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19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아편, 아편전쟁

        임영길 ( Yim¸ Young-gil ) 근역한문학회 2021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60 No.-

        아편은 본래 설사와 복통의 치료제로 알려졌으나 그 환각 작용과 중독성으로 인해 기호품으로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조선에서 아편이라는 물질은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병증을 치료하는 약재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 상품으로서의 아편은 유통된 적이 없었으며, 그에 대한 지식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조선의 연행 사절단이 아편으로 인해 내우외환을 겪는 중국의 상황을 접하게 되면서 아편의 유래, 아편 흡연도구와 방식, 아편의 효용과 중독에 따른 폐해, 아편전쟁의 경위와 내막 등에 관한 정보들을 입수하기 시작하였다. 1848년에는 역관 박희영이 아편 흡연 도구를 국내로 들여오다 적발되는가 하면, 이 일을 계기로 조정에서 아편연에 대한 금령을 내렸으나 결국 조선 내부에도 아편이 침투하여 심각한 위해 물질로 자리하게 된다. 아편(연)에 관한 기록은 19세기에 저술된 시화나 필기 등 일부 자료에 산재해 있는데, 특히 연행록에서 조선 사절단이 중국 현지에서 직접 견문한 아편 중독의 실태, 당보나 전언 등을 통해 입수한 영국과의 분쟁 상황, 아편 정책을 둘러싼 만주족과 한족 관원의 정치적 대립 등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포착하고 있어 주목된다. 李圭景의 鴉片煙辨證說 에는 1820년대부터 연행을 통해 수집된 아편 관련 정보들이 조선 사회에 공유된 정황이 드러나 있다. 또한 尹程의 『西行錄』(1844), 權時亨의 『石湍燕記』(1850)에 수록된 한족 지식인들과의 필담에는 아편의 해독성 및 조선에의 유입을 경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강한 군사력, 청 관료 사회의 부패, 은 유출로 인한 재정 고갈, 아편 금지책의 혼선 등의 내밀한 사정까지 생생하게 보고되어 있다. 아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이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전환된 배경에 연행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Opium was originally known as a remedy for diarrhea and abdominal pain, but its hallucinogenic and addictive properties have spread it around the world as an item of personal preference. Until the 19th century in Joseon, the substance called opium was only recognized as a medicine to treat diseases, and opium as a commodity had never been circulated and it is understood that they did not have any knowledge about it. However, after the 19th century, the Joseon delegation came into contact with the situation of China that suffers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s by opium, then they started to obtain information on the origin of opium, tools and methods of smoking opium, the effects of opium and the effects of addiction, and the history of the opium war. In 1848, station officer Park Hee-young was caught bringing in opium smoking tools and the court imposed a ban on opium smoking, however, eventually, opium penetrated into Joseon and became a serious hazardous substance. Records about opium are scattered in some materials such as poems and writings written in the 19th century.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because Yeonhaengnok actively captures the realities of the opium addiction, the conflict with the UK obtained through Tang-Bao(塘報) or messages, and the conflict and the political confrontation between Manchu and Han Chinese officials over opium policy which were experienced in China by Joseon delegation. In ApyeonyeonByeonJeungseol of I Gyu-gyeong, the situation in which opiumrelated information collected from the 1820s was shared in Joseon society is revealed. In addition, the handwritten conversations with Han Chinese intellectuals published in Yun Jeong’s Seohaengnok(1844) and Gwon Si-Hyeong’s Seokdan Yeongi(1850) do not stop at the level of being wary of opium's hazard and influx into Joseon, vividly reports the confidential circumstances such as the UK's strong military power, corruption in the Qing bureaucracy, financial exhaustion due to silver leakage, and confusion of opium bans. It can be seen that Yeonhae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background in which Joseon intellectuals' curiosity about opium developed into a crisis awareness that they had to prepare for threats from Western powers.

