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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시대 사상적 갈등과 문화의 추이

        유봉학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5 泰東古典硏究 Vol.21 No.-

        정조시대(正祖時代 1776년~1800년)는 격동의 시대였다. 조선의 전통적 질서가 동요하고 주자학이 지도이념으로서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외래 사상과 문화의 영향으로 전통 사장과 문화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시대 격동의 진원지는 서울사회, 그 중에서도 정조 조정이었다. 대도회지 서울과 인근 경기지역을 생활 근거지로 하였던 경화사족(京華士族) 지식인들은 조선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고,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정치론과 사상적 기준이 정조(正祖 1752~1800)에 의해 수용됨으로써 변화와 혁신이 가속화하였다. 정조는 경화사족 일각 청론사류(淸論士類)의 주장을 수용하여 사림정치론(士林政治論)과 의리탕평론(義理蕩平論)을 내세워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런 가운데 정조의 후원을 받았던 일부 지식인들은 북벌론(北伐論) 대신 북학론(北學論)을 제기하면서 북학(北學)을 선도하였고, 일각에서는 서학(西學)을 넘어 서교(西敎, 천주교)까지도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사상적 변화를 이끌게 된다. 이에 따라 정조시대 정계와 학계에는 변화와 혁신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정조가 학풍(學風)과 문체(文體), 악풍(樂風)과 서체(書體)를 바로잡고자 고심 끝에 제기한 '반정론(反正論)'이나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론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 대안이었다. 화성(華城)신도시를 위시하여 정조시대 문화 예술의 빛나는 성과물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창출되게 된다. 이들 문화 유산의 내면에는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당대인들의 다양한 지향성과 모색의 흔적은 물론 새 시대를 향한 역사 발전의 과정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조시대 정치와 문화예술의 추이, 그리고 그 이면의 사상적 갈등과 극복의 노력은 200년 후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바 크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갈등을 지양하는 방안과 신(新) 구(舊) 사상, 그리고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융합하여 사회 발전을 이루는 일은 정조시대 이래 지금까지 여전히 우리의 현안(懸案)이기 때문이다. 正祖時代(1776~1800)是激功的時代了。 因爲朝鮮的傳統秩序動搖, 朱子學以指導理念露出問題, 發生了政治上的變化, 傳統思想和文化受到外來思想和文化的影響急劇變化了。 正祖時代的激功開始在韓城, 特別是正祖的朝廷。 住在大城市韓城和京畿地域的京華士族知識分 子成爲朝鮮社會的新領導班子。他們提出的嶄新的政治理論和思想准則被正祖(1752~1800)采用了, 加速了變化和革新。 正祖采用京華士族之中淸論士類的意見, 主張士林政治論和義理蕩平論進行政治改革了。 在這樣的情況下, 有些受到正祖的后援的知識分子提出了北學論先導北學了。 有些人不但接受西學, 還是接受西學(天主敎)。 他們帶動了朝鮮思想上的變化。 因此, 正祖時代政治界和學術界上由于變化和革新發生了嚴重的矛盾。 正祖爲了糾正學風, 文體, 樂風, 書體考慮了很長時間, 然后才提出了'反正論'或燕岩朴趾源主張的'法古創新'論。 這就是解決這些問題的包括性的對策。 這樣, 首創了華城新城市和偉大的正祖時代文化藝術上的成果。 從文化遺産里面, 我們能看得出來人們爲了克服矛盾的志向, 摸索的痕迹和歷史發展的過程。 所以正祖時代政治和文化藝術趨向, 其里面內在的思想矛盾和克服提示200年以后的我們很多事情。 因爲從正祖時代以來到現在止揚政治勢力之間的矛盾的方案和融合新舊思想, 融合傳統文化和外來文化使社會發展的事情仍是我們的懸案。

