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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時代文人對蘇東坡詩文的"受容"反基蘇東坡觀

        조규백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06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38 No.-

        조선시대에 한중문화교류를 통해 중국문학의 풍부한 경험을 능동적으로 수용한 사례는 보편적이다. 본고에서는 蘇東坡의 인생과 문학이 어떻게 조선시대 문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우리 문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나름의 문화의식을 지니게 하도록 하였는지 파악하기 위해, 조선시대 문인의 소동파 시문 수용 및 그 蘇東坡觀을 논술하였다. 조선시대의 소동파 열기 변모양상은 南宋前期, 淸代, 그리고 當代(1980년 이후)에 있어서의 중국에서의 소동파 열기의 頂點과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유사한 파도의 起伏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의 소동파 열기는 高麗中期에 최고조를 보이고 있고, 조선전기에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 朝鮮中期에는 唐詩에 대한 유행의 고조로 소동파에 대한 열기는 약해지고 있다. 朝鮮後期에 이르러 성리학(주자학) 자체에 대한 반성과 淸代문예사조의 영향으로 소동파열기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의 '蘇東坡 및 그 詩文에 대한 관점'은 긍정적, 부정적, 절충적 관점으로 3분된다. 긍정적 관점의 실례로는 소동파를 "豪傑之士", "和而不同"의 인물로 평하였으며, 그 시문을 "豪氣", "뛰어난 운치가 푸른 노을을 능가함", "신선의 경지", "治世의 氣象을 실증할 만함" 등으로 높이 평하였다. 부정적 관점의 실례로는 高麗人의 志慮향상을 막기 위해 高麗에 서적을 수출하지 못하게 하였기에 "도량이 좁고 은혜가 적다"는 견해나 '典故를 많이 사용함으로 인한 작품 자체의 난해성', 그리고 純儒(순수 유학자)의 관점에서 동파를 "유교의 좀벌레"로 폄하한 평이 있다. 절충적 관점의 실례로는 '작품의 단점을 인정하나 욕심이 적은 것은 평가한다'는 것이나, '문장의 웅대하나 배우기 어렵다'거나, 그의 시가 '조잡하지만 氣가 盛하여 그 조잡함을 알지 못한다"는 등의 평이 있다. 특히, 부정적인 관점은 북송의 洛蜀黨爭, 소동파의 불교, 도교, 莊子 애호의 성향, 그리고 소동파의 협소한 高麗觀 등과 내재적인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유학은 주로 중국의 程朱學派를 계승한 관계로 소동파와는 학파나 학문관점의 차이가 있어 대립되는 관계에 있었다. 또한 高麗로 도서 유출을 금지하도록 건의한 점 등 소동파의 고려에 대한 편견이나 정치행적에서 나타난 反高麗的 경향이 조선시대 문인의 소동파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조선시대 문인의 소동파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이 소동파의 <赤壁賦>를 애호하여 각지에서 "赤壁船遊"의 기풍을 재현한 점이나, 조선후기 일단의 시인이 "拜坡會(소동파를 숭배하는 모임)"를 성립시켜 소동파의 생일을 기념하는 詩會를 개최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문인의 소동파 애호 풍조를 실증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의 소동파 수용의 원인은 아래와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첫째, 동파의 인품이나 문장의 수준이 큰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시대의 문예숭상 思潮, 조선이 宋나라를 立國의 주된 모델로 삼은 점, 그리고 문학적으로 唐宋八家文을 중시한 점이다. 일부 純儒들은 학파나 사상의 차이로 비판적, 선택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셋째, 조선시대 문인들은 동파와 유사하게 士禍, 당쟁, 전쟁 등을 겪어 그 처지의 유사성으로 인해 동파의 위인과 문학에 共鳴할 수 있었다. 요컨대, 조선시대 문인은 소동파를 인생과 문학에 있어 하나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또한 소동파는 지식인층의 고민에 대한 해결요소를 제공하고 불우한 지식인에게 共鳴을 주었으며, 그의 출사와 은퇴에 대한 관점은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깊은 계시를 주었다. 그 문학의 수용을 통해 문인들은 문학의 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할 수 있었다. This paper traces literary men's acceptance and views of Su Dongpo's poetry and prose during Chosun Dynasty, while researching the reasons why Su Dongpo's life and literature had been a model to the literary men. made our literature rich, and had them conscious of their culture. The changing pattern of interests on Su Dongpo shows, to some extents, the wave of ups and downs similar to the zenith of interests on him during the beginning of South Song, Qing dynasty, and Contemporary times(after 1980s). Interests on him in Korea was the highest in the middle of Korea dynasty and continued to be the same in the beginning of Chosun. But it weakened in the middle of Chosun on account of the high popularity of Tang poetry. In the end of Chosun the fever increased because of the influence of the trends of literary thoughts in Qing dynasty and the introspection on Song confucianism itself. The literary men during Chosun analyzed his life and writing into positive, negative, and compromising viewpoints. Examples of positive views are as follows:he was a gallant and harmonious scholar, but he was uneven. And His prose was highly assessed as that of heroism, state of hermit, and proof of fantastic idea of reign. Su Dongpo was despised as a mean and ungrateful man, because the export of books to Koera dynasty was banned by him:his writings were known to be difficult owing to much use of classics:and pure confucianists spoke ill of him as the moth of confucianism. They criticized compromisingly that his writings has faults, but he had no attachment on his writings:his style was grand, but it was difficult to learn. In particular the negative views on him were internally related to North Song's Luo Shu Party Strife, Su Dongpo's Buddhism, Taoism, disposition of Chuangtzu preference, and his narrow view of Korea dynasty. In general the assessment on Su Dongpo by literary men during Chosun appeared to be the best. The literary men during Chosun preferred his Chibi Fu and reproduced traits of Chibi boating excursion. And a group of poets in the end of Chosun held poetry society commemorating his birthday by making Dongpo Respect Association. Those traits proved the preference trend of Su Dongpo. The literary men accepted him for the following three reasons: firstly, his personality and level of his sentences had great attraction of absorption. Secondly literature respect trend and Song dynasty were the major model of Chosun dynasty's building itself, and TangSong Bajia prose was mattered literally. However some pure confucianists accepted them critically and selectively because of the difference of their thoughts and schools. Finally, the literary men sympathized his life and literature as they experienced similar messacre of scholar, party strife and war. To sum up, the literary men during Chosun considered him as an ideal and typical model for their lives and literature. In addition Su Dongpo provided the intellectuals with methods of problem solution, and the poor intellectuals were moved. Futhermore the attitude for him to enter the government office and retire hinted at deep insight to the literary men. While accepting his literature, they could improve their level of literature and express their individual spiritu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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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茶文化

