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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서원교육의 公的 기반 변화와 그 대응

        김자운(Kim, Ja-woon) 역사문화학회 2015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8 No.2

        이 연구는 소수서원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서원 교육의 토대였던 공적 기반 변화와 그 대응 방식에 따라 서원교육의 정체성과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 서원은 공적 기반 확보를 위해 국왕에게 사액을 요청하여 국가의 공식적 승인과 지원을 획득함으로써 서원의 위상을 확립하는 한편, 지방관의 행 재정적 지원을 통해 서원교육의 실질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서원 운영에 있어, 관권을 배제한 향촌자치제를 강조했던 퇴계의 서원론을 따르던 영남 남인계 서원들 역시 조선후기로 가면서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자 점차 관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관의 행 재정적 지원 없이 서원교육의 유지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교육 이념과 내용 면에서는 관권의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편, 행 재정적 지원 확보를 위해 서원에서는 끊임없이 관권을 개입시키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관권의 개입과 배제라는 모순적, 이중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시대 서원이 처했던 딜레마와 다양한 대응 방식을 소수서원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16세기 소수서원은 공적 기반 뿐 아니라 교육의 성격에 있어서도 사학보다는 관학에 더 가까웠다. 16세기 풍기군수 주세붕과 경상감사 안현은 서원을 관학과 다름없는 교육기관으로 인식, 관학에 버금가는 특전을 제공하고, 교육 내용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과거 대비를 위한 교육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학으로 무장한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서원을 관학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던 서원관에 변화가 일어났고, 서원교육이 이념적으로 관학에서 독립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7세기 풍기군수 이준은 지방관이자 동시에 사림의 일원으로서, 서원의 공적 기반을 제공하는 한편, 교육 이념에 있어 관학적 성격의 탈피를 주장하며 파격 논쟁에서 파격의 근거와 논리를 확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논리가 관철되면서 그는 서원교육이 관학적 성격에서 벗어나 주자와 퇴계가 주장한 서원의 사학 정신을 소수서원에 확립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소수서원은 과거공부만하던 관학적 속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주자의 사학 정신과 이념을 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 도학서원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18세기 소수서원은 이념적으로는 관학에서 독립하였으나 18세기부터 지방관의 전폭적 지원이라는 특혜가 사라지면서 서원교육의 공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이에 삼동거재와 윤번거재, 양사청의 설치 등 다양한 자구책을 동원하여 교육을 지속하고자 도모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 양사청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교육을 지속하기 위해 다시 관의 지원을 확보할 묘안을 강구해야 했다. 이에 겸원장 제도를 마련하여 다시 관권을 개입시킴으로써, 공적 기반을 확보하고 수령의 지원과 참여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적 기반 확보를 위해 의도적으로 관권을 개입시킨 결과 수령의 지원과 참여는 또 다시 과거공부의 폐단을 낳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서원의 지도자들은 과거공부가 도학을 방해하고 서원 본래의 교육이념을 해칠까 우려하며, 관권을 개입시켜 공적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교육내용에서는 과거공부에 치우치지 않고 道學과 科業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강구하였다. 19세기 소수서원 동주 이가순과 강운의 사례에서 그 고군분투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rough a positivistic examination of Sosu Seowon, how the characteristics and orientation of seowon education have changed and how the public foothold of private academies changed during the Joseon Dynasty. Conventional views hold that the educational system of the dynasty made a transition from centralized to decentralized, with the government yielding its educational authority to local literati, thus shifting the nature of education from a government-operated education system to a private education system. A micro-historical analysis of Sosu Seowon, however, shows the coexistence of government initiatives and the local literati’s educational influences, as well as a mixture of public and private characteristics. This is contrary to the conventional view that there was a linear change in the Joseon Dynasty education system. Sosu Seowon continuously secured a public foothold and maintained its identity 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playing the role of a public academy at one time and a private academy at another, respon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The changes in Sosu Seowon’s public foothold have been closely linked to changes in its educational ideology and content. Understanding Joseon Dynasty seowon education, therefore, requires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changes in the public foothold of seowon. Characterizing seowon education in a dichotomous way, without a thorough analysis, as “public” or “private,” or “government-centered” or “private academy-led,” might distort the realities of seowon educ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a case study,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nges in seowon education’s public foothold and its responses to changes of the times from the 16<SUP>th</SUP> to 19<SUP>th </SUP>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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