      • KCI등재

        아편굴의 조선인 - 일제강점기 소설 속 아편 밀매업자 표상 연구

        김주리 구보학회 2016 구보학보 Vol.0 No.15

        This study aims to analyse the representation of an opium den and an opium peddler in the Korean novels at the colonial age. The propriety articles about opium and an opium den appears after 1920s with serious proublem of an opium addict smoker. The oppium den is described as a corrupted criminal space in various novels. The opium and the opium den was not experienced but imagined thing to the contemporary mass, so their horror for the opium den was based on imagined exploitation. The image of an opium den has the ambivalence of the contempt space in which various crime and hoodlums emerged and the exotic fascinating space. Manchuria as the ambivalent space that cross the menace residence and the fortune of speculation was an enormous opiun den. This imagination of Manchuria shows divided narratives for residence and resistance in the novels at the colonial age. An, Su-gil's “A wall of earth” narrated the contrast between an urban suite speculator and a farmer cultivating Manchuria. But the contrast becomes nothing because all korean settlers cultivated and smuggled opium for their settlement. The image of Manchuria as an insidious space has some meaning that koreans opium peddlers resist to the Empire and the Fascism society. The representation of a woman korean opium peddler shows an insidious and violent image and so evokes some possibility for resistance to imperialism. 본고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공간, 그 속에서 아편을 밀매하고 교환하는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소설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로 재현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아편과 아편굴의 탐사를 다루는 글들은 20년대 이후아편 중독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서 등장한다. 아편굴은 몸을 망치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소설에서 범죄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당대 대부분의 지식인에게 있어 아편이나 아편굴은 ‘경험된’ 대상이 아니라 ‘상상된’ 대상으로, 그속에서 느끼는 공포는 상상된 착취에 기반한다. 아편굴의 이미지는 부랑과 범죄에 대한 경멸과 이국적인 매혹의 거처로서 양가성을 띤다. 거주의 위협과 투기의 행운이 교차하는 양가적 공간으로서 만주는 하나의 거대한 아편굴이다. 만주라는 거대한 아편굴에 대한 상상은 일제강점기 소설에서 정주와 저항의 서사로 이원화한다. 안수길의 「토성」은 도시 양복쟁이 투기꾼과 만주 개척농민의 대조를 서사화하지만 아편의 재배와 밀매가 모두 조선 이주민의 만주 정착과정에서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차이는 무의미하다. 아편굴이 곳곳에 산재한 만주의 음험함에 대한 강조는 팽창하는 제국, 파시즘적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아편굴의 조선인 여성 밀매업자의 형상은 김사량의 「향수」 등 40년대 다양한 서사 속에서 음험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환기하는 가운데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KCI등재

        광주의 아편문제와 허내제의 이금론

        이학로 ( Lee Hag Lo ) 중국사학회 2003 中國史硏究 Vol.26 No.-

        鴉片是從1820年代以來成爲嚴重的社會問題之一.但是,淸朝不建立有效果的鴉片對策.只是一??淸朝官僚提出了鴉片問題是嚴重的主張.鴉片問題越來越深刻了. 鴉片問題具有淸朝的內部予盾,就是在經濟方面上,招引銀價仰??.因此下層生産者破産了.國家財政越來越惡化.在政治方面上.,官僚內部的腐敗出現了.這些問題使淸朝官僚感到王朝禮制??원緩的危機感.雖然淸朝要推進鴉片嚴禁政策.但是官??腐敗和商人的作弊使鴉片禁令沒有效力矣. 這樣的情況之下,許乃濟提出了鴉片對策.就是鴉片弛禁論帶有差別??淸朝中央官僚的看法而他的弛禁論有硏究價値. 我在這篇文章裏要分析許乃濟的弛禁論帶有甚??特點.首先,從「鴉片烟例禁愈大應 請變通辦理折」和「請弛內地民人栽種罌粟之禁片」的兩篇上泰文.我要開始硏究. 許乃濟的弛禁論的內容是如此.就是開放鴉片市場而課稅 .制了官員·士子·兵士以外.所有的老百姓可以吸鴉片煙.還是許容栽培罌粟來生産鴉片煙.那??,終干沒有外國輸入鴉片而也沒有紋銀流出. 許乃濟的弛禁論本來不是他一個人的意見.弛禁論是廣州的兩廣總督,廣東巡撫,奧海關監督.廣州知識人和商人之間消極地爲論意的.比如說.兩廣總督盧坤·廣東巡撫祁貢·兩廣總督鄧延楨以及如吳蘭修·態景星·儀克中·何太淸的廣州學海堂知識人等等.道光皇帝也不明白地拒否許乃濟的弛禁論.但是,黃許乃濟??滋等的鴉片嚴禁論者在1838年一致批判許乃濟的弛禁論根據黃??滋的`吸煙者死刑論`和林則徐的鴉片嚴禁主張,道光帝決定鴉片嚴禁政策.許乃濟在道光18年(1838年)9月11日被革職,後年去世了.許乃濟的弛禁論沒有成功了.可是 帶着重要意義.他認識到在經濟的方面.物物交換的方法可以防止紋銀流出.馬上解決`銀貴錢賤價`的現狀.他又認識到,要是不除去官??的作弊,就是禁令沒有效果.這樣的主張說到他覺得淸朝體制崩壞的危機感.所以他在合理性和效用性之.條件下提出了鴉片貿易合法化的方案. 但是,他許用民間吸鴉片煙和國內許罌粟栽培是會破壞淸朝的體制基盤和德治專制主義的道德名分(民本主義)的.弛禁政策 容易地成爲中國社會鴉片天國.這是鴉片弛禁論的弱點.通過黃許??滋的`吸煙者死刑論`與林則徐的軍事危機論,道光帝採擇鴉片嚴禁定策.林則徐被任欽差大臣去廣州而團束鴉片.道光帝在道光18年(1838)9月11日革職許乃濟,明年許乃濟死去了.