        신미경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2012 한국전통문화연구 Vol.10 No.-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차는 여전히 궁궐에서 의식다례로 행해졌으며 더 격식화되고 엄격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근래에 고려시대의 융성한 차문화가 조선시대에 쇠퇴 했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 버렸 다. 조선시대의 차문화가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지금껏 이어져 왔는지 선인들의 흔적으로 조선시대 차문화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시대의 다서는 5권으로 차에 관한 전문다서가 있었고, 16-19세기까지 많이 출간 되 었던 백과사전류의 책속에는 차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었다.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茶事를 살펴보니 궁중에 는 ‘茶禮’라는 이름으로 더 격식화, 의식화되어 행해지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궁중의 다사가 사라지고 조선의 차문화가 쇠퇴하였다고 말하지만 선가의 차인들은 여전히 차를 마시고 차문화는 茶詩로 이어져오고 있었다. 사대 부가의 차문화는 『주자가례』의 유입으로 가정의 제의례에 차를 올렸고 600여명이 넘는 차인들이 차시를 남겼고 차문화의 맥은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 차문화가 쇠퇴했다고 말한 사람은 1940년에 펴낸 『朝鮮の茶と禪』에 당시 조선총독을 지낸 바 있는 우가끼(宇垣一成)가 쓴 서문과 당시 상공대신(商工大臣) 이었던 후지하라(藤原銀次 郞)가 쓴 글로 우리나라 근현대에 나온 다서들이 그대로 다시 인용하면서 우리의 차문화는 쇠퇴하였다고 전해졌다. 이는 식민사관의 쇠퇴이며 우리의 시각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전히 차가 존재했다. Chosun Dynasty still held the traditional tea ceremony in the palace like the Goryeo Dynasty, only more formal and strict. However, recently the thought “flourishing tea culture in Goryeo Dynasty declined in Chosun Dynasty” has become a fact. By examining how the tea culture passed down and continued to the modern days through traces of our ancestors, five traditional tea specialty publications were found and encyclopedias published during 16th-19th century held contents related to teas. According to the “affairs of tea (茶事)” in 『朝鮮王朝實錄』, the tea was more formally referred to as the “tea rituals(茶禮)” and were performed as a ceremony. People say that after the 19th century, affairs of tea declined in the Chosun Dynasty, but the tea drinking ancestors continued to drink tea and the tea culture continued in the tea books. The tea culture of the noble mans was influenced by the 『朱子家禮』 and put tea on the table for traditional memorial ceremony. Over six hundred tea drinkers left tea poems and the tea legacy continued on. People say that the Korean tea culture declined because the modern and contemporary tea specialty publications directly quoted from the 『 朝 鮮の茶と禪』 published in 1940 which contained prefaces of Wugaki (宇垣一成), Japanese who once served as the governor of Chosun, and writings of Hujihara (藤原銀次郞), Japanese who was the minister of commerce and industry at the time. This is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and not our traditional view of history. Tea still existed in Chosu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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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양명학에 관한 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 -조선시대 양명학 일반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김세정 ( Kim Sea-jeong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0 儒學硏究 Vol.52 No.-

