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삼국유사 고조선 기록에 나타나는 환인과 그 연대기

        문치웅 ( Chi Ung Moon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5 선도문화 Vol.19 No.-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 조와 이를 인용한 문헌에서는 제석(帝釋)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으로 명명(命名)된 지배자의 칭호(稱號)가 나타나지만 역사의 시대적 순서에서 桓因의 시대가 환웅보다 먼저라는 근거는 없다. 또한 桓因과 환웅이 누구인지에 대한정보와 『삼국유사』 번역서에서처럼 桓因과 환웅이 부자(父子)관계라는 근거도 역시 없다. 환단 관련 문헌의 번역서와 해설서들에서 나타 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환인들의 활동시대가 3,301년간 또는 63,182년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삼국유사』 번역서에서 桓因의 아들환웅, 환웅의 아들 단군이라는 기본적 바탕에 『삼성기』와 『태백일사』 에 나타나는 환인 관계 기록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해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헌의 내용을 잘못 이해함과 연대관계가 불분명하므로 인해 발생된 문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고기(古記)』 인용 부분을 기초로 『삼성기』의 桓因, 환웅, 단군왕검의 관계를 분석하여 환인들의 실체와 연대관계를 제시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번역서에서 나타나는 桓因의 아들 환웅, 환웅의 아들 단군왕검이 성립되지 않는 것을 보였다. 우선 桓因은 『삼국유사』 고조선에 등장하는 환웅천왕의 아버지가 될 수 없으며, 환웅천왕 역시도 단군왕 검의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입증하였다. 환인과 관련하여 桓因과 桓仁의 관계와 제왕으로서의 桓因, 그를 이은 桓仁들의 연대관계를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환인들의 활동시기는 환웅들과 동시대임도 밝혔다. We can identify that Hwanin, Hwanung and Dangun were inducted into three saints(三聖) from the records of related the ancient Joseon history. Three saints mean that three emperors who made great achievements in ancient times. Among them, Hwanung and Dangun chronologies were arranged sequentially in detail relatively by historians of Koryo and Joseon dynasty. However, Hwanin chronology was not arranged in order of era yet and no research has explored their history. In this research, we investigate the history of Hwanin in detail to make their chronology and to find their around the time of activities. From the analysis of contents related literatures such as Samkukyusa, Samsungki and Taebackilsa, this research proposes a conceptual framework of Hwanin chronology with their historical activities era. This research also provides a relationship between Hwanung and Hwanin in historic times.

      • KCI등재

        단군신화의 환인ㆍ환국 논쟁에 대한 판본 검토

        조경철(Jo, Gyung-cheol)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6 한국고대사탐구 Vol.23 No.-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은 환웅의 아버지이고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판본에 의하면 환인의 因자가 조선 임신본(1512)에는 ‘囯’으로 조선 초기 파른본 등의 고판본에는 ‘口/士’으로 되어있다. 당대의 단군연구 권위자인 최남선은 이를 환국으로 읽었다. 재야학계는 이를 근거로 고조선이전 오래 전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강단사학에서는 『제왕운기』와 『세종실록』・『단종실록』 등을 근거로 桓因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口/士’자가 ‘囯’이 아니라 因이라는 것을 실례를 들어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고려대장경』은 비슷한 시기인 13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고려대장경』의 글자 가운데 혹시 ‘口/士’자가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여러 경전의 음을 풀이한 『新集藏經音義隨函錄』에 『文殊師利普超三昧經』에 나오는 ‘甫口/士’을 표제어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정작 『문수사리보초삼매경』에는 이 글자가 ‘甫因’으로 나와 있었다. 결국 因과 口/士은 같은 글자임이 밝혀졌다. 조선초기 『삼국유사』에 ‘桓口/士’으로 표기된 것을 조선중기 임신본에서 ‘口/士’자가 ‘因’자인지 모르고 士에 획을 하나 더 그어 王으로 만들어 桓囯이 되어버린 것이다. 桓囯은 桓國이 되어 재야에서 고조선보다 몇천년 전에 세워졌다는 환국의 허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According to Dangun Myth of Samgukyusa[三國遺事], Whanin is the Father of Whanwoong and is the Grandfather of Dangun. According to one block book of Imshinbon[壬申本, 1512] Samgukyusa the latter ‘因’ of Whanin[桓因] was written with ‘囯’, another block book of Pareunbon [Pareunbon, 1394] was written with ‘桓口/士’. Therefore some people insist on not Whanin[桓因] but Whangook[桓國]. Furthermore they assert that Whangook[桓囯] was founded ahead more than Gojosun[古朝鮮]. According to Koryo Tri-Pitaka[高麗大藏經], Shinjibjanggyungeumyeosuhamrok[新集藏經音義隨函錄] explained the pronunciation of 甫口/士printed in Munsusaribochosammaegyung[文殊師利普超三昧經]. By the way surprisingly 甫口/士 was printed in not 甫口/士 but 甫因 in Munsusaribochosammaegyung. In conclusion In 口/士 is a In因 not Gook囯. They mistake 口/士 for 囯. Therefore they add 士[口/士] one stroke count into 王[囯].