      • KCI등재

        중일전쟁기(1937-45) 화중점령지에서의 일본 아편정책

        박강 ( Kans Park ) 중국사학회 2003 中國史硏究 Vol.23 No.-

        日本占領臺灣以來所實行的鴉片政策不僅是以收入爲主的政策而且又是근日本植民地 占領區的確保和維持흔有關. 這樣的鴉片政策是考慮各地區的特性和國際社會的批判而實行的. 特別是中日戰爭時期日本在華中占領區實行的鴉片政策근其他地區露出了不同的方式. 本論文想把中日戰爭時期在華中占領區的日本鴉片政策不但着眼在日本的整個鴉片政策地區上, 而且근其他鴉片政策地區比較的角度上接近而說明華中占領區鴉片政策的內容和타的特性. 爲了理解這個問題本論文首先調査中日戰爭時期日本在華中占領區成立的僞中華民國維新政府和日本在關東州設立過的宏濟善堂的復活. 接著考察1940年日本在南京成立的汪精衛僞南京政府的鴉片政策的內容. 最後日本面臨着太平洋戰爭的危機而轉變對中國政策以後變化的華中鴉片政策的內容和意義. 以上的背景來想理解一下在華中占領區日本鴉片政策的特性. 日本在華中占領區實行的阿片政策除了以收入爲主的政策以外還有근其他地區不同的特色, 首先日本不僅考慮了在中日戰爭時期對日本的戰略上非常重要的蒙疆政權的財政維持問題和國際社會的批判, 因而在華中地區內沒有生産鴉片 其二, 日本在鴉片行政上排除華中成立的僞政權而타直接掌握鴉片收入和鴉片行政. 但是由于日本和華中的汪僞政權圍繞着財政問題經常發生汪僞政權的不滿和在太平洋戰爭期間日本對中國政策的轉變, 日本戰敗之前把鴉片行政讓與汪僞政權又是一個罕見的特色.