        1970년대부터 시작한 조선시대 양명학에 관한 연구는 지난 50년간 양적인 면은 물론 질적인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다. 필자는 지난 50여 년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조선시대 양명학 관련 연구 문헌 목록>을 제작하였다. 이 목록에 수록된 자료는 저서 78권, 원전 번역서 46권, 외국문헌 번역서 2권, 박사학위논문 97편, 석사학위논문 213편, 학술논문 1,287편을 포함 총 1,719종에 달한다. 이 방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선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전체적인 윤곽을 조망할 수 있는 ‘조선시대 양명학 일반’에 관한 연구 성과물과 관련한 목록에 수록된 자료들(저서 16권, 박사학위논문 8편, 학술논문 93편)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살펴보았다. 총 16권이 간행된 저서 부분은 크게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인 1980년대,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심화 시기인 1990년대와 2000년대,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국제화시기인 2010년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는 양명학의 전래와 수용과 전개라는 조선시대 양명학 일반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면,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연구 내용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명학과 성리학의 교섭과 융섭을 다룬 연구가 많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저서의 주제와 관점과 내용이 다양화되고 심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명학 일반을 다룬 박사학위논문의 경우에는 8편으로 양적으로 많은 편은 아니지만, 철학은 물론 역사학, 정치학, 종교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박사학위논문이 나옴으로써 조선시대 양명학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줌과 아울러 조선시대 양명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한국양명학 연구 기반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는 점이 주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총 93편이 간행된 학술논문의 경우는 크게 3시기로 나누어 살펴봤다. 첫 번째 시기는 1980년대까지에 해당하는 시기로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토대 마련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1990년대로써 조선시대 양명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시기는 2000년대와 2010년대로써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명학 일반에 관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첫 번째로 총론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양명학 전반을 조망하는 연구 작업에 각론에 해당하는 개별 양명학자에 대한 연구 성과 및 시기별·분야별 연구 성과들을 반영해야 할 필요성이다. 두 번째는 조선시대 양명학 전반을 다룬 연구 성과물이 대체로 철학 분야에 치중되어 있는 바, 문학과 사학과 철학 분야에서의 균형 있는 연구의 필요성이다. 그래야 조선시대 양명학을 입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조선시대 양명학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 셋째,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는 오늘날의 시대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인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양명학자들이 보여준 수시변역(隨時變易)과 권도(權道)의 주체성과 시대정신, 실심(實心)과 감통(感通)의 애민정신과 실천정신을 온전히 계승하고 현실에 맞게 되살리는 것이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which started since the 1970s has achieved amazingly remarkable results in both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aspects during the last 50 years. The author has collected those achievements and made a “List of Works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The works in that list include 78 books, 46 translations from original texts, two translations from foreign works, 97 doctoral dissertations, 213 master's theses, and 1287 academic papers, totaling up to 1719. The author intends to carry out the analysis of that huge compilation in several stages. In this paper as the first stage, the author considers a part of writings contained in that list (15 books, seven doctoral dissertations, 94 academic papers) which are related to the ‘general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that can draw a general outline of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at, the author makes some evaluations of the current situation of that research and the outstanding problems that must be resolved. In those works, 15 published books can be divided according to the time of publication: the 1980s when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its first base, the 1990s and 2000s when that research developed, and the 2010s when that research was internationalized. While the first half of them provide a foundation to the research on the general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i.e. the introduction, reception and development of Yang-ming studies, in the second half we can see that the research focuses more on the negotiation and interconnection between Yang-ming studies and Neo-Confucianism in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he subjects, viewpoints and contents of those books show the diversification and improvement. For the doctoral dissertations on the general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it can be said that those eight dissertations are not much in quantity, but the variety of academic areas they are in - philosophy, history, politics, religious studies, literature, etc.-shows that the main results they obtained are the consideration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from various aspects, the profound knowledge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and the enrichment of the base for the research on Korean Yang-ming studies. For the 93 academic papers, they can be divided into 3 parts according to their publication time. The first one is the papers published until the 1980s when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started to be established. The second one is the papers published in the 1990s when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was regularly carried out. And the third one is the papers published in the 2000s and 2010s when that research reached maturity. Despite the remarkable results, the research on general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still has problems that must be solved. Firstly, the results of research according to the time and domain, and the research on each scholar of Yang-ming studies must be reflected in the research showing the outline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Secondly, the results of the research on the general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that focused much on the philosophical aspect must be balanced among all philosophical, literal, and historical aspects. Only so can Yang-ming studies be fully described and their true character be shown. Thirdly, it is necessary to advance arguments about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connection with problems of the present era. The ultimate aim should be that the research on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must completely succeed and revive, in the present reality, the self-control and independence and the spirit of time that were showed in ‘variation according to time (隨時變易)’ and the ‘way of adaption (權道)’, the spirit of loving the people and the spirit of practice that were showed in the terms of ‘sincere mind (實心)’ and ‘empathy (感通),’ i.e. the spirit of Yang-ming studies that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manife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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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ataset 구현 방안

        권순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문학연구소 2003 民族文化硏究 Vol.38 No.-

