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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정 한국기와학회 2021 한국기와학보 Vol.3 No.-
본 논문에서는 신라 고분 출토 기와의 특징을 분석하고 사용례를 비교하여 경주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신 라 기와의 변화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신라 기와 연구 분야의 확장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신라 기와의 변화 원인은 해당 시기 사회·기술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하여 경주지역 신라 기와 변화의 의미를 찾고 자 하였다. 최근 경주지역은 양적 증가한 발굴조사로 심도 있는 기와 연구가 가능해졌으나 아직까지 기와 문양, 제 작법 위주의 연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본 논문의 연구 대상은 신라 고분 출토 기와이다. 시간적 범위는 신라 시대 6~7세기대이며 경주에 석실묘가 등장한 시기를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공간적 범위는 행 정구역상 경주의 도심과 외곽으로 한정하지만, 울주군 일부는 1906년까지 경주에 속하였으므로 포함하도 록 한다. 분석 방법으로는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기와 중 시간성이 반영되는 속성인 소지 형태, 타날판과 외면 정면 방법, 측면 분할 방법, 하단부 내면 조정 방법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특징과 변화 단계 설정하였다. 그 결과 소지의 형태는 점토띠→점토판으로, 타날판은 단판→중판→장판으로, 외면정면은 회전물손질→타날 후 물손질으로, 측면 분할은 전면와도 분할→2차 깎기 조정→와도 후 파쇄로, 하단 내면 조정 방법은 무조 정→깎기 조정→물손질 조정, 와통은 무와통→통쪽와통→원통형와통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속성을 기반으로 형식 분류를 통해 신라 고분 출토 기와의 사용 양상의 변화를 살폈다. 무와통 제 작법으로 제작한 기와가 6세기 전~ 중반에 등장하여, 6세기 후반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7세기 초 원통형 와 통 제작법 기와가 나타나면서 무와통 제작법 기와는 점차 소멸한다. 원통형와통 제작법 기와가 등장할 때 통 쪽와통 제작법 기와도 소량 제작되었으나, 원통형와통 제작법 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양한 제작법에서 원통형와통 제작법으로 정형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상은 신라 기와의 변화 양상과 동일하였다. 기와 제작법의 변화로 기와의 제작 양도 많아지면서 기와의 수요와 공급이 급증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기와가 출토되는 고분의 수가 증가하고 출토 기와의 사용량과 사용례도 다양해진 다. 이러한 변화는 기와의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의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라 왕경이 건설되고 방리제가 실시되면서, 건축 기술이 도입된 것 등의 사회적 현상들이 결국에는 기와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후 와통의 도입이라는 제작 기술 변화로 기와 생산의 대량화가 가능해지면서, 소 비적 측면에서 일반화되는 유기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Various and in-depth roof-tile studies have been made possible in Gyeongju area recently through quantitatively increased excavation. However, it has yet to go far beyond research focusing on roof-tile patterns and production methods. In order to broaden the scope of such research methods, we will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s of Silla and compare the usage cases to examine the patterns of changes in the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s in Gyeongju. The reason for the change in the Silla flag was thought to have played a major role in the political and technological background of the period, so we wanted to look at the meaning of the Silla flag change in Gyeongju area. In our home town, we reviewed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Silla ancient tombs in Gyeongju. The target of the study is roof-tile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 of Silla, and the time span will revolve around the 6th and 7th centuries, when the tomb of Seoksil was built in Gyeongju during the Silla Dynasty. The spatial scope was limited to the downtown and outskirts of Gyeongju in the administrative region, but some parts of Ulju County belonged to Gyeongju until 1906. Among the roof tile-making methods, the analysis was centered on the time-reflected manufacturing methods.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clay is clay webbing → clay plate, tap plate is small plate → middle plate → long plate, surface finish is rotary water damage → tap and water damage, side segmentation is the lateral full-knife split → secondary cutoff → cut after splitting, the finishing method inside the lower part was changed to an unadjusted → adjustment of the clipper → adjustment of the water quality, and the roof-tile can be seen as no roof-tile canisters → a wooden roof-tile canister → a cylindrical roof-tile canister. Based on the type classification, the roof-tiles from the ancient tomb were identical to those from the Silla roof-tile. no roof-tile canisters roof-tile appeared from the 6th century to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It continued down to the late 6th century, and gradually disappeared as the cylindrical roof-tile appeared. When the cylindrical roof-tile appeared, the wooden roof-tile canister was produced in small quantities, and the cylindrical roof-tile took up most of it, which was stereotyped from various production methods to the cylindrical roof-tile. It seems that demand and supply of roof-tiles have increased rapidly due to changes in rooftile production methods and increased production volume of roof-tiles. As the 7th century entered, the number of tombs where roof-tiles were excavated and the amount of roof-tiles excavated increased, along with the variety of use cases. This flow of change can be seen as the social meaning of roof-tile production and consumption. Social phenomena such as the construction of cities and the introduction of building technologies eventually served as a backdrop for the introduction of techniques for roof-tile mass production. Since then, there has been a change in manufacturing technology called the introduction of roof-tile canisters, and as such manufacturing technology changes mass-produce roof-tiles, organic phenomena that are generalized in terms of consumption are judged to occur.