      • KCI등재후보

        漢高祖에 대한 正祖의 인식 고찰 -사마천의 『史記』를 중심으로-

        이시연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2023 인문학술 Vol.11 No.-

        정조는 『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중 한고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본고는 한고조와 관련하여 정조의 역사 인식을 도출하기 위해연구를 진행하였다. 정조의 한고조 인식은 사마천이나 조선유학자들의 인식 양상과는 두드러지는 차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마천과 조선유학자들의 한고조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먼저 사마천의 경우에는 한고조의 인간됨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다만 사마천은 한고조가 통일왕조인 한나라를 건국하였다는 점에 대해 큰 의의를 두었다. 사마천에게 한나라는 하은주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였기에 한을 세운 고조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없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시기에 관계없이 『사기』가 널리 두루 읽혔다. 그러나 18세기 이전만 해도 한고조의 주변 인물에 대한 작품이 두드러졌으며, 18세기 성호 이익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한고조에 대한 관심 역시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정조시기인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위백규, 성대중, 윤기, 서형수 등 다양한 인물들이 한고조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전반적으로 한고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무조건 한고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고, 한고조가 겪은일화를 중심으로 고조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보다 객관적 시각을유지하려는 시선이 두드러졌다. 한고조의 잘못이나 한계를 꼬집는 내용도나타났다. 반면 정조의 경우 한고조를 현명하고 어진 인품의 소유자라 상정하고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세운 한나라와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운 장량, 한신, 소하 등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는 한고조에 자신을 투영하여 수원 화성에서 자신의 위업을 한고조에 비유하여 노래하기도 하였고, 한고조가 신하와 형성한 관계를 참고하여 자신의 통치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한고조에 대한정조의 시선은 그의 역사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조는 사마천과 같이한고조가 통일왕조 한나라를 세웠다는데 큰 의의를 두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고조의 신하 장량, 소하, 한신 등을 모두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한 후 미앙궁에서 대풍가를 부른 한고조처럼 화성을 축조한 후 자신 또한 조선의 중흥을 이루었음을 시를 읊으며 드러내었다. 또한미앙궁 건설이 소하가 아닌 한고조의 설계였다는 해석에 동의함으로써 화성 축조 역시 신하들의 의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조 자신의 계획이었음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정조는 한고조의 지혜와 용인술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행보를 한고조의 그것에 투영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고조의 업적이라 여겨지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도사실은 한고조의 의도나 전략에 의한 결과였다는 해석을 보임으로써 한고조를 더 현명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를 닮은 자신 역시 행위 저변에 깊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음을 선전하는 효과를 낳게 하였다. 본고에서 고찰한 바에 따르면 정조는 한고조와 같이 모범되는 인물을전범으로 삼아 통치술에 적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취하였다. 정조는 한고조를 높이고 자신을 그와 닮은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함께 높이는 전략을 취했다. 이러한 정조의 역사 인식은 그의 경세술에도 ... “Jeongjo(正祖) took a special interest in Hàn Gāozǔ(漢高祖) among the various figures depicted in 『historical record(史記)』. Consequently, this study was conducted to derive Jeongjo(正祖)’s historical perception concerning Hàn Gāozǔ(漢高祖). Jeongjo(正祖)’s perception of Hàn Gāozǔ(漢高祖) had distinct differences from the perspectives of Sīmǎ Qiān(司馬遷)or Confucian scholars of the Joseon era. In this paper, while confirming this, the perceptions of Hàn Gāozǔ(漢高祖) by Sīmǎ Qiān(司馬遷) and the Confucian scholars were examined. Initially, Sīm ǎ Qiān(司馬遷)attempted a relatively objective description of Hàn Gāozǔ(漢高祖)’s humanity. However, Sīmǎ Qiān(司 馬遷)placed significant importance on Hàn Gāozǔ(漢高祖) founding the unified dynasty of Hana. To Sama Chun, Hana represented a nation inheriting the spirit of benevolence, thus attributing special significance to Gāozǔ, who established Han. Conversely, in Joseon, regardless of the era, 『historical record(史記)』 was widely read. However, before the 18th century, works concerning Hàn Gāozǔ(漢高祖)’s contemporaries were prominent, and it wasn’t until the late 18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正祖), that a genuine interest in Hàn Gāozǔ(漢高 祖) began to rise. Particularly, various individuals, such as Wi Baek-gyu, Seong Dae-jung, Yun Gi, and Seo Hyeong-su, created works centered around Hàn Gāozǔ(漢高祖) and generally evaluated him positively. Yet, their evaluations weren’t unconditional; they critically assessed Gāozǔ’s actions based on the incidents he faced, aiming to maintain a more objective perspective. Instances highlighting Gāozǔ’s mistakes or limitations also surfaced. On the contrary, Jeongjo(正祖) regarded Hàn Gāozǔ(漢高祖) as a wise and virtuous individual, evaluating him quite positively. Moreover, he highly praised the Hana dynasty Gāozǔ established and esteemed Jang Ryang, Han Shin, and So Ha, who helped build the nation. Jeongjo(正祖) even projected himself onto Hàn Gāozǔ(漢高 祖), likening his own accomplishments at Suwon Hwaseong to those of Hàn Gāozǔ(漢高祖), singing songs to that effect. He sought to apply the relationships Hàn Gāozǔ(漢高祖) formed with his courtiers to his own governance. Jeongjo(正祖)’s perspective on Hàn Gāozǔ(漢高 祖) wasn’t detached from his historical perception. Like Sama Chun, Jeongjo(正祖) placed immense significance on Hàn Gāozǔ(漢高祖) founding the unified Hana dynasty. Additionally, he didn’t stop there; he elevated all of Gāozǔ’s subjects, such as Jang Ryang, So Ha, and Han Shin. After unifying the nation, Jeongjo(正祖) revealed his aspirations by likening himself to Hàn Gāozǔ(漢高祖), who sang the grand song at Mianung Palace, indicating his role in revitalizing Joseon. Furthermore, by concurring that the construction of Hwaseong was Hàn Gāozǔ(漢高 祖)’s design, Jeongjo(正祖) revealed that the fortress construction wasn’t solely due to his ministers’ opinions but was his own plan. In this manner, Jeongjo(正祖) elevated Hàn Gāozǔ(漢高祖)’s wisdom and strategies, projecting his own actions onto Gāozǔ’s, thus elevating his own status. Furthermore, by interpreting actions generally not considered part of Gāozǔ’s achievements as intentional results of Hàn Gāozǔ(漢高祖)’s strategy, Jeongjo(正祖) depicted him as a more astute figure, showcasing that he, resembling Gāozǔ, also harbored deep intentions behind his actions. According to the findings in this study, Jeongjo(正祖) didn’t merely apply exemplary figures like Hàn Gāozǔ(漢高祖) to his governance but took a more proactive interpretation. Jeongjo(正祖) raised Hàn Gāozǔ(漢高祖)’s stature and portrayed himself as a similar figure, thereby elevating his own worth. This historical perception of Jeongjo(正祖) was also...