      • KCI등재

        고조선 건국 신화의 환인과 환웅-부정론에 대한 비판과 실체에 관한 탐구-

        전진국 한일관계사학회 2022 한일관계사연구 Vol.77 N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scholars denied the historical character of the founding myth of Old Joseon(古朝鮮), and in particular, Hwanin(桓因) and Hwanwoong(桓雄) appearing in the myth were treated as being added to the original myth in later generations. The hypothesis that the contents of Hwanin and Hwanwoong were added to myths under the influence of Buddhism and Taoism continues to this day. This paper criticized this argument. Japanese scholars argued that Hwanin is an abbreviation of Seokjehwanin (釋提桓因) in Buddhist scriptures, and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Hwanin and Dangun(檀君) was applie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Seokjehwanin and Jeondan(栴檀). Otherwise, they paid attention to the records in which Seokjehwanin appeared as a mountain god of Mt. Myohyang, or they argued that Hwanin was included as the belief of Jeseok(帝釋) became popular during the Goryeo(高麗) Dynasty. However, the character of Hwanin in the founding myth of Old Joseon is different from that of Seokjehwanin in Buddhism. The name Hwanin is also not an abbreviation of Seokjehwanin, but is an indigenous word meaning God. Jeseok belief has been popular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it was easily connected with the indigenous belief in heavenly gods. Therefore, it cannot be interpreted only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of the Goryeo period. The myth of the founding of Old Joseon is recorded in several documents besides Samgukyusa(三國遺事). Although it was necessary to investigate these various myths and analyze their uniqueness, Japanese scholars treated them other than the Dangun myth of Samgukyusa as a later manipulation. The differences in various Dangun myths are evident in the stories of the Hwanwoong. When approached from the perspective of acknowledging the uniqueness and historicity of the contents related to Hwanwoong, it can be seen that Hwanwoong symbolizes religious and political leaders in the history of Old Joseon. Therefore, not only Dangun but also Hwanwoong can be interpreted from a historical point of view.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고조선 건국 신화의 역사성을 부정하였는데, 특히 환인과 환웅에 대해서는 본래의 신화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취급하였다. 환인・환웅에 관한 내용이 불교와 도교의 관념에 의해 덧붙여졌다는 가설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본 학자들은 환인은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석제환인을 줄인 용어이고, 환인과 단군의 관계는 석제환인과 전단의 관계를 차용한 것이라 한다. 또는 석제환인이 묘향산의 산신으로 등장하는 문헌을 주목하거나, 고려시대 제석신앙이 유행하면서 환인에 관한 내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고조선 건국 신화의 환인은 불교의 석제환인과 성격이 다르다. 환인의 이름 또한 석제환인의 축약이 아니라 하느님을 뜻하는 토착어이다. 제석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고, 토착의 천신신앙과 쉽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불교적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는 없다. 고조선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 에 수록된 것 외에도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연구의 시작은 그 다양한 신화에 대한 조사 및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분석이 먼저인데, 일본 학자들은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에만 치중하고 그 외의 것은 후대의 조작으로 취급하였다. 여러 단군신화의 차이는 환웅 시대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환웅과 관련된 내용의 고유성 및 역사성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접근할 때, 환웅은 고조선의 역사 안에서 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수장을 신화화한 존재이다. 따라서 단군뿐만 아니라 환웅 역시 역사적 존재로 설정해 볼 수 있다.

      • KCI등재

        삼국유사 고판본과 파른본의 위상

        김상현 ( Sang Hyun Kim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동방학지 Vol.162 No.-