        본 논문은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ataset의 Data Scheme 설계 및 구현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데이터 세트는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구축된 데이터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초적인 틀이라 할 수 있다. DB의 소통성과 재활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표준에 근거한 Data Scheme이 반드시 정의되어야 한다. 또한 설정한 목표에 맞게 정보를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도 통일된 지침과 설계를 기술한 Data Scheme이 매우 중요하다. II장에서는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B 구성에 대해 소개하였다.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데이터베이스는 크게 1)GIS DB, 2)주제별 DB, 3)참조 DB로 구성된다. GIS DB는 Base-map과 주제별 DB의 내용을 Base map에 표현한 주제도로 구성된다. III장에서는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ata Scheme을 정의하였다. 주제별 DB의 Data Scheme은 ‘Header(ID, Index), Data, Link, Comment’의 이 4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참조DB에 주제별 DB에서 원전이나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 활용할 목적으로 구축되는데, 원전텍스트, 이미지, 동영상, 사운드 인명DB, 지명DB (Gazeteer)로 구성된다. 본 논문에서 실제 전자문화지도 구축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세밀한 표준적 지침을 제시하였다. IV장에서는 메타데이터(Metadata) 작성 방안을 제시하였다. 메타데이터는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 혹은 ‘전자 자원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 요소’로서 자원의 위치 파악과 획득에 필요한 데이터 요소의 집합이다. 정보의 공유체계를 확보하고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메타데이터 작성이 필요하다. 먼저 ECAI(Eletronic Culture Altras Initiative)가 메타데이터의 표준적 방안으로 채택한 Doublin Core에 대해 검토하고, ECAI 메타데이터 표준안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들만으로는 조선시대 문화적 특성을 포괄할 수 없다고 보고 조선시대 문화의 다양한 주제 영역과 존재 양태를 포괄하면서 네트워크 환경에 적합한 호환성과 국제적 소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에서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메타데이터 표준안을 설계하였다.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메타데이터 표준안은 더블린코어와 ECAI 표준안을 근간으로, ‘조선시대 문화 분류 체계’, 사부분류법(四部分類法)’,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군현 코드표’ 등을 반영함으로써 조선시대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In this paper, I proposed plan to materialize the dataset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I also presented a design for the data scheme and its materialization plan. The dataset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would be the most fundamental frame to organically combine and utilize diverse electric data, which are differently arranged by diverse subjects and forms. To circulate and utilize a DB actively, there must be a standard data scheme. A data scheme having unified principle and design is required to meet this need. In chapter II, I introduced the DB’s structure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The atlas is composed of three parts of the DB: the GIS DB, the cultural subject parts’ DB and the reference DB. The GIS DB is again composed of two parts: the Base-map and the several maps of subjects which are drawing the contents of the cultural subject parts’ DB on the Base-map. In chapter III, I made a definition for the data scheme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The data scheme of cultural subject parts’ DB is composed of four parts: the header including ID and index, data, links, and the comments. This scheme is made for the use of finding more concrete facts or original sources in the reference DB beside the cultural subject parts’ DB, thus it includes the original texts, Image, moving pictures, sounds, and the DB of personal names and the gazetter. I presented detailed standards to utilize the electric culture altras practically. Chapter IV is about making metadata. Metadata means the data about data. It is the data needed for describing electric sources, thus metadata is the collection of data necessary to find the location of the sources. Making metadata is necessary to confirm the information communizing system and to actively utilize the system. In chapter Ⅳ, I examined the Doublin Core which ECAI, the Electronic Culture Altras Initiative, takes as its standard program of metadata, and I investigated the standard devices of metadata of ECAI. As a result, I found out that the characteristics of Chosun Dynasty Culture cannot be comprehensively captured only by the standard devices of metadata of ECAI, thus I designed a new device of metadata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This new devise can interact throughout the network effectively and accomplish international interaction. The new devise also can comprehensively capture diverse facts and various subject parts of Chosun Dynasty Culture. The standard devise of metadata of the Electric Cultural Atlas of Chosun Dynasty is based on the Doublin Core and the standard devise of ECAI. On the basis of it. The new devise includes classification system of Chosun Dynasty Culture, four-parts-assorting-methods(四部分類法), and the code list of the administrative regions Chosun Dynasty(조선시대 행정구역 코드표), thus the devise is expected to fit better for the characteristics of Chosun Dynasty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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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三世佛像의 연구

