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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4세기, 성취를 위해 국경을 넘은 고려인들

        이명미 ( Lee Mynugmi ) 경상대학교 교육연구원 2021 현대교육연구 Vol.33 No.2

        본 논문에서는 13-14세기,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성취를 위해 몽골로 간 고려인들의 사례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시기 많은 고려의 유생들이 원의 과거시험인 制科에 응시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제과 급제자라는 명예는 고려에서도 인정받아, 높은 관직과 변화한 사회적 대우로 이들에게 돌아왔다 고려의 승려들 역시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求法을 위해 원으로 가기도 했고, 이외에도 황제의 부름을 받고, 혹은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황제와 황실의 인정을 받아 원에서 계속 활동하기도 했고, 원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고려에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승려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확대된 국제 교역망 속에서 고려의 상인들은 1년 내내 고려와 원을 오가면서 무역을 통한 이윤을 추구했다. 당시 여러 가지 필요에서 한어를 배우고자 했던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어 교재인 『노걸대』에는 고려 상인들의 성취를 위한 과정과 결과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몽골과의 관계는 고려에 정치적 제약을 가하기도 했지만, 고려 국왕을 포함해 고려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많은 고려 사람들은 몽골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정치적 제약이나 압박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더 넓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꿈을 키우고 나름의 성취를 이루어내기도 했으며, 그들의 꿈과 성취는 동시대의 고려인들로부터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100년 이상 유지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서 바라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In this paper, the instances of Goryeo people who went to the Mongol empire for individual advancement in the 13th and 14th centuries are large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The honor of passing Je-gwa was also recognized in Goryeo, and successful candidates returned to Goryeo with high official posts and an increased social status. The monks of Goryeo continued pilgrimages to Yuan for more advanced Buddhist training as before, and in addition, they were invited by the emperor or went to Yuan in the interest of their temples. They continued to work in Yuan with the support of the emperor and imperial family. There were monks who returned to Goryeo and based on their activities in Yuan, played a more important role than previously. Finally, amid the expanded international trade network with the advent of the Mongol Empire, merchants in Goryeo pursued profits through trade throughout the year, traveling between Goryeo and Yuan. “Nogeoldae[老乞大]”, a textbook for learning Chinese made for those who wanted to learn Chinese for various needs at the time, records the processes and results of the achievements of the merchants of Goryeo. Relations with the Mongol empire imposed political restrictions on Goryeo, but also provided new opportunities for many people of Goryeo, including the king of Goryeo. Many people of Goryeo resisted political restrictions or pressures derived from relations with the Mongol empire, but through relations with the Mongol empire, they recognized the wider world, developed dreams, and achieved their own achievements, and their dreams and achievements were encouraged and applauded by contemporary people of Goryeo. The stories of the people of Goryeo are expected to contribute to the view of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the Mongol empire, which had been maintained for more than 100 years, beyond the dichotomous perspective.

      • KCI등재

        한국에서 高麗-몽골(元) 關係史 인식과 北方民族史 연구

        金壯求 동국사학회 2015 동국사학 Vol.59 No.-

        이 글의 목적은 지난 20세기에 저술된 대표적인 한국사와 동양사 개설 서, 고려-몽골(元) 관계사 논문 등에 보이는 몽골 인식과, 199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계와 관련학회, 관련기관의 북방민족사 연구 성과를 살펴봄으 로써 성찰과 전망의 기회로 삼기 위함이다. 20세기 중후반(1945~1989년)에 선학들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뛰어난 연구 업적을 발표하였다. 일부 저서와 논문에서 북방민족 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선학들의 우수한 연구 성과는 이후 한국 북방민족사학계와 알타이학계에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알타이학회, (사) 중앙아시아학회, (사)한국몽골학회 등이 성립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련 기관으로는 동북아역사재단,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 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경기도 박물관, 예술의 전당 등도 관련 전시회를 열고, 전시도록과 연 구서 등을 발간하여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외에도 동국대학교, 단국대학교, 서울대학교, 부경대학교, 계명대학교 등에서 북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한국 역사학계에서 고려-몽골(元) 관계 연구와 북방민족사 연구는 지난 20세기부터 2015년까지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발표에서 다루지 못한 관련 연구서와 논문 등을 계산에 넣는다면, 아마도 양적인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였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면, 과연 모든 연구 성과가 질적으로도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느 누 구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고려-몽골(元) 관계사와 북방민족사 연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주제 등 부족한 부분이 아직도 많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심각한 문제는 연구자들이 상호 성과 인용과 건전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연구자 층이 엷고 축적된 학문성 과가 부족한 한국 중앙유라시아학계에서 지양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다.