        본고에서는 파른본 『삼국유사』를 다른 여러 고판본과 비교하여, 그 특징과 위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는 권1부터 권4까지에는 저자가 기록되지 않고, 권5에만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徑?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저자명이 보인다. 저자의 職銜에 諡號 普覺이 포함되지 않았음에 유의하면, 일연이 國尊에 책봉되고 79세로 인각사 주지가 되었던 1285년이후로부터 84세로 입적한 1289년까지의 일연 생존 시에 『삼국유사』는 제5권까지 모두 脫稿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의 제자 無極이 덧붙인 기록이 두 군데 있지만, 無極은 자신이 덧붙인 기록에 無極記라고 밝혀 원래의 원문과 구별할 수있도록 했다. 그리고 무극은 『삼국유사』를 간행?유통시켰을 것인데, 아마 이것이 초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에 『삼국유사』가 간행되었다는 구체적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록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작성된 전적에 『삼국유사』가 인용된 사례가 있지만, 이 또한 간행본인지 필사본인 지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조선 초의 고간본을 초간본으로 보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闕字와 避諱代字 등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조선 초기 고판본에도 궐자의 사례가 여러 차례 보인다. 파른본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채 빈칸으로 남겨둔 것이 왕력 및 권1과 권2에서 18곳에 이른다. 고려 혜종의 휘 武자를 대신해서 虎자를 쓴 사례와 성종의 휘 治자를 대신해서 理자를 쓴 사례는 대단히 많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피휘법이 적용된 사례가 많은 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초판본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일것이다. 물론 피휘법이 적용되지 않은경우도 가끔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초기 重刊時에 고쳐졌을 가능성이 있다조선 초에 간행된 고간본 삼국유사 는 석남본, 송은본, 니산본, 조종업본, 범어사본, 파른본 등이 있다. 그러나 석남본은 현재 그 소재가 불명이고,니산본과 조종업본은 권2와 권3만이 전해온다. 따라서 왕력과 권1 권2의 파른본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조선초기 간본 중 왕력과 권1의 경우는 오직 파른본 만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파른본의 가치는 더욱 큰 것이다. 왕력은한국 고대 왕위 계승에 관한 사료를 전해주고 있기에 중요한데, 파른본 왕력의 인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임신본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조의 桓國 운운은 원래 고판본의 桓因의 因을 國으로 잘못 새긴 것이었음은 파른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파른본에는 桓因의 因이 그 이체자인 으로 되어 있다. 비록 한 글자이지만 단군신화와 관련된 오랜 논쟁의 일단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핵심어: 파른본 『삼국유사』, 일연(一然), 왕력(王曆), 환인(桓因), 궐자(闕字)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the unique features and significance of the Pareun Edition of Samgukyusa by comparing it with other editions of the work. The name of the author, Ilyeon, is not included in Books 1, 2, 3 and 4 of Samgukyusa: only volume 5 has the name written in it. Considering the fact that Ilyeon`s posthumous title for the work, Bogak, is not used with the author`s name, it is possible to conclude that Samgukyusa was completed between 1285, when Ilyeon became the chief priest of Ingaksa Temple and master of the King at the age of 79, and 1289, when he attained nirvana at the age of 84. There are two additional remarks by Mugeuk, Ilyeon`s disciple, in the original Samgukyusa. These notes are distinguished from Ilyeon`s text by Mugeuk`s name written under them. It is believed that Mugeuk published and popularized Samgukyusa, and if so, his is likely the first edition. However, there is no definite evidence that Samgukyusa was published in the Goryeo period. Even though a book published in the 1 0th year ( 1 361 ) of t he K ing Gongmin o f Goryeo q uotes f rom Samgukyusa, it is not easy to elucidate whether the quotation from Samgukyusa came from a printed copy or a handwritten one. substituted for ``因`` in the word ``桓因`` in the ``Giyi`` (``Mythology``) chapter of the ``Gojoseon`` article of the Old Edition. In the Pareun Edition, ``因`` in ``桓因`` is engraved as `` ``, which is one of many variant forms of the character ``因``. This one character is important enough to end the controversy of many decades concerning the myth of Tan-gun`s birth.

      • KCI등재

        『환단고기』의 삼신 하느님에 관한 고찰

        이찬구 ( Lee Chan Goo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6 선도문화 Vol.21 No.-