      • KCI등재

        정조의 경학 연구 방법에 관한 규견

        심경호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5 泰東古典硏究 Vol.21 No.-

        정조(이름 : 李算, 1752~1800)는 학자이기를 지향한 군주로서, '우문일념(右文一念)'으로 문치(文治)에 주력하여 여러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핵심기관으로 삼았다. 이미 즉위년의 교서(敎書)에서 정조는 국가의 급무로 숭유중도(崇儒重道)를 내세웠고, 그 내함은 '위정벽사(衛正闢邪)'라고 강조하였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주자학 옹호를 위해 이단을 변정하는 작업을 뜻하였다. 조선후기의 한학은 독자적인 문헌학을 확립하여, 전근대 동아시아의 보편적 가치 준거였던경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리지학(義理之學)을 확립하고자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특히 정조 연간에는 중국에서 발전도상에 있던 고거지학(考據之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정조의 경학연구는 내부전통과 외부영향의 두 요소를 결합하여 매우 독특한 방법론을 형성하였다. 조선후기 경학이 채용한 문헌학적 방법론에 대한 메타-크리틱을 하기 위해서는 정조 및 조선 조정의 경학연구방법론에 대한 일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본고는 그러한 검토의 일환으로 정조가 편찬한 경서 관련 서적과 규장각 경서강의를 중심으로 경학연구방법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The study of Jingshu (經書) in Cho-sun dynasty showed a characteristic development which was the reflection of paradigm and epistemology at that time. Especially, the books of Jingshu editied by Jung-Jo(正祖), and the lectures of Jingshu at Kyujang-Gak, led by Jung-Jo(正祖) and Choge-Munsin(招啓文臣), had a significance, in that it synthesized traditional opinions and motivated a new approach on Jingshu. The scholars who were participated in the lectures also represented and developed their own epistemology in the fields of commentaries. Futhermore, the lectures had another respect. Jung-Jo took measures to strengthen the right of his throne ; therefore the lecture of Jingshu was one of that policies, in that it could control the field of studies. In the late Cho-sun dynasty, the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 which was influenced by revision on commentaries of Yuan·Ming·Ching was developed. Otherwise, interpretation of implicit meaning and the relation with the real world, which is so called 'studies of Yili(義理之學)', was advanced. Lectures of Jingshu which was published by Kyujang-Gak was born in these context. Jung-Jo gave lectures and asked questions like distinction between Xinchu(新注)' and Jiuchu(舊注)', and etc., He made an emphasis on opinion of Ju-Hi(朱熹) and criticised on that of recent scholar just like Maoqiling(毛奇齡). The Books of Jingshu interpretation and Books Lectures of Jingshu published by Jung-Jo(正祖) did not issue the completely new interpretation which could substitute that for Xinchu ; however it was based on the large examinations of various opinions, and it also prepared a new academical tendency of methodology.

      • KCI등재

        正祖의 萬川明月主人翁 천명에 대한 의미 再考

        이시연 근역한문학회 2023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66 No.-

        본 연구는 정조(正祖)의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자호 및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이하 「자서(自序)」)와 관련한 기존 논점을 극복하고 정조의 군주관을 새롭게 정립하여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을 천명한 진의를 규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정조는 재임기간(1776-1800)동안 스스로 군사(君師)를 자처해 신하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켜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에서 대종(大宗)을 이루었으며 정치·경제·사회·학술·군사 등 전 분야에 걸쳐 탁월한 능력으로 18세기를 이끌어 도미적 성관(掉尾的 盛觀)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798년(정조 연간 22년), 그는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천명하며 자신을 태극인 리(理)에 상정하였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정조의 행위 저변에 깔린 의식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한 상징어로, 「자서」에는 정조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자처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정조의 정치와 사상을 규명하고자 한 상당수 연구자는 그의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자호(自號) 및 「자서」에 주목하여 중요한 연구 주제로 활용하였다. 본 연구는 正祖의 자호와 「자서」에 대한 기존 논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정조의 군주관을 재정립하고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을 천명한 진의를 규명하였다. 정조의 만천명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에 만천명월의 비유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하늘의 달과 물에 비친 달’을 소재로 한 주희와 조선 유학자들의 언급을 살펴 만천명월의 주자학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3장에서는 정조가 만천명월이라는 비유를 활용하여 그의 의중을 드러낸 3가지 사례를 살펴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 천명이 가지는 의미를 재정립하였다. 살펴본 바에 따르면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천명은 군주로서의 초월적 위상을 강조하거나 성리학적 질서를 재해석하고 기존 이념에서 벗어난 논리를 창신한 측면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도통 계승의 천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한 듯하다. 정조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희에게도 만천명월의 도를 자임한 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주희가 쓴 「기호적계」에서 나타나는 이일분수의 개념을 통해 주희가 맹자 이후 끊어진 천고의 심법을 터득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를 성인의 반열로 추존하면서 만천의 명월이라는 이미지를 투영하였다. 이는 이미 「자서」를 통해 만천명월이 자신이라 자임한 정조가 주희에게도 동일한 이미지를 씌우며, 주희의 도통이 정조 자신에게 전승되었음을 명료히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도통의 전수는 단순한 학문의 계승이 아니라 이일분수를 터득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의 계보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와 「아송서(雅誦序)」를 통하여 스스로가 주희와 더불어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천명한다. 정조에 있어 자신이 성인의 반열에 올랐음을 자임하는 것은, 유가의 전통에서 치통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였다. 이를 증명하듯 「자서」에서 정조가 모범 삼은 인물의 예를 살펴보면 순임금과 우임금 및 문왕의 경우 그들의 치적은 군주가 되기 전의 업적에 있었고, 공자의 경우 천자나 제후의 지위에 오른 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 KCI등재