        심주완(Shim Joowan) 한국미술사학회 2008 美術史學硏究 Vol.259 No.259

        三世佛은 敎學上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시간적 개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불로 구성된 독특한 삼세불상이 대유행을 하게 된다. 또한 본존상에는 비로자나불이 등장하기도 하고, 좌우존상에는 아미타불ㆍ미륵불ㆍ다보불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삼세불은 주요 사찰의 중심 佛殿에 봉안되고 있고, 또한 우리 라라 전역에 퍼져 있어 조선시대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삼세불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으며, 그 연구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삼세불은 교학적 근거가 없고 다양한 형식과 복합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어 연구자들 마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석가불 중심의 삼불 형식은 三世佛, 三佛, 三界佛, 三方佛 등으로 명명되고 있으며, 비로자나불 중심의 삼불 형식은 ‘毘盧遮那三身佛’, ‘三身佛’, ‘三身三世佛;, ‘三佛’ 등으로 명명되고 있다. 그래서 명칭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하고, 조상 기록을 밝혀 ‘三世佛’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함을 증명하였다. 삼세불은 인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5세기 중국 북위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미 시공간의 개념이 융합된 삼세불이 조성되고 있었다. 遼ㆍ金代 다시 유행하기 시작하여 원ㆍ명ㆍ청 대 이르기까지 삼세불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隋代 〈靈泉寺 大主石窟 삼세불좌상〉(589년)은 본존 노사나불, 좌존 미륵불, 우존 아마타불로 구성되어 남북조시대 삼세불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도4), 금대 〈常樂寺 삼세불좌상〉은 본존 석가, 좌존 미륵, 우존 가섭으로 구성되어요ㆍ금대 상세불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도7).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 삼세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 초까지 고려와 전통이 이어지고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게 된다. 특히 고려시대 〈금강산 삼불암 마애삼존불상〉은 존명이 밝혀져 삼세불의 개념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도5). 조선시대 삼세불을 크게 석가삼세불 형식과 비로자나삼세불 형식으로 구분하였는데, 비로자나삼세불 형식은 조선 전기적인 경향이 강하고 석가삼세불 형식은 조선 후기적 경향이 강하다. 특히 좌존상은 미륵불에서 약사불로 대치되어 조선 후기에는 약사불로 정형화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석가불ㆍ약사불ㆍ아미타ㆍ로 구성된 석가삼세불 형식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조선시대 삼세불은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상징하는 시간의 개념과 사바세계ㆍ유리세계ㆍ극락세계을 상징하는 공간적 개념이 융합되어 있고, 또한 法身ㆍ報身ㆍ化身의 三身佛 개념도 융합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五佛을 형상화하고, 시방삼세일체제불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고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의 조화를 이루는 구성력을 보이고 있다.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are normally understood as temporal manifestations of Buddha, hence the embodiments respectively of the past, present and the future. Dilling the Joseon Period of Korea, however, a peculiar triad of Buddhas came to represent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composed of ??kyamuni, Bhai?ajyaguru and Amit?bha. The main Buddha of the triad was sometimes Vairocana, accompanied by Amit?bha, Maitreya or Prabh?taratna Buddha as attendant Buddhas.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are given prominent positions within major Korean temples, located most often inside their main sanctuary, and their place in the history of Joseon-period sculpture was just as central.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in Joseon Buddhist temples have received much attention among Buddhist specialists. However, due to the lack of doctrinal grounding of this type and its vast stylistic diversity as well as its eclectic symbolism, the interpretation of this sculptural tradition varies wildly depending on the researcher. Buddha triads having ??kyamuni as the main Buddha are generally designated by terms such as samsebul (Buddhas of the three Worlds), sambul (Three Buddhas), samgyebul (Buddhas of the three spheres) or sambangbul (Buddhas of the three directions)." Meanwhile, those triads having Vairocana as the main Buddha are referred to as birojanasamsinbul (Buddhas of the three bodies with Vairocana)," samsinbul (Buddhas of the three bodies), samsinsamsebul (Buddhas of the three bodies and the three worlds) or sambul (Three Buddhas). In this paper, I discuss the confusion in the nomenclature of this iconographic type, and attempt to explain why it should be designated as samsebul by tracing back to the earliest available historical records.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unknown in Indian Buddhism, made their first appearance during the fifth century, in Northern Wei of China. Buddha triads produced during this period already exhibited the defining characteristics of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namely the successive spatio-temporal embodiments of Buddha. The images of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regained popularity during the Liao and Jin Dynasties, and the tradition was maintained throughout Yuan, Ming and Qing. The Sui-dynasty Buddhas of the three worlds in the Dazhu cave at Lingchuan Temple (589), having Rocana as the main Buddha, accompanied by Maitreya as the left attendant and Amitabha as the right attendant, for instance, are considered an excellent showcase of this sculptural theme, as it was understood and interpreted during the Northem and Southern Dynasties of China, Likewise, the Jin-Dynasty Buddhas of the three worlds in Changle Temple, consist of ??kyamuni, Maitreya and a K??yapa eloquently bespeak the related tradition in the Liao and jin Dynasties. In Korea, sculpted images of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first appeared during the Goryeo Dynasty. This tradition, having remained current through the following Joseon Dynasty, was brought to a peak in the later part of the dynasty, when it gained a nationwide popularity. The Maitreya Buddha Triad at Samburam of Mt. Geumgang, dating finn the Goryeo Period, in particular, importantly helped to cast light on the symbolism of the Buddhas of the three worlds, when the identities of the three deities were finally established (Fig. 5). Joseon-period Buddhas of the three worlds are distinguished into two broad categories, those with ??kyamuni as the main Buddha and those having Vairocana as the main Buddha. The latter are generally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while the fanner are in the style of the late Joseon Period. In the late Joseon Dyansty examples, Bhai?ajyaguru Buddha replaced Maitreya as the lefthand attendant of the main Buddha, Hence, the triads popular nationwid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most often consisted of ??kyamuni. Bhai?ajyaguru and Amit?bha. Joseon Buddhas of the three worlds combine the temporal symbolism where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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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

        문재숙(Moon Jae Soo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6 국악교육 Vol.42 No.42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는 「고대 가야금연구」,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야금 역사에 관해 연구해본 것이다. 조선시대 가야금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실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류하기 쉽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초기(태조(392)~성종(1494))․중기(연산군(1494)~경종(1724)) · 후기(영조(1724)~1910)로 3기로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문집, 그림자료에 나타난 가야금에 대해서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시기별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초기사료 중 문집, 그림자료가 전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 등 왜침을 겪으면서 소실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문집의 가야금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았으며, 중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그림자료를 살펴보고 더불어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가야금과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거문고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후기 또한 초기, 중기와 동일하게 『조선왕조실록』과 선비들이 남겼던 문집, 그리고 그림자료에 남겨진 가야금을 살펴보았으며 더불어 후기에 편찬된 가야금 악보와 가야금 산조의 출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에는 가야금 관련 문집을 살펴보면 금(琴), 현(絃), 사(絲), 12현(十二絃) 등으로 가야금이 불렸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현(絃) 또는 가야금(伽倻琴)으로 불리어 졌다. 세종시대부터 가야금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세종 때 수양대군(훗날 세조, 세조의 대군시절 이름)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외가의 가풍과 명망 있는 집안 분위기가 그대로 세종의 집안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이후에는 왕가에서 연주되는 기록이 없는데, 이는 세종 이후에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가야금보다는 거문고를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거문고가 유교사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헌자료는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거문고 악보는 55여 종이 전하는 반면 가야금 악보는 『졸장만록(拙庄漫錄)』과 『방산한씨금보(芳山韓氏琴譜)』 등 에만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예악(禮樂)사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졸장만록』은 가곡, 졸장만록 이후에 간행된 『방산한씨금보』는 기악곡을 전하는데 이는 성악곡에서 기악곡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자료를 보면 칠태부인 경수연도(慶壽宴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양반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고, 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는 댓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많다. 이것은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음량이 작아서 야외에서 연주하기에는 제한될 수도 있었겠지만, 관악기 보다는 현악기 연주한 사람들이 좀 더 대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96년 졸장만록이 만들어 졌는데 악보 내용은 거의 가야금 중심의 악보이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가 쓴 『관우희(觀優戱)』가 1810년도에 만들어 졌고, 판소리가 19세기 전후로 성행했던 것으로 볼 때 가곡을 뒤를 이어 판소리가 성행했으며 이어서 1916년 『방산한씨금보』에 나타난 기악곡 중심의 가즌영산회상으로 이어졌다. 가야금 산조 창시자인 김창조(金昌祖: 1865~1919)가 1895년에서 1919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창조는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를 두루 섭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금 산조 음악 속에는 가곡과 민간풍류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가야금 산조가 위대한 악곡이 탄생된 것은 그 전에 있었던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의 악곡들의 우수한 점들이 응집되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판소리 에서는 성음을 가곡에서는 가곡성 우조를 포함한 평우조 선법을, 민간풍류에서는 가야금 연주수법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김창조는 가곡, 민간풍류, 판소리, 퉁어(퉁애), 해금 등 까지도 섭렵할 수 있었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야금 산조 악곡을 창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직업을 가진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연구방법 고찰

