼아 당면한 현안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로 확장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학풍을 지닌 월정학파의 구성원으로는 윤근수를 비롯하여 금상헌(金尙憲)·조익(趙翼)·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이정구(李廷龜)·금육(金堉)·조위한(趙緯韓)·조경(趙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송대 주자학을 국가 운영의 유일한 전범으로 삼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던 금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등 호서산림(湖西山林)들과 맞서는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월정학파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1580년대 서인의 영수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난 뒤 1620년대 김장생의 사계학파가 중앙정계에 부상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서인학통의 핵심적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은 17세기 후반 이후 형성되는 ‘한당(漢黨)-낙론(洛論)-경화사족(京華士族)’ 등 서울 지역 학인들의 학문적 계보의 前史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월정학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월정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진한고문론이 의고(擬古)라는 방법론에 치중한 나머지 한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이론 내지 이념을 창출하지 못했던 한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도학자라기보다는 문장가 내지 실무관료였던 월정학파의 구성원들은 17세기 중반 이후 중화질서의 붕괴라는 ‘철학적’ 사건에 대응할 만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월정학파에 속했던 학자들은 17세기중반 사상계의 재편 과정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 KCI등재

        宋時烈의 許衡 인식과 文廟黜享論

        우경섭 진단학회 2008 진단학보 Vol.- No.106

        漢族으로서 ‘夷狄’ 元朝에 출사하여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魯齋 許衡의 삶은 用夏變夷의 필요성과 華夷分別의 당위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조선의 許衡論은 고려말의 李齊賢과 李穡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주자학을 수용했던 그들은 허형이 원 세조를 보필하며 이룩했던 학문적 공적을 孔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토대 위에 개창된 조선왕조에서도 허형에 대한 칭송은 계속 이어져, 1412년 허형은 조선왕조의 문묘에 향사되었다. ‘정통왕조’ 明朝가 동아시아 정세를 주도하였던 조선전기와 달리, 華夷論의 현실적 의미를 체감하게 된 17세기 후반의 宋時烈은 허형의 행적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효종 8년의 丁酉封事에서 世道의 혼란됨이 허형의 문묘 향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출향을 효종에게 요청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허형이 살았던 원나라 초반과 자신이 직면한 청나라 초반의 상황을 동일시하는 시세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청나라의 현실적 패권을 인정하며 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에 순응하려던 ‘親淸派’들을 허형에 비견하며 경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숙종초 예송의 책임을 지고 약 6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은 송시열은 자신과 서인의 축출이 異端에 의한 正學의 패퇴를 의미한다고 여겼고, 주자로부터 이어지는 正學의 統緖 즉 道統을 바로잡는 일을 자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경신환국 직후에 시작된 문묘개혁 논의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때 그는 서인의 학문연원인 李珥와 成渾 兩賢의 문묘종사에 앞서 허형의 출향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中華와 夷狄 그리고 正學과 異端의 변별 논리가 동일한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던 송시열의 사유방식에서 본다면, 효종대 청나라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서 출발하였던 허형 출향론이 숙종대에 이르러 도통론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다시금 현실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허형 출향론은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결국 1682년 문묘제도 개정의 일환으로 중국 유학자 9인의 출향이 이루어질 때 허형은 그대로 문묘에 남게 되었다.