        본 논문은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하느님, 특히 三神(삼신)하느님의 성격에 관한 고찰이 목적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믿어온 하느님의 존재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한문을 쓰기전부터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믿어 온 그 하느님은 어디에 근원한 분인가? 필자는 이를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삼일신고』와 견주며 찾아보았다. 기존의 주장처럼 『삼국유사』의 서두를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해석하면 환인이 곧 하느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환단고기』처럼 昔有桓國(석유환국)으로 시작하면 환인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된다. 환인과는 별도의 神, 즉 一神(일신)이 등장하게 된다. 그동안 환인(桓因)이라는 명호에는 帝釋(제석), 天帝(천제), 上帝(상제)등의 말로 수식되어 왔기 때문에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환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의 해가 몸에 내재한 조상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천제(天帝)라는 칭호도 천상의 하느님이 아니라, ‘최고의 조상신’개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 당시 지도자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사용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하느님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三神의 개념이다. 『환단고기』는 『삼일신고』가 天과 神을 구별하듯이 一氣로부터 삼신이 나온 것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天과 三神을 구별하고 있다는면에서 그 공통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과정철학의 신[三神]과 창조성[一氣]의 관계로도 이해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paper is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the God according to the ‘HwanDan-Koki(桓檀古記)’, especially of the Sam-shin Haneunim(三神 하느님), the Three Gods. ‘HwanDan-Koki is the records on the historical accidents about the ancient Korean nation. This effort is also to trace the existence of God that the Korean natives believed in from the early on. Where does God originates whom our ancestors believed in even before we used Chinese characters, Hanmoon(漢文) As the author of this study, I compared ‘HwanDan-Koki’ as the core reference with the ‘Samil-shinko(三一神誥)’ When we interpret the opening words of ‘Samgukyusa(三國遺事)’ as ‘Sukyu-Hwanin(昔有桓因)’, ‘Hwanin’ carries the same role as the God. However, if we read the text as ‘Sukyu-Hwankook(昔有桓國)’, according to the ‘HwanDan-Koki’, we can see that Hwanin does not mean the God. A il-shin, the One God, is a different God than Hwanin. Until recently, the name of Hwanin were described as Jeseok(帝釋), Cheonje(天帝), or Sangje(上帝) which mean the Emperor or the Heavenly God. This could be the primary reason why Hwanin were regarded as the same manner as the God. But Hwanin is not the God but it seems more appropriate to see his figure as ‘the ancestor leader who is immanently related to the Sun of the Sky’. Also, the title of Cheonje does not mean ‘the God of Heaven’ but the concept is used as ‘the highest God of ancestor’. In other words, the title was used in honorific way of the leader at that time. Moreover, the important aspect of understanding God of ‘HwanDan-Koki’ is the concept of ‘Sam-shin’. ‘HwanDan-Koki’ and ‘Samil-shinko’ share mutual common idea which make a division between the Heaven and the God as the understanding of the ideology that the Three Gods originate from the Il-Ch`I(一氣). It also can be understood 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od and the Creations according to A. N. Whitehead’s the process-philosophy.