      • KCI등재

        양무시기의 아편문제와 곽숭도의 금연운동

        이학로 ( Lee Hag Lo ) 대구사학회 2004 대구사학 Vol.74 No.-

        郭嵩??的一生是正好在新舊思想交替的時代里. 他提出了흔多超卓的見解, 開創了新思潮的方向. 他是中國十九世紀中期, 在歐洲文明衝擊下, 知識階層表現抗拒心理的第一代的代表性人物. 郭嵩??自從咸豊9年隨僧格林泌協辨天津海防以來, 三十多年間, 每逢與洋務有關的案件, 或淸廷與外邦的外交, 他如不是親身參與其中, 便是向朝廷或大臣提建議, 他在官僚生活之中, 與一些重要人物如曾國藩, 胡林翼, 左宗棠, 李鴻章, 曾國전等又皆有深交. 郭嵩??是開中國派任外國常駐使臣的先例. 他是出任駐英公使的第一人. 他出使任內三年, 于開了中國人認識西方文化的新篇章, 又得到了若干具體的外交成就. 出使英國之後, 郭嵩??發現英國一些有正義感的人民和士紳, 不僅對其政府在中國進行的鴉片貿易感到羞恥, 而且成立禁煙會, 主動與郭嵩??聯系, 希望在中國推行禁煙運動. 洋務運動時期在法律上鴉片可以輸入和販賣. 鴉片戰爭之後鴉片禁令早己名存實亡了. 淸政府對外國鴉片販子的行爲早己默認, 鴉片貿易實際上已經完全不受法律制裁. 淸政府規定洋藥除系官員兵了太監人等照例治罪, 又私수 藏奸聚集者, 照聚賭例治罪外, 其余民人槪准買用. 以後中國漸漸地變成世界上之最大鴉片市場. 這樣的情況下, 李鴻章采取漸進的寓禁于徵政策. 郭嵩??反對因財政理由而作出有損國民經濟發展之政策. 他洞察到鴉片抽釐只會使白銀大量外流, 所入於政府財稅是速不及流出的資金之多, 故他反對李鴻章爲了增價數百萬之鴉片弛禁來持海防, 練兵之用, 而弛禁鴉片的主張. 郭嵩??認爲由于中國人中吸食鴉片 風氣的 蔓廷, 極大地危害着中國人的心身健康, 削毛了大量的財富. 他認爲吸食鴉片是中國衰落的主要原因. 在這樣的情況之下, 郭嵩??向朝廷拜發了『請禁止鴉片煙折』, 但是這些建議根本沒有實行. 所以他發起了禁烟運動而組織了禁烟公社. 郭嵩??歸國后便在湖南倡議由民間自動禁煙. 他根據人心風俗爲立國之根本的倫理思想, 展開了鴉片禁煙運動. 他曾積極運用外交影響力去解決鴉片入口的問題. 因此, 他對西方帝國主義者的野心欠瞭解, 而爲屈求全的政策是有問題的. 但是郭嵩??的禁煙努力促進了中國國內禁煙運動的深入發展.