고려시대 막새 편년 시론 - 성주 법수사지 발굴조사 출토품을 중심으로 -
이인숙 한국기와학회 2020 한국기와학보 Vol.2 No.-
고려시대 막새를 편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막새와 평기와 간의 접합 방식의 변화를 토대로 한 편년 안이다. 둘째,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지의 창건 또는 중수 막새를 선별하여 문양의 변화를 제시하는 편년 안이다. 고려시대 막새 변화의 큰 흐름이 대강 그러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막새의 세분된 편년 안은 여전히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존속 기간이 긴 건 물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막새 중에서 창건 또는 중수 시점의 문양을 판단하는 근거, 유행 기간이 긴 문양 의 특성상 막새와 기년명 공예품 간의 문양 유사성으로 특정 막새 문양을 그 연대로 직결시키는 근거 등 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가장 큰 한계는 고려시대 막새 중에 연호명 기와가 거의 없 어서 편년의 근거가 부족한 데 기인한다. 그런데 고려시대 평기와는 연호명 기와를 중심으로 한 편년 안이 수립되어 있다. 이에 이 글은 평기와 편년 안을 토대로 고려시대 막새 편년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필자가 실견한 바 있고 평기와가 잔 존하는 고려시대 막새가 다소 출토된 성주 법수사지의 평기와 잔존 막새로 하였다. 먼저 평기와 편년 안 에 따라 평기와 잔존 막새들의 편년을 시도하였다. 그런 다음, 편년된 법수사지 막새의 문양이나 제작기 법과 유사한 막새를 더 찾아냈다. 이로써 성주 법수사지 출토 고려시대 막새 편년 안을 제시하였다. 하나의 유적을 대상으로 한 편년 시론이기 때문에 고려시대를 통시적·공시적으로 포괄하기에는 미흡 한 점이 많다. 향후 다른 유적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시도들이 축적되어, 이 편년 안이 보완되고 편년의 근거 또한 더욱 명확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The convex times at the edge of eaves in the Goryeo period were created largely by two methods. First, one chronological plan based on modifications of how to join them to plain roof tiles. Second, the other chronological plan to suggest changes in patterns by selecting foundation or remodeling convex tiles for building sites with remaining documents. There is no doubt that the convex tiles in the Goryeo period had been largely changed in that manner. The chronology plan subdividing the convex tiles created in the Goryoe period, however, still has many limits, since it has little grounds on which patterns at the periods of foundation or remodeling can be determined among a variety to convex tiles excavated from building sites which have existed for a long time and on which the certain pattern of a convex tile can be directly associated with its chronicle, given the similarity in patterns between convex tiles and dated craftworks, in spite of patterns characterized by the longer trend cycle. Above all, the most serious limit is derived from insufficient grounds of chronology, as there are little era named tiles among convex tiles created in the Goryeo era. The chronology plan for plain roof tiles created in the Goryeo period is, however, established around era named ones. This paper, therefore, attempts to chronologize such convex tiles, based on the chronology plan for the plain roof tiles. The targets include the remaining convex tiles jointed with plain roof tiles in Beopsusa Temple Site, Seongju at which a lot of convex tiles of the Goryeo period were excavated, and which the research actually observed. The convex tiles were initially tried to be chronologized according to the chronology plan for the plain roof tiles. Then, some convex tiles representing the similarity in patterns or manufacturing techniques of the chronologized convex tiles were further elucidated. The resulting chronology plan for the convex tiles of the Goryeo period, excavated from Beopsusa Temple Site, Seongju were established. This study has many limits in diachronically and synchronically comprehending the Goryeo period, since it is a chronological research on just single relic. The current chronology plan and its grounds are expected to be complemented and more specific, as further studies on other relics are accumulated.