      • KCI등재

        檀君天王堂에서 三聖祠로, 그리고 평양 檀君廟 건립에 따른 폐치 논란

        김성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3 民族文化硏究 Vol.100 No.-

        三聖祠는 단군천왕당이 두 차례 이건되면서 환인⋅환웅과 合祀된 결과였다. 단인⋅단웅의 명칭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패엽사와의 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삼성당사적 의 逸文을 토대로 대증산에서의 단군천왕당은 패엽사 창건 이전부터 존재했고, 패엽사 창건 직후 그 아래 소봉으로 옮겨졌다가 신라 말 고려 초 소증산으로 다시 이건되면서 환인과 환웅을 合祀하여 삼성사가 된 것으로 파악했다. 삼성사는 주실인 삼성당, 단군천왕인 구월산대왕과 土地精神⋅四直使者를 모신 배향청,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기우를 위한 기우용단, 초례가 설행되었던 四王寺 등으로 구성되었다. 삼성은 神像(조선 초 이전) 및 위패(조선 초 이후)로 모셔졌는데, 북벽에는 환인(단인)천왕을 남향으로, 동벽에는 환웅(단웅)천왕을 서향으로,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동향으로 모셔 환인을 주향으로 환웅과 단군을 종향했다. 1429년(세종 11) 평양에 檀君廟가 건립되면서 삼성사는 국가제사에서 배제되었다가 1472년(성종 3)에야 비로소 立廟되었다. 이 과정에서의 위패 명칭에 대한 변동성, 단군과 환인⋅환웅에 대한 치제 여부 등은 조선 전기 삼성사 운영의 안정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고려시대 삼성사 제사는 1386년(우왕 12) 은율현감으로 제사를 참관한 羅繼從에게서 확인된다. 그는 1386년 9월 19일 친구인 상서 嚴櫟의 삼성사 歲祭 설행에 참여했다. 이때 모셔져 있던 삼성의 신상은 단인⋅단웅⋅단군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2~3품의 관리가 행향사로 차정되어 설행하는 유사섭사로 매년 봄가을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논의된 국가제사에서의 단군제사는 東方始受命之主로서 ‘朝鮮檀君’을 모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동명왕과 합사된 평양의 檀君祠는 삼성사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문화현 출신의 관료였던 柳觀⋅柳思訥 등을 통해 이에 대한 반론이 전개되었지만, 단군의 도읍으로서 평양은 부동의 위치였다. 이후 李先齊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고기』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며 문화현에서 단군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황해도 전역에 만연했던 癘疫 퇴치의 유일한 방법으로 단군을 다시 구월산으로 모셔 와 삼성을 온전하게 제사하는 것을 제시했다. 그 결과 삼성사는 1472년(성종 3) 평양의 단군사당과 함께 국가제사에 편제되어 中祀를 적용한 「향조선단군의」를 준용하여 제사를 설행하게 되었다. The Samseong-sa Shrine(三聖祠) was the result of the two relocation of Tangun Heavenly King Shrine(檀君天王堂), and Hwanin(桓因) and Hwanung(桓雄) were enshrined with Tangun at this time. The names of Danin(檀因) and Danwung(檀雄) can also be interpreted in this regard. In the background, there was a relationship with Paeyeop-sa Temple. Here, Tangun Heavenly King Shrine in Daejeung-san Mountain existed before the foundation of Paeyeop-sa Temple, it was moved to a small peak below, and it was relocated to Sojeung-san Mountain making it Samseong-sa Shrine in end Silla to early Goryeo period. The State Ritual of Samseong-sa Shrine during the Goryeo period in 1386(12th of King Uwang) has been confirmed by Ra Gyeojong(羅繼從), who witnessed it in his capacity as chief of Euenwul(殷栗). He participated in the implementation of the annual rites of his friend, the official Ueom Yeok(嚴櫟) at Samseong-sa Shrine on September 19th, 1386. One can see that at this time, the enshrined images were those of the Three Gods, Danin, Danung, and Tangun, but during the Goryeo period, two to three public officials were appropriated to the post of priestly officer to perform the ritual as substitutes for the king every spring and fall. Just after the creation of Joseon, the disputed Tangun rites, part of the State Ritual, involved the enshrinement of Joseon Tangun(朝鮮檀君) of the First Founde dynasty(都始祖) in the capacity of the king ordered by heaven to create the nation(東方始受命之主). However, it was concluded that the Goguryeo ruler, King Dongmyeong, who had been enshrined at the Tangun-sa shrine(檀君祠) in a father/son relationship together with Tangun. This affected the conflicted relationship with Samseong-sa Shrine and the with officials originating from Munhwa County, but the capital of Tangun was decisively set in Pyeongyang with no room for debate. Subsequently, Lee Seonje(李先齊) directly quoted the Gogi record from Samguk-yusa to emphasize the historicity of Tangun’s place in Munhwa County, and he also suggested that a plague which was spreading throughout Hwanghae Province was caused by the transferring of the Samseong memorial tablet to Pyeongyang with the only way to stop the spread being its re-establishment on Mt. Guwol accompanied by the complete ritual offered to the Three Gods. While its official proposal could not be used at that precise time, in 1472, the Samseong-sa Shrine, together with the Tangun-sa Shrine in Pyeongyang, managed the State Ritual, applying the Ritual Ceremony for the Memorial Service of the Joseon Tangun(享朝鮮檀君儀), which adapted the Middle Sacrifice(中祀) to perform the ritual.