      • KCI등재

        宋時烈의 華夷論과 朝鮮中華主義의 성립

        우경섭 진단학회 2006 진단학보 Vol.- No.101

        Theory of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ans & Chosn Chunghwa Ideology of Song Si Yl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던 17세기 후반의 시대 상황 속에서,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華夷論을 이론적 토대로 삼고 있었다. 화이분별의 논리 위에서 尊中華攘夷狄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론인 화이론은 중국 고대로부터 존재해 왔는데,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된 지역종족문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문화적 요소를 가장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이 때 문화란 주나라로부터 이어지는 유교문화를 가리키며, 禮義와 人倫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은 것이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의 치욕과 명나라의 멸망 이후 화이가 顚倒된 상황 속에서 문화적 기준에 따른 존중화양이적의 이념을 자신의 사상을 관통하는 기본적 문제의식으로 삼게 되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나라에 대한 臣服이 강화되어 가던 흐름 가운데, 송시열은 화이분별의 당위성을 제기하며 청에 대한 복수설치를 주장하였다. 송시열은 호란기 이후 여러 사람에 의해 제시되었던 형세론적패도적 성향의 복수론을 대신하여, ‘克己復禮’와 ‘存天理去人欲’의 성리학적 명제를 통해 청 정벌의 이론적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攘夷狄의 정당성을 天理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합리화하였다. 이같은 과정 속에서 송시열은 오랑캐인 금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朱子의 학문을 화이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였으며, 그동안 ‘유학의 집대성자’로서 인식되어 오던 주자의 면모에서 벗어나 ‘화이질서의 실현자’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 효종의 죽음과 南明의 멸망으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현종대에 접어들어, 송시열은 존중화양이적 가운데 尊中華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이는 중화문화의 요체인 의리론의 전통을 조선의 역사에서 찾아보려는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나타났는데, 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箕子에 대한 존숭 및 원나라에 신복하였던 고려왕조에 대한 비판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당면한 현실 가운데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한 대명의리론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청의 현실적 패권을 수긍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송시열은 홍익한윤집오달제 세 사람의 순절을 尊周大義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한 三學士傳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명 의종의 어필을 봉안한 煥章菴을 건립하여 의리론을 핵심으로 한 중화문화의 적통이 명으로부터 조선에 계승되었음을 상징화하였다. 요컨대 송시열의 환장암 건립은 ‘사대모화주의’의 산물로서 명 황제에 대한 맹목적 존숭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非禮不動’으로 집약되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한 의종의 의리론이 조선에 전해졌음을 보임으로써 조선이 예의로 상징되는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밝히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朝鮮中華主義가 태동하게 되었다.

      • KCI등재

        송시열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인식과 대응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5 한국학연구 Vol.- No.77

        1684년(숙종 10) 4월 윤증이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ㆍ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 표현한 「신유의서(辛酉擬書)」가 공개되면서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본격화되었다. 논란 과정에서 윤증은 송시열에게 기질 공부의 부족함을 넘어 본성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그가 내세운 주자학과 존주대의(尊周大義)는 패도와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치욕스러운 논쟁의 전말이 조야에 공개되자 송시열은 대단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뒤이어 1685년(숙종 11) 2월 무렵 「사국서(史局書)」와 홍수주 상소를 계기로 회니시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윤증이 이이의 입산(入山) 및 권순장ㆍ김익겸의 순절을 거론하면서, 그간 윤선거의 강화도 행적을 둘러싸고 전개되던 회니시비의 논점이 도학과 절의에 관한 시비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숙종은 윤증 등을 ‘사문의 죄인(斯文之罪人)이자 세도의 큰 변고(世道之大變)’라 규정했다, 송시열 역시 윤증을 비롯한 소론을 윤휴와 같은 부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87년(숙종 13) 3월 「정묘축조서(丁卯逐條書)」를 통해 윤선거를 비난하며 임진왜란 때 강화론을 주장했던 외조부 성혼과 기축옥사 때 북인과 결탁했던 그 아들 성문준의 처신까지 지적했고, 이는 소론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노론과 소론 모두 자신들의 학문적 근원인 이이와 성혼이 상대방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하는 이상, 두 학파의 분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시열은 회니시비를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이 공자ㆍ주자ㆍ이이가 전수해 온 도학과 절의에 대한 남인ㆍ소론의 공격이라 간주했다. 그리고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패퇴하게 된 상황을 주자가 위학(僞學)으로 배척되었던 송대 경원당금(慶元黨禁)에 비견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송시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존주위주(尊周衛朱)의 가치 수호를 위한 순교의 의미를 부여했다.

      • KCI등재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