서봉수 한국기와학회 2021 한국기와학보 Vol.3 No.-
본 글은 한강유역 출토 신라기와에 대한 고고학적 관찰을 통해 형식분류를 시도하고 이와 함께 구체적인 시기별 편년안을 마련한 후, 그 성격을 살펴보려 하였다. 이에, 한강유역의 중심 유적에서 출토된 신라기와 를 대상으로 하여 그 세부적 속성을 비교, 분석하였다. 대표유적 세 곳에서 출토된 기와를 집중 분석하고 그 외 한강유역의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를 비교 검토, 도출된 편년안을 적용하여 최종적으로는 신라기와 의 시공간적 개념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한강유역의 신라기와는 6세기 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 총 5시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 글의 주제에 해당하는 시기는 제 1기와 제 2기인데 제 1기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통일 이전까지 그 기반을 다지던 시기이고 제 2기는 7세기 중반에서 7세기 후반으로 통일을 전후 하여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통해 국가 지배체제의 틀을 구비해 나갔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토대로 해당 시기에 한강유역에서 유행한 기와 형식들을 정리하고 각각의 형식이 크게 유행한 시기와 함께 그 상한과 하한을 고려하여 제시하였다. 아무튼, 한강유역에서 기와가 출토되는 유적은 대부분 성곽유적에 해당하며 이들 유적들은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지역을 거점화하면서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구축해 나가면서 설치한 관부로 보았다. 곧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는 신라의 군현제 실시와 함께 관부가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는 적극적인 유물 인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성곽이면서도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 유적들도 수십 군데 존재하는데 대부분 보 루 형태이며 이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안정적 관부 설치 이전 단계의 전투 지휘체계에서 중심역할 을 하는 곳의 산하에 있는 야전 연합전선 체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고대 삼국은 문화적, 기술적으로 많은 부분을 교류를 통해 공유하였다. 물론, 각 국이 나름대 로의 문화를 전개하며 고유의 문화적 특수성을 발전시켜 나갔지만 그 저변에는 언어를 비롯하여 문화적 보 편성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고학적 연구 경향에서 개별 유구나 유물에서 나타나는 각국 고유의 문화적, 기술적 요소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삼국이 공유하였던 문화적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어 구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별적인 고고학적 요소를 국가적 또는 군사적 차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여 유적 또는 유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In this paper, archaeological observations of the Silla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Han River basin were made to classify the types and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rding chronologically plan by specific period. Hereby, the detailed properties of Silla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central remains of the Han River basin were compared and analyzed. The Roof-tiles excavated from three representative sites were analyzed, and the Roof-tiles excavated from other sites in the Han River basin were compared and reviewed, and the concept of time and space with the Silla Roof-tiles was finally summarized. As a result, the Silla Period in the Han River basin was divided into five periods from the early 6th century to the early 10th century. The first and second periods of this paper were the mid- 6th to early 7th centuries, when Silla entered the Han River basin and laid the foundation before reunification, and the second period was the mid-7th century. Based on these periods, the Roof-tiles types that were popular in the Han River basin during the period were organized and presented in consideration of the upper and lower limits along with the period when each type was very popular. In any case, most of the remains excavated from the Han River basin correspond to the remains of the fortress, which Silla established as it established a stable foundation for governance after entering the Han River basin. Soon, Roof-tiles excavated from these ruins are active relics that can be seen as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fice along with the implementation of Silla's military system. In comparison, dozens of Silla fortresses are located in the nation were not excavated, mostly in the form of bastions, which could be understood as field alliance systems under the control of the pre-stable government posts like Goguryeo and Baekje. In conclusion, the ancient three kingdoms shared many cultural and technological aspects through exchanges. Of course, each country developed its own culture and developed its own cultural specificity, but on the other hand, it shared cultural universality, including language. So far, it is important to identify cultural and technical elements unique to each country in archaeological research trends, but I think it is also necessary to find and distinguish cultural universal values shared by the three countries. In the process, some individual archaeological elements should be judg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national or military level and should be avoided defining the nature of the remains or relics.