      • KCI등재

        일반논문 : 『삼국유사』에 있어서의 환인과 제석 -일본의 천신신앙을 보는 관점을 중심으로-

        하카마타미츠야스 연민학회 2010 연민학지 Vol.14 No.-

        한국의 단군신화를 최초로 수록한 『삼국유사』가 단군의 시조를 `환인`이라 기술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지만, 거기에는 `제석`이란 주기(註記)도 함께 병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석`에 관해서는 무속신앙의 원류인 고대 천신(하느님)신앙과 호국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불교의 제석신앙이 습합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또 『삼국유사』 편찬 당시 고려 불교의 제석신앙을 반영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고유 신앙과 불교의 습합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제석`이라는 전부의 신(神)이 인간세상을 통제하는 절대 신으로 또는 단독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으로 된 것은 매우 특정적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왜 `제석`만이 특화되었는가? 라는 의문은 동아시아에 나타나는 신佛습합의 동향을 생각해 볼 때도 매우 흥미 깊은 문제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원인으로 두 가지 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 째, 고대 인도의 인드라 신(Sakra-devanam indra)의 한자 음역연 `석재환인(釋提桓因)`이 『법화경』의 주석에 `능천주(能天主)`나 `능천제(能天帝)`로 한자 표기된 것에 의한 의미 변용한 점이다. 둘 째, 산악신앙을 기반으로 `환웅`이 강림한 태백산과 `제석`의 묘고산(수미산)이 습합하기 용이했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제석`보다도 그 상위에 불교적인 보살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즉, 고유의 하느님을 불교적인 제석의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고, 고대적인 하늘(天)`의 비소화(卑小化). 또는 불교적인 `하늘(天)`과의 이중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고유신과 제석의 습합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제석신앙은 연간세계의 재앙과 호국을 관장하는 신이었고, 단독의 절대 신으로서 신앙되었다는 점이 10세기 무렵 일본에서 형성된 천신신앙의 제석 이미지와도 근접해 있다. 일본의 전신신앙은 스가하라미치자네(管原道眞)의 원령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지만, 제석으로부터 일절의 재앙을 위임받았다는 점도, 환인으로부터 인간세계의 지배를 위임받은 환웅과 유사한 점이다. 또, 원한에 의한 왕권의 권위를 흔드는 측면에서도 삼십삼천(제석천)의 아들이라 불리는 김유신이 사후에 원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제석신앙과 전신신앙의 공통성은 신라 불교의 제석천 신앙이 일본 천신신앙의 기반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세기 무렵부터 이미 일본의 천신신앙은 신라의 제석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간주해 보면, 『삼국유사』에 묘사된 제석신앙도 고려시대의 투영이 아니라, 신라시대의 제석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오히려 신라의 제석신앙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일연에 의해서 『삼국유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호국사상의 중심에 놓아두었던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유 신인 하느님의 표기를 `제석환인`의 `환인` 문자를 사용한 것은 편자인 일연에 의한 창의적 발상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古代韓國の檀君神話を最初に記した『三國遺事』が、檀君の始祖神を『桓因』と記してい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が、そこには『帝釋』という注記も倂記されていた。從來、この『帝釋』という注に關しては、巫俗信仰の源流である古代の天の神(ハヌニム)の信仰が、護國思想を背景に佛敎の帝釋信仰と習合したものであり、『三國遺事』編纂當時の高麗佛敎の帝釋信仰を反映したものであると理解されてきた。固有信仰と佛敎の習合は、東アジア地域に廣く見られる現象だが、帝釋という天部の一神が、人間世界を統制する絶對神として位置づけられ、單獨の神として信仰の對象とされたことは極めて特徵的である。韓國佛敎において、なぜ帝釋が特化されたのかということは、東アジアにおける神佛習合の廣がりを考える上でも興味深い問題である。本稿では、その要因として、古代インドのインドラ神(Sakra-devanam indra)の音譯である『釋提桓因』が『法華經』の注釋の中で『能天主』や『能天帝』と漢字表記されたことによる意味の變容、また、山の信仰を基盤として檀君が降臨する太伯山と帝釋の住む妙高山(須彌山)が融合し易かったことの二點に注目する。但し、『三國遺事』では、帝釋よりも上位に佛敎的な菩薩の世界が置かれている。つまり、古來のハヌニムを佛敎的な帝釋の名に置き換えただけの單純な論理ではなく、古代的な『天』の卑小化、あるいは佛敎的な『天』との二重化を通じて、初めて固有神と帝釋の習合が可能になったのである。こうした韓國の帝釋信仰は、人間世界の災厄と護國を司る神であり、單獨の絶對神として信仰された點において、十世紀に日本で形成された天神信仰に見られる帝釋のイメ―ジとも近似している。天神信仰は菅原道眞の御靈的性格が强いが、帝釋から一切の災厄を齎す許しを與えられたとする點は、桓因から地上の支配を委任された桓雄と類似し、また、수りによって王權の權威を搖るがす側面は、三十三天(帝釋天)の子と稱された金庾信が死後に怨靈的性質を帶びたことを想起させる。こうした帝釋信仰と天神信仰の共通性は、天神信仰の基盤に新羅佛敎の帝釋天信仰が流れ입んでいる可能性を示唆するものと言える。このように十世紀の段階で旣に日本の天神信仰が、新羅の帝釋信仰の影響のもとに形成されたと見るならば、『三國遺事』に描かれた帝釋信仰も、高麗時代の投影ではなく、新羅時代の帝釋信仰を映したものであり、むしろ新羅の帝釋信仰に自らの理想を託した一然によって、積極的に同書に取り入れられ、護國思想の中心に據えられたものと考えるべきであろう。その意味では、固有神のハヌニムの表記に、『釋提桓因』の『桓因』の字を當てたのは、編者一然の創意であった可能性も否定できないと考えられる。

      • KCI등재

        대종교의 삼신일체론 -『삼국유사』와 비교-

        조남호 ( Cho Nam-ho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6 선도문화 Vol.21 No.-