        정조(正祖)의 한유문(韓愈文) 수용(受容) 양상(樣相)

        오수형 한국중국어문학회 2012 中國文學 Vol.70 No.-

        朝鮮朝正祖(1752~1800, 1776~1800在位)是非常好學的帝王, 也是爲學術振興作出顯著貢獻的偉大學者. 他在力求學問的集大性的同時, 又展開以唐宋古文爲正統的文體改革, 不但親自從事於編定《唐宋八子百選》, 而且抄錄唐宋八大家文章中的核心部分編成《八家手圈》, 爲學習文章,改革文體提供了典範. 當然正祖從八大家文章中所接受的核心和輕重都有不同之處, 但不可否認韓愈文就在其中心, 而其影響絶不容忽視. 本稿主要探討正祖所積極接受的是韓愈文的那些方面, 其意義何在? 最爲明顯的有如下幾點: 1. 正祖非常重視韓愈的書牘和贈序, 把?們大量收錄在《唐宋八子百選》和《八家手圈》裏面了. 由此可見他非常重視文章的個人間的疏通功能, 力圖從韓愈文吸取其優點. 他又格外關注韓愈碑誌活躍的多樣性和其四言修辭. 這也告訴他所重視的實用價値所在, 卽不可忽視其應酬性的碑誌所需的活用手法. 2. `義理`同`文章`是正祖選文的兩大標準. 在義理方面, 他在强調君主的絶對權威的同時, 也?關注君臣關係的重要性. ?外, 他對韓愈反佛的幾個觀點積極表示贊同. 這些都反映出他作爲最高統治者把文章的重要功效放在治理上的方便. 3. 在創作論方面, 正祖肯定韓愈强調仁義涵養爲作家首要工夫的看法, 也積極接受韓愈`氣盛言宜`說, 以及重視獨創性的`陳言務去`論. 這些理論加强和豊富了復古的文學論, 也對他批判秦漢派起了一定的作用. 4. 正祖强調敍事的神韻, 這無疑是源於蘇軾的神似論而被正祖加以擴大的. 但他却在韓愈文當中採取其實體, 提供了文人學習的標準. 這告訴正祖對韓愈文的獨特評價與收容. 總之, 正祖沒有從事於專業性文章寫作, 但在他眼裡韓愈文是實用的寶庫, 他從那裏不僅發見而採納了一些治理要點和疏通的方便, 又加强了文體改革的理論根據, 幷提供了各種實際有用的學習典範. 這都是正祖對文章的實用本色獨到的把握和發揚所使然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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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경세론과 효제(孝悌)윤리