        최미정(Choi Mi Jeong)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3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Vol.0 No.6

        본고는 조선시대 여성의 공적영역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직업을 가진 조선시대 여성을 고찰하기 위한 연구방법론을 다룬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조선시대 여성의 직업의 개념, 조선시대 여성의 실제 직업들, 당대의 개념과 실제 사이의 거리 및 그것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대해 현대의 여성직업에 대한 것들과 비교해 이론적으로 논의하였으며, 이를 통해 기녀, 의녀, 무녀, 궁녀 및 수공업에 종사하는 여성, 사노비를 대상으로 확정하였다. 또한 직업의식과 직업적 성취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후반부에서는 그 중의 하나인 기녀를 대상으로 하여 기녀의 직업의식을 기녀제도와 당대 사회의 구조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직업을 가진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연구방법을 확정하기 위하여 먼저 '직'에 대한 조선시대의 논의 및 신분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의무인 '직역'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이에 해당하는 개념을 고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직업이라는 용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직업은 존재함에도 담론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여성의 일을 인정하는 다산의 논리로써 조선시대에서 여성의 직업을 논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현대에서도 여성의 일 및 취업에는 일, 가족, 국가의 정치학이라는 구조적 개입이 있음을 참고하여, 가부장제 및 신분제에서 약자인 여성에게 의무로 주어지는 직업수행의 의미가 사회구조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사회적 소외를 의식하며 일을 해야 하는 조선조 여성의 직업의식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작업동기를 단계별 욕구의 충족으로 보는 Maslow의 직업동기이론에 의거하여 생리적 욕구를 넘어선 안정, 사회적 욕구, 자부심, 자기달성의 네 단계로 고찰하였다. 또 기녀의 직업의식의 고찰을 위하여는 妓役로서의 기녀제도를 고려하여 이 동기단계를 적용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여성의 직업의식은 남성에의 의존성을 여성의 기본적 특징으로 하는 중세사회의 구조 속에서, 자의, 타의에 의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도외시하고 생업을 가지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동기와 목적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신분에 따른 의무수행을 넘어서 직업적 성취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는 욕구와 직업종사자의 자기정체성 확립의 의미를 고찰하여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기녀들이 직업의식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직업적 욕구달성은 첫째, 실리의 추구, 둘째, 여성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노출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극복, 셋째,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제한된 유혹을 전면에 내세운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 넷째, 풍류를 통한 자기 완성의 네 단계라고 제시하였다. This article is consist of two parts : the former part is theorizing the method of study on those women having occupations in the Chosun period and the latter one is the occupational consciousness of the Kisaeng(妓女). I distinguish the concepts of women's obligatory working from the ideological concept of occupation in the middle ages. Because, at that time, women's occupation has existed actually, nevertheless they have never been existed lettered and systematically. In fact, women working in public were the performances of duty owing to their low classes inherited by their mothers. I argue that those public services were regarded as occupations by the theory of Jeong, Yak-yong(丁若鏞). As the result, I scope several occupations as the subject of the women's occupation in Chosun ; a Kisaeng(妓女), a female shaman(巫女), a court lady(宮女), a court female doctor(醫女), a handcraft woman working in public and a servant girl. I propose that those women's occupation achievements are studied by A Maslow's the needs hierarchy theory. As for the Kisaeng(妓女), the first stage is that they got a job satisfaction was the wealthy ; the second was the conquest over the commons which let women restricted within the wall of the house and the family ; the third was the aggressive defiant by seduction which were also forbidden to the honest women ; the fourth, the highest one was the perfection of self by the will for freedom through the high class of arts(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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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사행기록에 대한 검토