        이 글은 대종교의 삼신일체를 『삼국유사』와 비교하고자 한다. 『삼국유사』는 불교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선도에 입각한 대종교와차이가 난다. 어떻게 이들이 차이가 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아울러 삼신일체론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도 할 것이다. 대종교는 환인ㆍ환웅ㆍ환검 세 신이 하나라고 하는 사고를 견지하였다. 이는 『삼국유사』가 부처 이하의 하늘과 지상에 적용하던 것을 대종교에서는 이를 본체의 작용으로 이해하였고, 이들이 각기 조화주ㆍ교화주ㆍ치화주가 하나라고 봄으로써 종교적으로 원만한 교리체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조화ㆍ교화ㆍ치화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대종교신리」에서는 주재신ㆍ조화신ㆍ교화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이론은 대종교의 교리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폐기되었던 것 같다. 대종교문헌에서 환인ㆍ환웅ㆍ환검을 조화ㆍ교화ㆍ치화로 보는 삼신일체는 불교의 법신ㆍ보신ㆍ응신에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환인ㆍ환웅ㆍ환검이 하나이지만 이것을 체용과 분합으로 보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것을 각기 조화ㆍ교화ㆍ치화가 하나인 점은 의미가 있지만 각자의 내용을 설명하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삼일신고』와 기타 문헌사이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삼일신고』의 주된 내용은 조화와 수행부분이고, 환웅.환검과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유사』와 대종교의 삼신에 대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와 대종교는 홍익인간세상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환웅은 홍익인간 즉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을 펼치고자 하고, 이것을 환인이 인정하는 형태를취하고 있다. 대종교에서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도탄에 빠진 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하느님의 발원과 사람들의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최종적으로는 홍익인간이라는 목표로 귀결된다. In Samgukyusa, The three god(Hwan-in.Hwan-Ung.Hwan-gem) is exist below Buddha. but In Daejonggyo orthodox theory, The three god is one. Hwan-in is creator of god, Hwan-Ung is education of god, Hwan-gem is govern of god. This three god is one. In Daejonggyo non-orthodox theory, Hwan-in is supreme of god, Hwan-Ung is creator of god, Hwan-gem is education of god. This non-orthodox theory is abandoned, because three god is not equal. In Daejonggyo orthodox theory, The three god is one. it is two pattern. One is that three god is function, one is substance, the other is that three god is separate, one is combine. this is logical contradictory, because separate and combine is function. In Daejonggyo orthodox books, thee god is each explained. but it is not consistency. But Samgukyusa and Daejonggyo orthodox books is same, in it’s goal Hongikingan.

      • ‘昔有桓國(謂帝釋也)’의 가필 가능성 연구

        박정학 바른역사학술원 2019 역사와융합 Vol.- No.4

        1281년을 전후한 시기에 편찬된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앞부분에는 옛 책의 기록을 인용(古記云)하여 “오래 전에 환국임금의 아들인 환웅이 있었다(昔有桓國 帝釋庶子桓雄)”로 시작하여 환인의 환국-환웅의 신시-단군왕검의 고조선으로이어지는 우리 겨레의 뿌리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세기 초 일제가 우리 강토를 점령한 후 우리 역사를 자기들보다늦추기 위해 단군신화라 하여 단군 이전의 모든 역사를 신화로 조작하면서 나라이름인 환국의 國자를 사람이름인 因자로 고치고, 환국 옆에 ‘임금을 말한다(謂 帝釋也)’는 주석을 달아 “오래 전에 하느님(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었다(昔有桓因 謂帝釋也庶子桓雄)”라고 만들어 신화라는 것을 더욱 믿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과 정부기관에서도 일본이 왜곡해놓은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사교과서에서조차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이라고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판본마다 다른 자를 因자로 보아 ‘桓因’이라 읽은것은 잘못이고 모두 國자로서 ‘桓國’이라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남구만의 『약천집』과 이종휘의 『수산집』에서 자신들이 본 『삼국유사』에는 ‘昔有桓國帝釋 庶子桓雄’라고 적혀있었다는 내용이 타당한 이유를 논증하여 “오래 전에 환국 임금의 아들인 환웅이 있었다”하고 해석함으로써 선사시대 우리 겨레의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韓國仙道와 ‘檀君’

