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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일반논문 : 경세론에서 본 실학

        ( Seong Yun Kim ) 한국실학학회 2013 한국실학연구 Vol.0 No.26

        이 논문은 조선후기 실학의 경세론을 정치의 개념과 방법, 군주론, 왕정론, 윤리론으로 나누어 그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새롭게 제기한 주요 논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조선후기의 실학은 서구에 비견하자면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에서 절대왕정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구성과 유사한 조선의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난 유교적 인문주의의 색채를 띤 근대지향적 정치 · 사상운동이었다. 둘째, 실학 경세론의 발전 과정을 그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것이 주로 영향을 받거나 준거(準據)로 삼은 경전이나 학술사조를 중심으로 대별하면 대체로 ① 『맹자』의 평균주의(平均主義)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에 주목한 단계(이이), ② 『주례』를 국가체제 재건을 위한 이론적 준거로 삼은 단계(유형원 · 이현일), ③ 제자백가나 탈성리학적인 견해들을 실질적으로 참용(參用)하면서 주자학의 경세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론을 구축해가는 단계(성호 · 강화학파), ④ 서구 과학이나 철학 및 청대 고증학 등을 활용하는 한편 정치적 적용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치이론을 심화하는 단계(후기실학자)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실학의 연원은 공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안민(安民)과 부국강병을 지향하던 두 갈래의 물길, 즉 정전제(井田制) 복구를 중심으로 하는 평균주의(平均主義) 사고와 북인계열의 국가중심의 정치적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갈래가 한백겸(韓百謙) 등의 평양 기전(箕田) 연구를 기폭제로 하여 하나로 합쳐지면서 실학은 주자학과 구분되는 조선 나름의 개성있는 경세학으로 등장했다. 넷째, 경세론의 맥락에서 볼 때 실학의 가장 큰 특색이자 장점은 평균주의와 국가주의의 강고한 결합에 있다. 실학이 갖는 평균주의 전통은 국가주의가 갖는 전제성(專制性)을 현격히 완화킴으로써 민본적(民本的) 성향이 강한 조선의 왕정이 전제주의로 흐르지 않고 차후 국민국가로 나아갈 수 있게 할 동력으로 잠재해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근대화가 서구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성찰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실학 연구의 시의성을 높일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실학은 성리학이 주장하는 도덕정치론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민생 복리를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정치로 이해하였다. 성리학의 도덕적 보편주의에 대비되는 이러한 실학의 현실주의 · 공리주의 정치 개념은 먼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의 형식으로 제기되었고, 이후 정치의 개념에 대한 주희의 명제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도덕을 분리해 나갔다. 여섯째, 실학은 정치의 방법에서도 예교(禮敎)를 통한 도덕적 감화를 우선하는 성리학의 입장을 비판하고,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기일체론’(道器一體論)을 표방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왕도와 패도를 절충하려는 이러한 실학의 정치방법론은 왕패병용(王覇竝用) · 왕패일도론(王覇一途論) · 관맹상제론(寬猛相濟論) · 교법일치(敎法一致) · 교법상보(敎法相補)의 형식을 통해 확산되었다. 일곱째, 조선후기에 통치체제에 대한 새로운 모색 과정에서 군주권은 그 핵심적 요소로 부각되었고, 존군론(尊君論)은 실학의 공리적 정치관이 발달함에 따라 강화되어 갔다. 존왕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신(新)군주’의 상은 군사(君師)라는 형태로 먼저 나타났으며, 곧이어 군주가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존군의 논리는 이후 군주를 태극 및 상제(上帝)에 비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군주론으로 발전했다. 여덟째, 실학의 왕정론은 다원적 권력을 중앙의 국왕에게 일원화하고 정치적 정통성 또한 국왕이 독점함으로써 이른바 중개세력을 해소하고 국왕의 지배에 복종하는 동질적이고 균등한 국민을 만들어 낼 것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 선행하는 절대주의 왕정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아홉째, 신분제를 부정했던 실학은 사회적 불평등 질서를 옹호하던 오륜의 윤리에 대신하여 『맹자』에 나타난 삼달존(三達尊)을 대안으로 제시했으나, 곧 이어 모든 신민에게 적용되는 통일된 평등 윤리로서 효제(孝悌)를 제시했다. 효제 윤리는 윤휴 등에 의해 이미 제시되었으나 이것을 정치차원에까지 확대하여 크게 선양했던 인물은 영조와 정조였다. 정조의 명덕본심설(明德本心說)을 계승한 정약용은 명덕이 효 · 제· 자(孝悌慈)임을 논증함으로써 그 인간론적 근거를 완성했다. 이 때의 효제는 신분적 · 계급적 지배의 규율로서가 아니라 평등한 개인 상호간에 호혜성 수수의 관계로 재조명된 것이므로 그것이 갖는 사회실천적 의미는 이전과 크게 달랐다. The main points of this thesis can be centered on several points as follows. First, Silhak of the post-Joseon Dynasty, if compare with Western history, was the modern-oriented political and ideological movement float a color of Confucianistic humanism. It came onto the scene in the same situation with the time of the Renaissance and absolutism. Second, Silhak`s progress can be separated as four steps: pay attention to equilibriumism of Mengtzu, make Chou li to standard referred for reconstruction of national structure, criticize orthodox Neo-Confucianism and construct new political theory, deepen new political theory with application of western science and bibliographical study of Chinese classics. Third, Silhak`s origin can be finded out two waterway pointes to wealth and military strength of a nation with utilitarian thoughts : equilibriumism and nationalism. These two waterway put together, Silhak came on stage as the individualistic governing theory. Fourth, The most important distinction and merit of Silhak shall be the steady union between equilibriumism and nationalism. The driving force alive in Silhak`s tradition of equilibriumism behind Korean absolutism not let run away into despotism and will develop to the nation-state later. Fifth, Silhak criticized the bounds of Sung Confucianism`s Moral politics, asserted that politics is the seeking to increase the populace`s wealth. These new political notions evolved the ``separation of politics and morality``. Sixth, In reference to the method of politics, Silhak criticized Confucianism`s political theory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law and institutions. Seventh, The insistence of respect monarch strengthened with Silhak`s utilitarian thoughts. These insistence of respect monarch took an absolute sovereignty theory. Eighth, Silhak`s royal regime theory had gradually taken on a character of the absolute monarchy theory. King Youngjo(英祖) and Jeongjo(正祖) presented Hyoje(孝悌) as the moral foundation for the absolute monarchy. Ninth, In the beginning Silhak presented Maengja`s Samdaljon(三達尊) instead of Oryun, soon afterwards presented Hyoje(孝悌) as the unified equality ethics. Who enhanced Hyoje(孝悌) ethics was King Youngjo(英祖) and Jeongjo(正祖). The Social practice meanning of Hyoje ethics was different from former times because it was recounted thing not the social standing domination discipline as the mutual benefits relationship between equal persons.