        김경록 진단학회 2019 진단학보 Vol.- No.132

        조선은 국가안보와 정치․외교․경제․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대륙과 해양으로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륙의 경우, 원명교체, 명 중심 국제질서, 명청교체, 청 중심 국제질서 등 계서적인 국제질서 하에서 대중국 외교관계를 맺어 조선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중국 중심 외교관계를 조공체제라 할 수는 없지만, 외교형식에 있어 중국에서 제정한 외교제도를 준행함으로써 조중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교분쟁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즉, 조선은 외교관계의 형식에 있어 명․청에서 규정한 외교절차 및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형식측면에서 사행과 사신접대로 정리할 수 있다. 조선은 왕실의 정통성과 시대상황에서 발생하는 각종 시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국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고, 적극적인 사행과 사신접대를 시행했다. 사행이 조선의 외교목적을 달성하는 형식이었기에 외교문서 전달이라는 근본적인 사행목적 이외에 사행을 통해 외교정보를 획득하고, 문화를 소통하고, 경제적 필요를 해소하였다. 중요성 만큼이나 사행은 사행원에 의해 생산된 방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사행기록은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시대 대중국 관계는 국가안위와 왕실의 통치권위를 위해 매우 중요한 외교였다. 이를 반영하여 조선은 중국에서 제정한 외교제도를 준행하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조중관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대중국 관계에서 외교제도는 사행과 사신접대를 통해 운용되었는데, 조선은 대중국 사행을 통해 방대한 사행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사행기록은 작성주체, 시기별, 형식별, 노정별로 분류하여 구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교문서를 포함하였는가 여부에 따라 사행기록의 역사적 의미가 구분될 수 있다. 질정관이 국왕에게 보고한 『질정록』이 포함된 사행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사행기록에 대한 연구에 있어 우선적으로 사행기록 작성과정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史的 검증이 필수적이다. 또한, 사행기록 및 사행명에 대한 명칭문제가 학계의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사행기록은 기록물, 문학작품, 고전, 보고서의 성격이 있어 역사학의 보물창고라 할 것이다. 또한, 사행기록은 조선과 중국의 문화교류의 기록이며, 그 내용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다. 사행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저서의 전승관계 및 영향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방대한 내용을 포괄하여 조선시대 백과사전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행기록의 성격과 의미에 주목하여 해외학계에서도 사행기록에 주목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사행기록에 대한 방대한 연구성과를 통해 사행기록의 가치 및 조선시대 대중국관계에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연구경향에 있어 노출된 문제 가운데 편중된 연구경향성이 재검토되어야 한다. 사행기록 자료의 기본 성격에 대한 이유가 전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행기록을 기행문으로 한정하여 여정과 문학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하여 사행기록의 본질적인 측면, 즉, 조선시대 가장 치열한 정치, 외교분야에 집중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대외관계사 분야에 중국사신의 조선에 사행한 기록인 사조선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Joseon made activ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continent and the oceans for the purpose of national security and political, diplomatic, economic and cultural exchanges. In the case of the continent, Joseon tried to maximize the national interest by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under the orderly international order such as Yuan was replaced by Ming, Ming centered world order, Ming was replaced by Qing, Qing centered world order. Although it can not be said that China's central diplomatic relations are a tribute system, Joseon sought to prevent diplomatic disputes that could arise in the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China by following the diplomatic system established by China in diplomatic form. In other words, Joseon has followed the diplomatic procedures and systems prescribed by China in the form of diplomatic relations, which will be called “sahaeng(使行)” and “receive envoy(使臣接待)". Because Joseon was a form of attaining diplomatic goals, Joseon acquired diplomatic information, communicated the culture, and solved the economic need by means of sahaeng besides the fundamental purpose of delivering diplomatic documents. The envoys of Joseon left vast records, which are very important for studying the history of Joseon. Due to the significance of the sahaeng records(使行記錄), research achievements have accumulated in various disciplines such as history, Korean literature, art history, music history, economic history, and costume history. Sahaeng records of the Joseon period can be classified by subject, period, type, and style. In addition,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sahaeng records can be distinguished by whether diplomatic documents were included. There is also a sahaeng records which contains Jiljeongnok(質正錄) which Jiljeonggwan(質正官) reported to the king.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process of making a sahaeng records in the study of sahaeng records in the Joseon, and historical verification is essential. In addition, the issue of naming of sahaeng records and the name of the sahaeng need to be discussed extensively by history. Sahaeng records of the Joseon period are characteristic of history, literary works, classics, and reports, so it will be a treasure house of history. In addition, sahaeng records are a record of cultural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China, and its content is extensively included. It is possible to grasp the tradition relation and the influence relation of the Joseon writings with sahaeng records, and encompassing the vast contents, it is meaning of encyclopedia of Joseon period. There are many studies in overseas history focusing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this sahaeng records. Much has been revealed in the value of sahaeng records and in the Chinese relations of the Joseon through the extensive research results on sahaeng records. Nonetheless, biased research trends among the exposed issues should be reviewed to date. Despite the premise of the basic nature of sahaeng records, there is a tendency to focus on travel and literary aspects. On the other hand, there are relatively few studies focusing on the politics and diplomacy in the Joseon, which was the essential aspect of sahaeng records.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study Sajoseonnok(使朝鮮錄), which is a record of Chinese env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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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아동놀이의 실상과 특징

        서종원(Seo, Jong-Won)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17 民俗硏究 Vol.0 No.35