김기민,박다정 한국기와학회 2022 한국기와학보 Vol.6 No.-
This thesis is a part of a study on plain roof tiles among the studies that comprehensively analyze a large number of tiles excavated through the excavation survey of "Changlim Temple Site". Given that existing reviews and studies have been focused on the common development pattern, this study is expected to help understand the disclosure of the reviews and culture of the Unified Silla Period to the Goryeo Dynasty in Gyeongju by identifying the limited space(Changlim Temple) evaluation and development process. As a result of the study, the development process with the plain roof tiles of Changlim Temple Site was set to a total of eight stages. The bottom layer of the excavated site is Stage 0, which is a sign of a limited period of time when roof tiles with characteristics after the 7th and 9th century are not mixed at all (pre-8th century to mid), Stage I is related to the early stages of the excavated building group (mid to late 8th century), Stage II is a stage that shows the general tile form of the early Goryeo Dynasty (first half to second half of the 9th century), Stage III is the stage where the Unified Silla a tile-making system is dissolved and the transition to the Roof Tile Production System during the Goryeo Dynasty is carried out (Early Goryeo), Stage Ⅳ is just before the appearance of the three-stage partition pattern, a typical tile style of the early Goryeo Dynasty(Early Goryeo), Stage Ⅴ is the stage where the three-stage compartment composite pattern plain roof tiles, which are typical of the Goryeo Dynasty, occupy the majority (mid-Goryeo period), Stage Ⅵ is a stage in which multi-level compartment composite patterns, triangular patterns, and rhombus patterns are the main characters (late Goryeo Dynasty), and stage Ⅶ is the stage in which only one piece of writing "李慶州" tiles from the 18th century is identified after Changlim Temple was closed. Changlim Temple Site's plain roof tiles and development characteristics include the sharp decline in the number of plain roof tiles in the Goryeo Dynasty, the low frequency of Eogolmun(herringbone pattern), which is representative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re is a point in that roof tiles for floors, which are known to have been made only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were produced and changed even in the early Goryeo Dynasty. 약본고는 “창림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다종 다량의 기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연구 중 평기와에 대한 부분이다. 기존의 평기와 연구가 통시적인 전개양상 규명에 집중되어 왔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창림사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의 평기와 전개과정을 규명함으로써 해당 시기 경주라고 하는 한정된 지역의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평기와 문화의 공시성을 이해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연구 결과, 창림사지 평기와의 전개 과정을 총 8단계로 설정하였다. 발굴조사된 유적 하층을 0단계- 7세기 및 9세기 이후의 특징을 가진 기와가 전혀 혼입되지 않은 한정된 시기의 표식적인 단계(8세기 전~중반), Ⅰ단계는 발굴조사된 건물군의 초창과 관련된 단계(8세기 중반~후반), Ⅱ단계는 나말여초기의 평기와 양상을 보이는 단계(9세기 전반~후반), Ⅲ단계는 통일신라 조와체제가 해체되고 고려시대 조와체제로 전이가 진행되는 단계(고려 초), Ⅳ단계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기와의 타날 문양인 3단 구획복합문이 등장하기 직전 단계(고려 전기), Ⅴ단계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평기와인 3단 구획복합문 타날 기와가 주체를 점하는 단계(고려 중기), Ⅵ단계는 다단구획복합문‧삼각집선문‧능형집선문 등이 주체를 이루는 단계(고려 후기), Ⅶ단계는 창림사지 폐사 이후인 18세기대 “李慶州”명 1점만 해당하는 단계이다.연구를 진행하면서 파악된 창림사지 평기와 전개의 특징으로 ①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평기와에 비해 고려시대 평기와의 수량이 급감한다는 점, ②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평기와 타날 문양인 어골문의 빈도가 매우 낮다는 점, ③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만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마루 축조용 기와가 고려 전기에도 제작 전통이 이어지고, 나름의 변화 과정을 보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양종현 한국기와학회 2020 한국기와학보 Vol.2 No.-
제주는 시대와 기록에 따라 탐라(耽羅)·탁라(乇羅)·탐모라(耽毛羅)·동영주(東瀛洲) 등으로 나타난다. 이제까지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제주에서 출토된 기와에 대해서는 대부분 삼별초(三別抄)의 이동과 관련 하여 다루어졌다. 고려시대 탐라기와의 계통은 개경과 강도(江都, 강화도)를 거쳐 제주로 유입된 강도계 (江都系)와 진도 용장산성을 거친 진도계(珍島系)로 구분하고 있다. 탐라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과 한반도 내륙, 그리고 일본과 교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세기 이 전, 탐라는 당·백제·신라·일본과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서 특별한 대립 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 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0세기 이후에는 원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고려와 원의 직접적인 관리가 이루어진 시기로서 기와에서도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초기기와는 고려시대에 시작하여 삼별초의 이동과 관련한 유적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으며, 자연스럽게 삼별초의 이동 경로에 따른 계통문제로 다루어져 온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주기와의 제작과 관련해서 기와장인이 삼별초와 함께 제주에 입거하였다는 설과 남해안 지역의 기와가 유입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중원지역과 경주지역에서도 제주기와와 유사한 문양구성을 보이는 사례가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제작기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주의 수막새 중 일부는 소지에 와범을 압날하여 시문 하는‘종치형(縱置形)압날식 시문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성형이 완료된 막새와 수키와를 접합하는 방법에서도 성형이 완료된 원통형의 수키와를 막새 뒷면에 부착하고 절반 정도를 절개하는‘원통접합후 분할기법’으로 제작된 특징이 있다. 