        김성윤 ( Seong Yun Kim ) 한국실학학회 2012 한국실학연구 Vol.0 No.23

        이 논문은 정조 경세론의 주요 측면들을 통하여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 과정에서 정조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본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제기한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조는 이기론에서 주희나 이황과는 달리 理를 氣의 내재법칙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리가 갖는 先在性·초월성·규범성을 외면했다. 정조의 이러한 주기적 이기관은 그의 근본적 시각이 경험적 현실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실학자들이 주장해 온 ``道器一體論``을 계승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둘째, 정조는 인성론에서 ``性卽理``라는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부정하고, ``性卽氣``를 주장했다. 아울러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서 性=四端이라는 도식을 부정하고, 사단을 元亨利貞의 四德으로 고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性四德說을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선험적인 원리나 윤리보다는 경험적 현실과 욕구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사회원리와 윤리를 모색하려 했다는 점을 대변한다. 정조의 이기론과 인성론은 주자학의 정설에서 크게 이탈해 있었다. 셋째, 그는 도교, 불교, 양명학, 서학 등 제반 이단적 학문에 대해서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개방성은 학문적 권위가 권력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차단하고, 진정한 학문적·정치적 실익을 추구한 데에 자연히 뒤따르는 현상이었다. 넷째, 정조는 군주가 수신을 바탕으로 명분질서의 모범을 보이고 실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수신군주론이나 군주성학론의 도그마에서 탈피했다. 이에 따라 그의 통치 방식도 풍속을 돈독히 하는 禮敎的 방식에 치중하지 않고 제도 개혁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접근방식을 보였다. 다섯째, 정조는 영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준거를 三代之治 혹은 堯舜之治에 두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요순은 은둔적이고 수련적인 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권력적인 정치가였다. 이처럼 그는 ``무위에서 유위로`` 정치 개념과 군주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했으며, 君師로 자처하면서 의리 판별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음을 주장한 영조의 정책을 계승했다. 그의 지지자에 의해 국왕이 사문의 도통을 계승했다는 ``君主道統論``이 제기되는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太極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天 혹은 上帝라는 절대군주론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여섯째, 정조의 군주론은 중개세력의 매개 없이 군과 민이 직접 소통하는 2단계 정치구조를 지향했다. 그는 이러한 절대왕정을 지탱할 통일된 사회윤리로서 孝悌를 제시하고, 太學序齒를 통해서 이를 시험적으로 실행했다. 태학서치는 군주 이외에 모든 臣民을 하나로 보고, 신민 사이에서는 신분이나 직업이 아닌 나이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계서윤리를 선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왕정이 결코 이론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곱째, 정조가 추구한 절대왕정은 국가를 家의 類比 내지 확장으로 보는 유교의 家族國家와 외연상 별 차이가 없어 보이나,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도덕보다는 백성의 행복 증진에 두고 국가사회의 결속원리를 인간에 내재한 도덕심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적 개별적 연계 속에서 모색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유교적 왕정론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차후 근대국가론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여덟째, 실학사상의 한말 민중운동으로의 전유와 관련하여 정조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그의 주역 연구와 文王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한말 민중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후천개벽설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The main points of this thesis can be centered on several points as follows. First, Jeongjo emphasized that I(理) is the inherence rule of Gi(氣). These Jugijeok Igi-gwan(Gi-centred Philosophy of I and Gi) shows that his fundamental viewpoints focus on an empirical actuality. Second, In theory of human nature, Jeongjo contradicted seong-jeung-ni(性卽理. nature is based on i which is innate in all creatures) and advocated seong-jeung-gi(性卽氣. nature is based on gi). And he advocated that human nature is saduk(四德. the four virtues), not sadan(四端. the four beginnings). Third, Jeongjo had opened up towards the unorthodox. His academic openness was the phenomenon following his utilitarianism. Fourth, Jeongjo`s ruling methods had attached importance to effectiveness of system, not convert. Fifth, He had made the way of the sage King Yao and Shun(堯舜之治) as his political authority. He emphasized that he himself is taegeuk(太極. Great Ultimate). This meens he had announced the absolute monarchy. Sixth, He presented Hyoje(孝悌. filial piety and friendship) as the moral foundation for his absolute monarchy, and practiced it with Taehakseochi(太學序齒). Seventh, There is a possibility that Jeongjo had a influence on the theory of hucheongaebyeok(後天開闢. Great Transformation for the world after the creation of heaven). This related with the Silhak(實學)`s transformation to the popular movement at the close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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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대 전경무신(專經武臣) 제도의 운영 연구

        이연진 온지학회 2023 溫知論叢 Vol.- No.74

        This study examined the operation of “Jeongyung-Mooshin(專經武臣)” policy during Jeong-jo (正祖)'s regime. It trie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of this policy. Jeong-jo tried to actively operate the policy in the direction of increasing the effectiveness based on the Yeong-jo (英祖)’s regulati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operation are as follows. It was conducted periodically four times a year, which was for enhancing education regarding the Seven Military Classics(武經七書) for military officials. The procedures were also done in accordance with the way Yeong-jo has done and were listed in the Code of Law, Daejeontongpyeon(大典通編), 1785, the ninth year of Jeong-jo’s reign. Jeong-jo actively managed Jeon’gang (殿講) performed directly by the king, all the time. He strictly managed the test results for ensuring that the policy was operated effectively. Those who failed the test were retested in order to check the level of learning. Punishment was imposed according to the grades. Meanwhile, promotion benefits were given if the performers were outstanding. The expansion of the king's discretion was to increase the effectiveness of the system operation. It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in-service education for the military officials during Jeong-jo's regime. 본 연구는 정조 대 무신재교육 양상을 살펴보는 일환으로 정조 대 전경무신(專經武臣) 제도의 운영상 특징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정조 대 전경무신 제도의 운영 특징은 기본적으로 영조 대에 마련된 관련 절목의 시행방침을 준수하면서 정조 나름의 재량이 발휘된 점이다. 예컨대 매년 분기별 4차례 주기적으로 전경무신을 시험한 기본원칙은 준수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직접 시험을 주관하는 친림전강의 방식으로 주기적인 시행 원칙을 고수하였다. 특정한 사유가 있어 시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다음 차례에 이전에 실시하지 못한 전강까지 별도로 시행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영조 대 전경무신 관련 절목의 주요 원칙은 정조 대 『대전통편』의 전경전강 조항으로 법규화되었다. 한편 정조의 재량권이 가장 두드러진 사안은 전경무신들의 성적 처리방식이었다. 정조는 전경무신의 성적에 따라 포상과 처벌방식을 직접 관리하였다. 직접 무신들의 무경 능력을 평가하여 우수한 무신들을 발탁하는 한편 무신 전반의 무경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처벌을 엄격히 하였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무신을 처리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해당 무경내용을 능숙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입직시키는 것이었다. 영조 대는 불통자를 대개 의금부에서 관리하여 금추(禁推)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정조는 병조의 책임 하에 해당자를 소속관아에 숙직시키고 재시험을 시행하여 그 학습 정도를 확인토록 했다. 재시험 성적 정도에 따라 수속(收贖) 등의 실질적인 처벌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성적우등자가 특출할 경우 참하관은 참상관으로 승륙(陞六)하는 등의 인사상 혜택이 바로 주어졌다. 이러한 정조의 재량권 확대는 제도 운영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향을 모색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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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正祖)의 인재관(人材觀) 연구(硏究) -「책문(策問)」을 중심으로-