        鄭景姬(Jung Kyung Hee) 한국도교문화학회 2009 道敎文化硏究 Vol.30 No.-

        본고는 한국선도의 삼성(환인ㆍ환웅ㆍ단군) 인식에 준거하여 삼성, 그 중에서도 특히 단군인식의 변천과정을 살핀 연구이다. 한국선도의 수행 과정은 ‘性通→功完(’弘益人間ㆍ在世理化‘)→朝天’의 과정으로 정리되는데, 한국선도의 전통에서는 이러한 수행 과정의 典範이자 주요 매개자로서 삼성을 제시한다. 한국선도의 원형적 삼성 인식은 ‘仙人이자 군왕’이었는데, 삼성중에서도 특히 단군은 최초의 선도국가 단군조선의 군왕으로서 ‘선인’의 면모 외에 ‘군왕’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하였고 이에 ‘민족시조, 건국시조’로서의 주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국 상고시기 최고의 ‘선인이자 군왕’이었던 삼성은 후대에 이르러 점차 삼성숭배 또는 삼성신앙의 대상으로 화하여 갔는데, 특히 중국에서 도입된 삼교중 불교와 유교의 영향으로 속성이 크게 변질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仙ㆍ佛 습합의 과정에서 삼성은 과거불이나 미래불로 전화되거나, 불교사찰내 三聖뭇類의 주신격으로 전화되었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사의 중심이 삼성이나 단군 대신 기자로 변개되는 현상과 함께 선도에 대한 인식이 더욱 일천해지면서 삼성 인식에 있어서도 삼성 대신 단군만이 따로 떨어져 나와 강조되기 시작하였고 단군의 성격에 있어서도 ‘선인’의 면모가 사라지고 단군조선의 ‘군왕’, ‘민족시조’로만 인식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왕실의 선도 억압책으로 인해 선도가 무속신앙ㆍ무속신앙화면서 삼성이나 단군이 기복적 신격으로 변질되는 경향도 심화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선도가 부활하고 삼성 인식이 회복되는 조짐이 있었으나 선도속의 민족적 성향을 경계한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선도에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곧 이은 남북 분단으로 한국사회에 냉전 체제가 적용되면서 남ㆍ북한 모두에서 선도의 민족주의 노선이 거부되었다. 남한의 경우는 서구사상 및 종교의 영향으로 선도는 ‘무속, 이단종교’ 등으로 이단시되었고 삼성이나 단군도 ‘무속신, 우상’ 정도로 취급되었다. 남북분단 이후 약화 일로에 있던 선도가 1970년대말ㆍ80년대초에 이르러 수련법을 중심으로 새롭게 약진하면서 삼성 인식 또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선도가 부활될 때 삼성 인식 또한 원형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아직까지는 단군에 집중되어 있는 형편이다. 곧 단군에 대한 ‘무속신, 우상’론을 넘어서 ‘國祖’론으로까지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단군을 넘어서 한국선도의 원형적 삼성 인식으로까지는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다. 조선시대 유교전통 하에서 삼성이 아닌 단군이 강조되기 시작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시작을 단군조선 및 단군에서부터 바라보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기에, 근대 이후 새롭게 시작된 단군 담론,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단군 담론도 실상은 이러한 인식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선도의 원형적 삼성 인식에서 볼 때, ‘단군’을 넘어서 ‘삼성’ 인식이 온전히 회복될 때라야 선도적 원형이 복원되며, 더 나아가서는 한국사의 출발점이 제대로 해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This thesis is the study on the changing process of Dangun understanding on the basis of Samsung(三聖: Whanin(桓因)ㆍWhanwoong(桓雄)ㆍDangun) understanding in Korean Sundo. The discipline process of Korean Sundo can be summarized to '① awakening(Sungtong性通)→ ②materialization of awakening(Kongwan功完)→③ revolution to origin of existence(Jochun朝天)', and Samsung used to be understood as the model and mediator of Korean Sundo discipline. The original Samsung understanding in Korean Sundo discipline was the supreme 'Sunin(仙人) and King' and especilly Dangun among Samsung had been recognized not only Sunin but also King of the first Sundo-State, that is Dangun Chosun. Dangun had the main image of 'the progenitor of Korean'. In ancient Korea, the image of Samsung had changed 'the Sunin and King' to 'the subject of worship' by the influence of Buddism and Confucianism. Since the middle age of Koryo Dynasty, with the influence of Confucianism, the progenitor of Korean was changed from Dangun to Kija. As the Sundo understanding had been weakening gradually, Dangun had separated from Samsung and had understood just as 'King of Dangun-Chosun', that is ‘the progenitor of Korean'. In this process, the images of Sunin had disappeared. Since modern times, Sundo revived, but it was frustrated by Japan who guarded against the national inclination in Sundo. After World WarⅡand the fall of Japan, another possibility of revival was given to Sundo. But due to the tragic division of Korea, the Cold War system was applyed a rule to South and North Korea. Both South Korea and North Korea refused the national inclination of Sundo. So Samsung or Dangun was treated as 'Shaman or Idol'. In the late 1970's and the early 1980's, Sundo was made rapid progress. Because Sundo of that time was focused on Sundo discipline, Samsung understanding had been different from the past. When Sundo revives, it is natural that the original image of Samsung understanding recovers. But until now Samsung understanding has been held off Dangun. To be sure, the misunderstanding about Dangun -'Shaman or Idol' has become changed to 'the progenitor of Korean' but did not arrive at the original image of Samsung understanding in Korean Sundo yet. Under the Confusian tradition since Chosun Dynasty, not Samsung but Dangun was emphasized. So until now we used to think that the origin of Korean history is Dangun-Chosun. Currently Dangun conversation is kept within this viewpoint Seeing from the pointview of the original image of Samsung understanding of Korean Sundo, when Samsung beyond Dangun recovers fully, Korean Sundo can be restored and the origin of Korean history can be clarified correctly.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