      • KCI등재

        정조의 경세론과 효제(孝悌)윤리

        김성윤 ( Seong Yun Kim ) 한국실학학회 2012 한국실학연구 Vol.0 No.23

        이 논문은 정조 경세론의 주요 측면들을 통하여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 과정에서 정조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본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제기한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조는 이기론에서 주희나 이황과는 달리 理를 氣의 내재법칙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리가 갖는 先在性·초월성·규범성을 외면했다. 정조의 이러한 주기적 이기관은 그의 근본적 시각이 경험적 현실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실학자들이 주장해 온 ``道器一體論``을 계승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둘째, 정조는 인성론에서 ``性卽理``라는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부정하고, ``性卽氣``를 주장했다. 아울러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서 性=四端이라는 도식을 부정하고, 사단을 元亨利貞의 四德으로 고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性四德說을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선험적인 원리나 윤리보다는 경험적 현실과 욕구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사회원리와 윤리를 모색하려 했다는 점을 대변한다. 정조의 이기론과 인성론은 주자학의 정설에서 크게 이탈해 있었다. 셋째, 그는 도교, 불교, 양명학, 서학 등 제반 이단적 학문에 대해서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개방성은 학문적 권위가 권력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차단하고, 진정한 학문적·정치적 실익을 추구한 데에 자연히 뒤따르는 현상이었다. 넷째, 정조는 군주가 수신을 바탕으로 명분질서의 모범을 보이고 실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수신군주론이나 군주성학론의 도그마에서 탈피했다. 이에 따라 그의 통치 방식도 풍속을 돈독히 하는 禮敎的 방식에 치중하지 않고 제도 개혁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접근방식을 보였다. 다섯째, 정조는 영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준거를 三代之治 혹은 堯舜之治에 두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요순은 은둔적이고 수련적인 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권력적인 정치가였다. 이처럼 그는 ``무위에서 유위로`` 정치 개념과 군주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했으며, 君師로 자처하면서 의리 판별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음을 주장한 영조의 정책을 계승했다. 그의 지지자에 의해 국왕이 사문의 도통을 계승했다는 ``君主道統論``이 제기되는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太極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天 혹은 上帝라는 절대군주론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여섯째, 정조의 군주론은 중개세력의 매개 없이 군과 민이 직접 소통하는 2단계 정치구조를 지향했다. 그는 이러한 절대왕정을 지탱할 통일된 사회윤리로서 孝悌를 제시하고, 太學序齒를 통해서 이를 시험적으로 실행했다. 태학서치는 군주 이외에 모든 臣民을 하나로 보고, 신민 사이에서는 신분이나 직업이 아닌 나이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계서윤리를 선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왕정이 결코 이론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곱째, 정조가 추구한 절대왕정은 국가를 家의 類比 내지 확장으로 보는 유교의 家族國家와 외연상 별 차이가 없어 보이나,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도덕보다는 백성의 행복 증진에 두고 국가사회의 결속원리를 인간에 내재한 도덕심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적 개별적 연계 속에서 모색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유교적 왕정론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차후 근대국가론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여덟째, 실학사상의 한말 민중운동으로의 전유와 관련하여 정조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그의 주역 연구와 文王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한말 민중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후천개벽설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The main points of this thesis can be centered on several points as follows. First, Jeongjo emphasized that I(理) is the inherence rule of Gi(氣). These Jugijeok Igi-gwan(Gi-centred Philosophy of I and Gi) shows that his fundamental viewpoints focus on an empirical actuality. Second, In theory of human nature, Jeongjo contradicted seong-jeung-ni(性卽理. nature is based on i which is innate in all creatures) and advocated seong-jeung-gi(性卽氣. nature is based on gi). And he advocated that human nature is saduk(四德. the four virtues), not sadan(四端. the four beginnings). Third, Jeongjo had opened up towards the unorthodox. His academic openness was the phenomenon following his utilitarianism. Fourth, Jeongjo`s ruling methods had attached importance to effectiveness of system, not convert. Fifth, He had made the way of the sage King Yao and Shun(堯舜之治) as his political authority. He emphasized that he himself is taegeuk(太極. Great Ultimate). This meens he had announced the absolute monarchy. Sixth, He presented Hyoje(孝悌. filial piety and friendship) as the moral foundation for his absolute monarchy, and practiced it with Taehakseochi(太學序齒). Seventh, There is a possibility that Jeongjo had a influence on the theory of hucheongaebyeok(後天開闢. Great Transformation for the world after the creation of heaven). This related with the Silhak(實學)`s transformation to the popular movement at the close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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