        김현옥 ( Hyun Ok Kim ) 근역한문학회 2009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28 No.-

        本稿에서는 요순의 태평성대를 자신의 治世에 재현시키고자 했던 군주인 정조의 人材觀을 그의 개인 문집인 『弘齋全書』에 수록되어 있는 「策問」을 통해 살펴보았다. 책문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국가의 문제를 소통시킬 수 있도록 과거를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인재들에게 해결책을 구하는 수단이었다. 책문은 당대의 碩學들이 출제하기도 하지만 출제자는 임금이라는 형식을 띤다. 따라서 책문 속에는 그 출제의 주체인 임금의 시대를 보는 관점이 가장 잘 녹아 있다. 그러므로, 論者는 조선 후기 강력한 신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회복함으로써 조선의 약진을 시도했던 정조의 人材觀을 바로 이러한 「策問」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정조의 인재관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股肱之臣의 人材觀이고, 둘째는 立賢無方의 人事論이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정조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하였으니, 奎章閣 設置와 抄啓文臣 制度가 첫째이고, 다음으로는 庶孼許通의 實施이고, 끝으로 蕩蕩平平의 展開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규장각신과 검서관을 발탁하였는데, 이들은 과거 급제가 부정으로 이루어지고 인사권이 당파와 문벌에 좌우되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완전히 실력만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 속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또한 抄啓文臣 制度는 관리들의 재교육 제도로서 형식적인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관리들의 업무능력을 신장시키고 부정부패를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실행되었다. 이는 한 번 관리가 되면 안일한 자세로 노력하지 않는 관리들에게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할 것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庶孼許通의 實施이다. 정조는 열성조가 현인을 등용함에는 정해진 틀이 없었으나 근래에는 서얼이나 천인은 등용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인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이유로, 또는 천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인재를 잃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서얼을 검서관에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인사정책을 펼쳤다. 끝으로 蕩蕩平平의 展開이다. 정조는 기존 집권 붕당을 완전 제거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주도권만 제거함으로써 점차 각 붕당의 공존을 가능케 하면서 한편으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다시 남인으로 주도권을 순환시켜 어느 붕당의 專制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붕당의 집단성을 서서히 희석시켜 나갔다. 이렇듯 정조는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붕당간의 갈등을 붕당간의 세력균형과 상호견제를 통해 극복해 나갔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모든 관료들이 정치의 公的 책임성을 자각하여 붕당의 私的 동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서로 진정한 화합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상에서 정조의 人材觀을 그의 策問을 통해 살펴보았다. 책문 속에는 이처럼 정조가 人材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에 따라 그가 실천하고 추진하였던 여러 정책들이 어떠한 생각과 의지로 시행되게 되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를 통해 策問은 정치의 주체인 임금의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최상의 근거자료가 됨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view of talented people of King Jeongjo who attempted the realization of the peaceful time under the rule of King Yao and Shun in China during his reign based on 「Chaekmuns」(策問: examination question) in his personal literary collection 『Hongjeseonseo (弘齋全書)』. Chaekmun was a tool to communicate national problems and to get solutions for the problems from young talented people who were about to take their first step out to the world through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Chaekmun was sometimes made by great scholars but officially it was supposed to be made by the king. Accordingly, Chaekmun reflected best the viewpoint of the king who prepared the question. Therefore, through Chaekmun, this study analyzed the view of talented people of King Jeongjo who attempted the leap of Chosun by suppressing the strong vassal power and restoring royal power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King Jeongjo`s view of talented people can be divided largely into two. One is Gogoeingjisin(股肱之臣: a subject as valuable as the forearm or the thigh) and the other is Iphyeonmubang(立賢無方: appointment of talented people regardless of intimacy and social status). Based on these viewpoints, King Jeongjo executed various policies including the installation of Gyujanggak(奎章閣) and the system of Chogyemunsin(抄啓文臣: civil vassals under education and research programs at Gyujanggak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the acceptance of Seoeolheotong(庶孼許通: demand for the appointment of children by a concubine to government positions), and the employment of Tangtangpyeongpyeong(蕩蕩平平: impartiality in arguments or disputes). King Jeongjo installed Gyujanggak and picked out officials such as Gyujanggaksin(奎章閣臣) and Geomseogwan(檢書官). In those days whe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was corrupted and its results were influenced by political factions and influential families, these officials were selected purely based on their abilities and displayed their capabilities to the full under King Jeongjo`s full support and patronage. In addition, the Chogyemunsin system was a reeducation system for officials, which was introduced in order to enhance the competence of government officials appointed through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to prevent injustices and corruptions. It was to encourage the officials to keep learning rather than being indolent after appointment. Next, Seoeolheotong was admitted. King Jeongjo criticized that the preceding kings had appointed wise people without any fixed frame, but in his days children by a concubine or from a low family were not appointed. He deplored that although the country was small and the number of talented people was limited, many talented people were lost only because they were children by a concubine or low-class people, and executed active personnel policies by appointing children by a concubine to be Geomseogwan. Lastly, Tangtangpyeongpyeong was employed. King Jeongjo did not remove the existing faction in power but deprived them of their political hegemony. As a result, different factions could coexist and the hegemony was transferred from Noron(老論) to Soron(少論) and again to Namin(南人). In this way, autocracy was not allowed to any faction and factionalism was diluted gradually. Like this, King Jeongjo overcame conflicts among the factions, which disrupted political stability, through power balance and mutual containment among the factions. Of course, his ultimate goal was to make all government officials become aware of their political and public responsibilities, overcome the personal motives of their faction, and reach genuine harmony with one another. As presented above, this study examined King Jeongjo`s view of talented people through his Chaekmun. Chaekmun shows how King Jeongjo viewed talented people and with what ideas and intentions the king practiced and promoted various policies. Through this study, it was found that Chaekmun is the best ground for understanding the views of kings who were the political rulers in their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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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正祖) 스토리텔링의 구조와 의미 - 소설 『영원한 제국』을 중심으로 -