      • KCI등재

        양무운동시기의 아편문제와 양무파의 아편인식

        이학노 ( Hak Ro Rhee ) 명청사학회 2002 명청사연구 Vol.17 No.1

        洋務運動時期, 淸朝政府開放鴉片做弛禁. 在法律上, 鴉片可以輸入和販賣. 官員的鴉片認識也變化了. 在鴉片戰爭以前, 淸朝禁止鴉片輸入·賣買·吸煙, 鴉片戰爭之後, 淸朝幷沒有宣布禁煙令無效, 相反, 也曾在某些場合重申過繼續禁煙. 實際情況是自朝廷到各地, 禁令早己名存實亡了. 淸政府對外國鴉片販子的行爲早己默認, 中國的鴉片販子也依杖外國的特權而公開販運. 從1843年起, 鴉片貿易實際上完全不受法律制裁. 英國一直在謀求鴉片貿易的合法化. 于是,在上海擧行的中, 英國提出了鴉片貿易合法化的要求, 淸政府被迫承認鴉片合法貿易的原則, 最後雙方同意定爲每箱30兩納稅. 淸政府規定,洋葯除系官員兵丁太監人等照例治罪, 又私수藏奸聚集者, 照聚賭例治罪外, 其餘民人槪准實用. 以後中國漸漸地變成世界上之最大鴉片市場. 太平天國制定了嚴勵禁煙的政策, 這些政策帶有改革社會陋習, 提高道德風尙的進步意義. 但到了太平天國的後期, 鴉片浸透到了太平軍內部, 在太平軍內發現了吸食鴉片的現象. 1880年是外國鴉片入口中國數量最多的年빈, 以後進口鴉片逐漸減少. 當時上海成了世界上鴉片進口的最大口岸, 在上海進口的鴉片中, 有相當數量是轉口到其他口岸去的. 因此上海是世界最大的鴉片進口口岸, 最大的鴉片轉口口岸和最大的鴉片消費口岸. 還是, 1880年代罌粟花已開遍了中國18省的各地, 鴉片的産量也達到了空前豊産的地步. 土煙替代了洋煙, 表現在土煙在全國形成了有效的供銷罔絡, 占領了傳統的洋煙市場, 幷逐漸使洋煙滯銷, 而進口萎縮. 所以從某種程度來說, 使百年以上的印度鴉片輸出中國最終中止的決定作用是印度鴉片在價格上難敵中國土煙, 尤其是價廉·質優·量多的川土. 這樣的情況下, 在洋務派的內部, 一些正直有責任心的官員繼承林則徐的遺志, 在揚禁煙旗幟. 外國鴉片的大量輸入, 土煙的洪水般的泛濫, 一些洋務派官員提出了强烈禁煙呼聲. 曾國筌等不是如此. 鴉片稅是淸廷一大財源, 要實行禁煙, 輸入必大受影響, 于是采取漸進的寓禁于徵政策. 洋務派都鑒于淸朝財政狀況, 實行寓禁于徵政策, 一方面宣布禁煙, 一方面又繼續合法地徵收牌照捐, 煙燈捐和土葯統稅等, 如此則禁煙的效果就大打折구了. 郭崇燾認爲, 由于中國人中吸食鴉片風氣的蔓延, 極大地危害着中國人的心身健康, 消耗了大量的財富. 他認爲吸食鴉片是中國衰落的主要原因, 于是發起了禁煙運動而組織了禁煙公社. 郭崇燾的禁煙努力, 促進了中國國內禁煙運動的深入發展.

      • KCI등재

        논문(論文) : 서양인(西洋人)들의 근대(近代) 중국(中國) 아편문제(鴉片問題)에 대한 인식(認識) -『만국공보(萬國公報)』와 Chinese Recorder의 내용을 중심으로-

        노재식 중국사학회 2011 中國史硏究 Vol.74 No.-

        鴉片問題是中國近代嚴重的社會問題之一. 來華傳敎士爲了維護傳敎利益, 從一開始就對鴉片吸食和鴉片貿易堅持反對的態度. 尤其是1860年代以後, 基督敎在中國有了大的發展空間, 來華傳敎士的數量也上升. 中國鴉片泛濫的狀況引起了進入中國內地傳敎士的關注. 於是, 他們利用創辦各種刊物作爲手段, 對中國鴉片問題進行了猛烈的批評. 其中, 中文報刊『萬國公報』和英文期刊『敎務雜志』(Chinese Recorder)刊載了大量反對鴉片問題的文章, 對中國鴉片問題的原因、嚴重危害的情況、勸戒煙的方法等問題給予了深刻深討. 『萬國公報』是宣傳禁煙方面的影響最大的刊物. 『萬國公報』原名『中國敎會新報』, 1868年9月由美國傳敎士林樂知創辦於上海, 1874年改名爲『萬國公報』, 1889年由英美傳敎士在華基督敎組織-廣學會接辦. 『萬國公報』是一빈新聞報道、中外時事評論、中西學介紹與硏究的綜合性的期刊. 該刊在華的40餘年裏, 在宣傳基督敎敎義同時, 也對促進中西文化的交流做了一些工作. 『萬國公報』自創刊起就對鴉片問題予以關注, 進入1870年代以後, 鴉片問題成爲『萬國公報』所關注的重要問題之一. 『萬國公報』和『敎務雜志』登載的鴉片文章充分認識到鴉片在華流毒的危害性, 所以對吸食鴉片人提出了進行批判. 타們認爲鴉片不僅是醉人的奢侈品, 還是有害的毒品. 鴉片會傷害身體、敗壞道德和社會. 同時, 『萬國公報』和『敎務雜志』認爲基督敎在中國難以傳播, 是鴉片貿易的緣故. 中國人向來就憎惡西方人, 因爲被西方國家打敗, 還被强制輸入, 看到那些基督敎國家, 就對基督敎흔反感. 因此, 『萬國公報』和『敎務雜志』上極力宣傳反對鴉片貿易. 同時, 還介紹鴉片禁止的方法. 『萬國公報』和『敎務雜志』的反鴉片言論不僅表明了傳敎士對鴉片問題的基本態度, 對廣大華人信徒甚至對基督敎有흔大反感的中國人都産生了重要的影響, 而且19世紀末由傳敎士占主導的禁煙活動的開展, 打開了堅實的輿論基礎. 『萬國公報』和『敎務雜志』是較有影響的綜合性刊物, 對近代中國反鴉片運動發揮了一定的作用, 但也存在著明顯的局限性. 타們在宣傳反鴉片的同時, 鼓吹基督敎敎義, 還强調上帝制造萬物, 宣揚基督敎的救世敎義. 這兩빈期刊上登載的反對鴉片和鴉片貿易的文章的最終目的仍是基督敎在華的傳播.