        본 연구는 아동놀이의 전반적인 실상을 통해 조선시대 아동놀이의 특징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근현대 시기와의 비교적인 관점에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여타의 분야가 그러하듯 통시적인 맥락에서 특정 시기의 아동놀이의 실상과 특성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시대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그 시대의 특성을 조명하고, 전후 시기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 지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연구와 관련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조선시대의 아동에 대한 인식을 우선 살피고, 아동놀이의 실상을 소개한 다음 조선시대에 보이는 아동놀이의 몇 가지 특징을 도출하였다. 아동놀이의 실상을 살피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에는 아동만을 위한 놀이가 부족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자연물을 소재로 한 놀이가 적지 않았다는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근현대에 비해 아동놀이 자체가 단순했으며, 생업과 관련된 아동놀이 역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아동놀이가 이러한 특징이 보이는 것은 결국 이 시기의 시대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아동에 대한 인식 부족과 유교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이 놀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근현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아동을 하나의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았으며 아동만을 위한 놀이가 많지 않았다. 다양한 형태의 장난감을 만지며, 게임기에 몰두하는 근현대의 아이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아동만을 위한 놀이가 이후의 시기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른들의 경험이나 행동을 보고 배우며 자라야만 했던 시대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children’s games of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overall reality of children’s games. In particular, this Study attempted to achieve the purpose in the comparative viewpoint with the modern times. It is important to review the reality and characteristics of a specific period in the diachronic context like other fields. Each period shows various differences, but it can cast light upon the characteristics of a period in a big frame and clarify the differences before and after the times. This study referred to previous studies and literature, first examined the recognition of the Joseon Dynasty about children, introduced the reality of children’s games, and derived several characteristics of children’s games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course of examining children’s games, it was found that the Joseon Dynasty did not have sufficient games only for children and there were many games about natural objects. Furthermore, compared to the modern rimes, the children’s games were simple themselves, and the majority of the children’s games was related to occupations. It is believed that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children’s games of the Joseon Dynasty were the results of the reflec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times. Concretely, the characteristics of the times defined as a Confucian society as well as the insufficient recognition of children influenced the games. The Joseon Dynasty different from the modern times did not recognize children as a subject and did not have many games only for children. It is surely different from the children in the modern times that are indulged in game consoles, playing with toys with various shapes. In addition, the games have not been relatively enough since the Joseon Dynasty. It is believed that the situation is caused by the reflec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times in which children were supposed to learn to the experiences and behaviors of ad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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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공반품으로 본 조선시대 도기의 문양과 기형변천

        김태홍(Taehong Kim) 한국상고사학회 2016 한국상고사학보 Vol.92 No.-

        조선시대 도기는 토기, 자기, 기와 등이 고고학 또는 미술사학에서 중요한 연구자료로 이용된 것에 비해 명확한 개념이나 편년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지역적으로 한정되거나 문헌을 분석하여 옹기의 개념과 지역적 특징을 밝히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논문에서 언급하지 못하였던 편년자료로서의 자기분석을 바탕으로 도기가마의 운 영시기를 설정한 후 도기가마의 출토품을 분석하였다. 그 다음 자기가 출토되지 않은 도기가마의 도기와 기 종, 기형, 장식기법 등을 상호 비교하여 조선시대의 도기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도기의 편년을 설정한 결과, 조선시대 도기가마에서 출토된 도기는 형태와 문양에 따라 크게 4개의 단계로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Ⅰ기(15세기)는 격자문, 장군, 장신호 등 고려시대 도기의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시기이며, Ⅱ기(16세기)는 15세기 전반의 고려시대 도기전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도기 형식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Ⅲ기(17세기∼18세기 전반)는 기형과 장식기법 등이 단순화•간결화 되는 시기이며, 마지막으로 Ⅳ기(18세기 후반∼20세기 전반)는 옹기 또는 오지그릇으로 불리는 독특한 조선시대의 도기가 정립되어 현재의 옹기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이처럼 이 논문은 조선시대 도기의 이해를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편년으로 편년이 설정 되지 않은 도기가마의 운영시기를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Although potteries, porcelains and roof tiles have served as important research materials in archaeology and art history, no clear concepts or chronological seriation of Joseon dynasty’s earthenwares have yet to be suggested. Previous studies have been confined to certain localities or have focused on defining concepts and identifying regional characteristics of pottery by literature research. In this study, the excavated artifacts from earthenware kilns are dated and are analyzed based on the unprecedented porcelain analyses which established a chronological sequence. Then, the characteristics of earthenware of Joseon Dynasty are analyzed by making a comparison with potteries from the earthenware kilns without porcelains accompanied in terms of typology, its formation process, decoration technique and others. Potteries excavated from earthenware kilns of Joseon dynasty can be classified into four phases in a chronological sequence according to their morphological and decorative motif changes. The first phase (15th Century AD) is the period when Goryeo dynasty’s tradition including elements such as the lattice pattern, the barrel shaped earthenware bottle, the tall earthenware bottle and other earthenware had continued. The second phase (16th Century AD) is the period when the earthenware traditions from Goryeo dynasty existed in the early 15th Century AD had disappeared. The third phase is characterized by the trend of being simpler and less decorative in shape and decorative patterns. Lastly, in the fourth period (17th Cen-tury to early 18th Century AD), the unique earthenware type of Joseon dynasty, called as ‘Onggi ’ or ‘Oji Geureut ’ was established, and its production has continued to create today’s Onggis. Implications of this research would be to broaden our understanding on earthenwares of Joseon dynasty and to provide a chronological sequence to date the earthenware kilns and to assume their operation period by cross-da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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