        최민성 열상고전연구회 2016 열상고전연구 Vol.49 No.-

        이 글은 정조 스토리텔링의 구조와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었던 초기 작품인 영원한 제국 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작품에서 주목한 부분은 철저히 영남 남인(南人)의 시각을 채택해서 정조의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단순히 작가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조 스토리텔링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조 이야기의 출발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서부터 촉발된다. 영조 대에는 사도의 죽음이 영조와 세자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도에 관한 기록을 제거하면서 이 사건이 당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해석의 다양성, 당파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이 정조에 의해 기록된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이 공식적인 사도에 대한 평으로 확정된다. 그 이후로 정조는 조금씩 사도 추숭의 강도를 높이며 그것으로 당파들의 의리를 조정하는 정치 전략을 썼다. 이 과정에서 특히 당시 소외받던 당파들이 집권 노론을 견제하면서 사도세자를 높이는 새로운 의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계 복귀를 꿈꾸던 남인 계열에서 당론서를 저술하면서 강력하게 전개됐다. 이 당론서들은 이후 사도세자와 관련된 노론음모론, 정조독살설 등이 확산되는 단서가 된다. 영남 남인의 직계 후손인 작가는 집안의 당론을 뼈대와 정신으로 영원한 제국 을 창작한다. 소설 영원한 제국 은 20세기 말에 세련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채색된 새로운 당론서이자 가장 성공적인 당론서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 영원한 제국 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인의 정신을 대중이 호응하는 방식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추리 소설의 모티프를 따서 남인 당론서의 의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금등’을 둘러싼 퍼즐을 맞춰가는 추리 스토리의 구조를 당의(糖衣)로 활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남인의 의리에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또 영원한 제국 에서 주인공을 정조가 아닌 규장각 각신 이인몽으로 잡아 이야기 속에 쉽게 감정이입하게 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독자들은 이인몽의 세계관에도 자연스럽게 동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골남(骨南)으로서 가지는 세계관, 입장에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토리텔링의 층위에서는 정조를 비극적 영웅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연히 정조를 흠모하게 하고 그를 숭상하던 남인의 정조에 다가가게 만들었다. 또 정조의 적대세력으로 노론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적으로서의 능력을 과장함으로써 대중적 이분법을 설정함과 동시에 노론을 절대악으로, 남인을 절대선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결국, 추리기법을 활용하고, 골남인 이인몽에게 감정이입하게 하고, 정조의 능력을 극대화하며 동시에 적대자인 노론의 사악함도 과장하는 스토리텔링의 방법들을 통해 영원한 제국 은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그 바탕이 되는 남인의 세계관을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비주류에 불과하던 남인의 정조 해석이 주류가 되는 대역전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This article took to the study of the most influential early work of Eternal empire to deal with the essence of the story-telling mood. Works that point by adopting the vision of Namin(南人) a fully deployed the story of JeongJo. It's not just about staying in representing the world of writers, JeongJo has confirmed that dominates both the structure and meaning storytelling. Eventually can say that the novel Eternal Empire colored Dangron book. stylish new storytelling techniques in the late 20th century. The first secret to this novel could get a response to the public is due after the motif of the mystery had passed the loyalty of Namin Dangron book. It caught the protagonist of the novel Gyujangak gaksin Yi, InMong is a good choice for us to talk easily in empathy and deliver the pleasure to see live the 18th century shipbuilding. Do not easily grasp the intention of the JeongJo, the level of protagonist a hero to conspiracy Noron fits well with our eye-level living a normal life. One of the reasons Eternal Empire could succeed because that is also establishing a new phase of the Joseon king Jeongjo. Make the story more interesting character is also harmful should never be powerful, but equally powerful. In the novel Noron simplified and gives a powerful and wicked enemy forces than the actual Noron him. Since the late 20th century as a popular story of the Eternal Empire on the success essay, Namin, including minority union of this catch was captivated public, it suffered a sophisticated storytelling power of the Eternal Empire said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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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정조(貞操) 담론의 근대적 형성과 법제화 -1945년 이전 조일(朝日) 양국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봉석 ( Bong Seok Han )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人文科學 Vol.0 No.55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정조(貞操)’라는 말은 보통 전통으로 간주되지만 실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기호 체계이다. 