      • KCI등재

        개항기(1876~1910) 조선의 아편확산과 청국 상인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0

        During more than a century after Opium War the opium raised a serious problem in chinese society. Over chinese border opium had an evil influence on neighboring Joseon. In Joseon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began as soon as ports were opened. Especially chinese merchants related to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from 1882 upward, when economic relations and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were active. Throughout the nineteenth century China was having a serious social problem caused by opium. The two country, Joseon and Qing, maintained the close exchange each other and were border countries. So there was hige probability of opium's inflow into Joseon by China. After opening port the opium problem of Joseon reached a serious standard by interchange between two countries, Joseon and Qing, though the government of Joseon took warning. At first glance, it was expected that the serious situation of opium spread occurred by illegal activities of chinese merchants taking advantage of consular jurisdiction when they gained through regulations for maritime and overland trade between Chinese and Korean subjects in 1882. Actually the curse of opium occurred after the Sino­Japanese War. Especially after treaty for commerce between Korea and Qing in 1899 as bilateral consular jurisdiction was maintained and a lot of chinese people such as small merchants and coolies moved to Joseon, most of them engaged in illegal activities referring to opium. As a result around 1910 opium spreaded across the nation. the main culprit of opium diffusion was chinese merchants. With this negative recognition on chinese people was stamped on korean. That affected the exclusion of overseas chinese in japanese colonial era. 아편전쟁 전후 이래 100여 년 동안 중국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던 아편문제는 비단 중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웃한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아편유입과 확산은 조선이 개항되면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1882년 이후 활발해진 청국과의 경제교류 속에서 청국 상인과 관련이 깊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련성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동아시아 최대 강국인 청조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외세의 침략보다는 아편의 유입을 더 경계하였다. 조선정부는 연행사절을 통해 아편전쟁 전후 이래 중국의 아편문제와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청조가 1,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사실에 대해 조선정부는 당초 위기감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위기의식을 가급적 축소하여 감추고자 하면서 위기의식은 점차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편문제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청조와 국경을 접한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다. 이에 따라 아편전쟁 이후는 물론 1876년 이래 조선정부는 각국과의 개항 과정에서도 아편의 유입 및 판매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2년 조선정부와 청정부 간에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고, 이어서 1899년 대한제국과 청정부 간에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아편의 유입 및 판매가 우려되었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아편이 합법화되어 사회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중국인들은 아편의 해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청무역장정을 통해 청국 상인들이 개항장은 물론 한성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내지에서의 상업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의 북부 국경지대인 의주와 회령에서도 수시로 교역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아편의 유입 및 판매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인과 관련된 사건에서 원피고 여부를 불문하고 단독 혹은 공동으로 영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아편범죄가 더욱 우려되었다. 아울러 청일전쟁 이후 1899년에 대한제국과 청정부 사이에 체결된 한청통상조약이 비록 불평등성이 완화된 조약이었지만 쌍무적인 영사재판권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청국 상인들의 불법을 차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청무역장정의 우려와는 달리 청일전쟁 이전 청국 상인들을 통한 조선으로의 아편유입 및 판매는 의외로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이후 한성과 개항장에 들어온 청국 상인들은 청정부나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로 대체로 정상적인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유력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조선의 언론 등에서도 청국 상인에 의한 아편유입 및 판매와 관련된 기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서의 청국의 위세 등을 감안해 볼 때 청일전쟁 이전 조선의 언론 등에서 청국 상인들의 아편 관련 기사가 없다고 해서 조선에서 청국인의 아편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청일전쟁 직후 여러 언론과 재판문서 등에 청국 상인들의 아편판매 폐단에 관한 내용들이 제기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