      • KCI등재

        몽골에 대한 고려의 ‘貢女’ 양상과 배경

        이명미 연세사학연구회 2023 學林 Vol.52 No.-

        李穀이 원 御史臺를 대신해서 쓴 상서문 「請破取童女書」는 당시 원의 사신들이 황제의 명으로, 혹은 황제의 명을 칭탁해 고려에서 동녀를 데리고 가서 궁 안에 두거나 사신 개인의 잇속을 챙기는 것을 금해줄 것을 요청한 글이다. 이 글은 이 시기 공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몽골과의 관계 내내 몽골의 요구로 고려 여성들이 끌려가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라고 하는, ‘공녀’와 관련한 서사가 구축되는 데에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원 조정에 대한 요청이라는 목적을 갖는 글이기에 ‘공녀’에대한 모든 사실을 전하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에 기반한 공녀 관련 서사 또한 편향성을 갖는다. 이에 연대기 자료에 보이는 공녀 관련 기록을 모아 그 양상과 추이를 살펴보면, 달리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몽골 측의 요구에 따라 동녀 선발 및 몽골행이 이루어지는 사례는 시기별로 그 양상에 큰 차이가 확인된다. 몽골은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인 1270년대 중반, 군사의 처를 구하기 위해 고려에서 ‘남편이 없는 여성’들을 대거 동원한 바 있으나, 이러한 유형의 ‘공녀’는 몽골에서 정복전이 종식된 후로는 더 확인되지 않는다. 이곡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은 유형의 ‘공녀’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1307년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는 武宗 카이샨이 제위 계승 분쟁을 거쳐 황제위에 오르고 고려에서도 그를 지지했던 충선왕이 복권하는 시점으로, 정황상 무종이 즉위 과정에서 자신의 기반이 되어준 세력에 대한 賜與 차원에서 고려 良家의 여성을 동원한 데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종 즉위에 공을 세웠던 충선왕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고려 측, 정확히는 고려국왕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이는 이곡의 글에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공녀’ 유형으로, 1298년 충렬왕과 충선왕의 重祚 정국 및 충렬왕 복위 후 양왕 세력 간 정쟁 상황 등 여러 정치적 분쟁 상황에서 확인되며, 이후 공민왕 대까지 이어진다.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 ‘공녀’의 양상이 보여주는 시기별 추이 및 복합적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는 ‘공녀’의 배경이 되는 고려-몽골 관계를 딱히 몽골의 압제 및 간섭과 고려의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만 볼 수 없음을 드러낸다. Lee Gok(李穀)’s ‘article asking for a ban on taking young Goryeo women(請破取 童女書)’ is an important source for understanding the situation of ‘Gongnyeo(貢女)’ during this period, and provided the basis for the establishment of a narrative related to ‘Gongnyeo’ that “Goryeo women were dragged to live miserable lives at the request of the Mongol empire throughout this period.” However, this article does not convey all the facts about the ‘Gongnyeo’ and the narrative related to the ‘Gongnyeo’ based on it also has bias. In this study, I collected records related to ‘Gongnyeo’ shown in chronological data and examined the patterns and trends, and there were parts that could be viewed differently from the existing understandings. First, it was not until 1307 that the case of the same type of ‘Gongnyeo’ as mentioned in Lee Gok’s article began to appear. This is the time when Mujong(武宗) Qaishan ascended the throne and King Chungseon(忠宣王), who supported Qaishan, was regained power in Goryeo. Second, a number of cases of ‘Gongnyeo’ made in the political interests of the Goryeo Kings are identified in various political disputes, including the political disputes between King Chungnyeol and King Chungseon in 1298 etc and continued until King Gongmin(恭愍王)’s reign. The review results of the period-specific trends and complex backgrounds of the ‘Gongnyeo’ reveal that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which is the background of the ‘Gongnyeo’ cannot be seen only from a dichotomy of the Mongol empire’s oppression, interference, and resistance of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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