역사적으로 고대 중국 이래 『열녀전』 등을 통해 형성된 정절 담론은 중국 명청 시대 이래 동아시아 사회로 확산되었다. 조선은 국가수립 후 성리학적국가의 운영의 상징으로 삼강을 선택했고, 정절은 그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식민지 시기에 이르러 정조 담론은 서구와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되었다. 먼저 메이지 시기 전후 일본에서 정조는 중국과 조선에서 사용되던 정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를 거치면서 수신교육과 성욕학, 그리고 일부일처제의 논리, 자유연애담론과의 결합 속에가정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제 정조담론은 처녀 대 ‘매소부(賣笑婦)’의 구도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은 물론 일부일처제 하 양처현모의 중요한 담론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종래 정절 담론의 관습이었던 재가금지와 내외 위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자유연애, 일부일처제, 성욕학, 수신교육등의 영향을 받아 정조 담론의 재구성을 보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조 담론은 일본으로부터 도입했던 정조담론과 정절의 내용들을 결합한 형태의 담론이 되었다. 한편으로 이렇게 형성된 정조담론은 민법과 형법의 보호법익의 대상이 되면서 추상적인 담론 수준을 벗어나 법리적으로 그 구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민법상 정조라는 것은권리이자 의무로 기능했고, 호주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둥으로 작동했다. 또한 형법상 정조는 간통, 강간, 간음의 중요한 죄와 함께 기능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그 보호법익으로서 여성이라는 주체의 인격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여성주체의 신체일부에 과도하게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담론적 법적으로 재구성된 정조담론은 해방이후 1953년 신형법의 ‘정조에 관한 죄’로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정조담론으로 그 역사성을 이어가게 되었다. Even though the term “chastity” that we use today is usually accepted as a tradition-bound word, it is a new sign system that has been reproduced from the historical and cultural perspective. Since the ancient times of China, the discourses of “chastity” had been established through various channels including the publication of Biographies of Exemplary Women (列女傳) and were later spread to East Asia in general after the Ming and Qing dynasty. Right after its foundation, the Joseon dynasty chose the three cardinal principles in human relations (三綱; or the three bonds) as the symbol of state management under the principle of Neo-Confucianism as state ideology. “Chastity” was a major element of the three cardinal principl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discourses of “chastity” were reorganized through the influence of the West and Japan. First of all, the term “chastity” was used in Japan during the Meiji Restoration (明治維新, Meiji Ishin) period in the same meaning as used in China and Joseon. In the 1910s, however, the term was confined to the space of “home” amidst a mixture of a variety of concepts such as cultivation of mind and body, the study of sexual desires, the idea of monogamy, and the discourses of free love. Thus, the discourses of “chastity” not only became the criterion of judgment in the “virgin vs. harlot” frame but also functioned as the major discourses of “good wife and wise mother” under the system of monogamy. Meanwhile, the colonized Joseon has to witness the reorganization of the “chastity” discourses because its time-honored discourses of “chastity” - prohibition of remarriage - was influenced by free love, monogamy, the study of sexual desires, cultivation of mind and body imported from Japan. In the 1930s, the discourses of “chastity” in the colonized Joseon developed into the discourses that combined the discourses of “chastity” and the ideas of fidelity imported from Japan. Meanwhile, the newly formed discourses of “chastity” became the object of the benefit and protection in both civil and criminal laws, thereby acquiring its concrete qualities free from the abstract discourses. In terms of civil law, “chastity” functioned as both the right and the duty of citizens and as a major pillar of maintaining the patriarchal family system. In terms of criminal law, losing one’s “chastity” functioned as a major crime along with extramarital relations, rape, and adultery. In the process, “chastity” was inclined to stick to the part of the female subject’s body rather than helping protect the personality of the female subject who could receive the benefit and protection of the law. Besides, such discourses of “chastity” that had been legalized in terms of discourses was concerned with a crime related to “chastity” in the new criminal law in 1953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It continued to retain its historicity as the discourses of “chastity” after Korea’s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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