      • KCI등재

        菊地酉治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0

        Yuchi Kikuchi was a Japanese expert on opium in 1920s and 30s. Unlike most researchers he was a distinctive figure in that he himself was an onetime addict, and that he was involved in drug trafficking while he was in China. His experiences had an influence on his understanding and activities of opium problem. Researches on Japanese policy on drugs have been concentrated on the necessity and the goal of the policy in the colonies. But now, it is necessary to have an approach to the Japanese opium problem from the perspectives of political history and institutional history. Understanding of Japanese opium expert and his activities in the period of Japan’s promotion of opium in its colonies will contribute to enrich our perspective on Japanese opium policy. Examining this matter from a Japanese civil viewpoint, and also from an addict and drug dealer’s viewpoint will contribute to a new and better understanding of Japan’s opium policy. For the purpose of researching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above all things his life and relief activities for opium addicts were scanned on this paper. And then through Yuchi Kikuchi’s talks and contributions, at one time he was opium addict and dealer, it was revealed what he thought about Japan’s opium policy. finally the distinction and limit of Yuchi Kikuchi’s thinking were pointed out. This paper on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is significant in that it focuses on the opium policy in the civil level. Previous research mostly viewed the problem in the level of policy makers. Yuchi Kikuchi’s critical position with regard to Japanese colonies reveals the reality of Japan’s opium policy. He specifically points out the problems of Japan’s opium policy. His understanding of the opium problem and relief activities were distinct from those of government and policy makers. 이 논문은 기쿠치 유지(菊地酉治)라는 일본의 아편마약 문제 전문가의 인식과 구제활동을 살펴보았다. 러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기쿠치 유지는 중국에 거주하면서 아편중독에 빠지고 모르핀을 판매한 경력도 있어 누구보다 아편과 마약의 해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의 아편마약 판매가 일본의 대중국 관계에도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예방과 치료의 절실함을 깨닫고 日本基督敎聯盟과 외무성 산하의 國際聯盟協會와 연계하여 연구와 구제활동에 노력하였지만 변화하는 일본의 대외관계 속에서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기쿠치는 일본의 식민지 등에 대한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30년 동안 점금주의 아편 전매제도를 시행했으면서도 성과가 의심되며 관동주의 경우 오히려 안전한 아편 흡연지로서 인식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아편전매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누려왔음을 지적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아편이나 마약 모두 밀매가 성행하고 있지만 마약문제에 대해서는 단속법규와 노력이 부족하여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의 상인들은 식민지 외에 중국 각지에서도 아편과 마약을 밀매하였는데 근본 원인에 대해 일본정부(외무성과 내무성)의 단속 불이행과 일본의 경제인 및 아편 상인들의 이윤추구에 기인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쿠치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 동시대 일본인에 비해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중요 지위에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아편마약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 데 비해 그는 오히려 사회적ㆍ인도적 문제를 강조하여 중독자의 구제대상을 일본 내 중독자는 물론 중국을 포함한 일본의 전 식민지의 중독자를 포함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인도적인 차원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일본에게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아편마약 문제의 폐해는 중국이나 일본 식민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이동으로 인해 일본 내부에도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중국 내 아편마약 판매는 중국인들의 극심한 반일감정을 야기시켜 중일관계의 악화는 물론 군사적 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한편 중독자 구제를 위한 해결방법에 있어서도 그는 민과의 연계는 물론 식민지 각지에도 민간단체를 조직케 하여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쿠치 유지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에 대한 본 연구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과 문제점들이 기존에 정책 추진자의 시각 중심이었다는 것에 반해 민간 차원의 시각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기쿠치 유지의 일본 식민지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의 남다른 인식은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일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쿠치 유지의 인식과 구제활동은 정책 추진자들의 시각과의 차별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당시 민간 차원의 시각에서도 독보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