원통접합후 분할기법은 한반도에서는 낙랑과 한성기 백제, 신라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이 기법으로 제작된 막새는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코시노하마폐사에서 출토된 막새는 제주에서 제작된 막새의 문양과 매우 유사하며, 제작기법 역시 원통 접합 후 분할기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막새는 윤청·장언 등 기타큐슈에 억류 중이던 신라인들이 9세 기에 정관대지진의 복구를 위해 이주한 지역에 위치하며, 이들의 기와제작기술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몇 가지 공통점을 근거로 한반도의 기와제작기술 또는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한반도와 일본, 그 리고 제주도의 기와 제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외교류를 통한 조 사와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Jeju is represented by Tamra(耽羅), Takra(乇羅), Tamora(耽毛羅), and Dongyeongju(東瀛洲), depending on the times and records. According to prior studies, most of the roof tiles excavated in Jeju were related to the movement of Sambyulcho(三別抄). During the Goryeo Dynasty, roof tile in Tamla line of descent is divided into Gangdo(江都), which flowed into Jeju via Gaegyeong and Ganghwado Island, and Jindo, which passed through Yongjangsanseong(龍藏山城) Fortress in Jindo. Tamra is believed to have engaged in exchanges with China, inland of the Korean Peninsula and Japan since early times. Prior to the 10th century, Tamra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Tang, Baekje, Silla, and Japan without any special confrontation. And after the 10th century, the direct management of Goryeo and Yuan Dynasty, including its relations with Yuan Dynasty, was carried out, and its influence can be seen in roof tiles. The early period of Jeju began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has been studied around the remains related to the movement of Sambyulcho, and naturally it has been dealt with as a systematic problem along the path of Sambyulcho. In general, there is a theory that tile artisans lived in Jeju with Sambyul Elementary School and roof tiles from the southern coast of Korea, but there are also cases where roof tiles similar to Jeju Flag are introduced in the Jungwon and Gyeongju areas of Gyeongju. The same is true of production techniques. It is understood that the method is found on the Korean Peninsula in Nakrang, Hanseong Baekje and Silla. At the same time, the mules produced with this technique can be found in Japan, and the mules excavated from the Koshinohamahaiji(腰浜廢寺) are very similar to those produced in Jeju, and the production technique also has something in common as a method of dividing after cylindrical bonding. This rodent is believed to have been located in the area where the Silla people, including Yun Cheng and Zhang Eon, who were detained in Kitakyushu, migrated to restore the Jeonggwan Earthquake in the 9th century, and most likely related to their tile-making technology. Of course, based on some common ground, it is hard to assert that the tile-making technology of the Korean Peninsula or its related figures directly influenced the tile-making of the Korean Peninsula, Japan and Jeju Island. However, I think it will be a clue to carry out research and research through foreign exchange.
조성윤 한국기와학회 2023 한국기와학보 Vol.7 No.-
This paper aims to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the production group of the early Silla rooftiles excavated from Yutongri rooftile kiln in Angangeup. It can be said that this kiln site has received attention from the scholars majoring in Silla rooftiles in two aspects. One is that Silla's oldest lotus-design convex roof-end tiles excavated here is similar to the convex roof-end tiles unearthed at Daetongsa Temple Site in Gongju, the ancient city of Baekje. Another reason is that it is located at about twenty Kilometers away from the royal capital of Silla. With the consideration of these two aspects, the research status of early Silla rooftiles excavated from the rooftile kiln sites of Yuktongri in Angangeup, Mulcheonri in Cheonbukmyeon, Hwagokri in Naenammyeon, and Heungryunsa Temple site in Sajeongdong of Gyeongju City has been reviewed. As a result,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 oldest Silla lotus-design convex roof-end tiles excavated from Yuktongri rooftile kiln site are the same lineage as the Ungjingi convex roof-end tile of Baekje area in terms of the pennon part pattern and the manufacturing technique. And this type of rooftile is being studied as the rooftiles for the construction of Heungnyunsa Temple Site. Along with these convex roof-end tiles, there are the roof-end tiles from Mulcheonri kiln site in Cheonbukmyeon and Hwagokri kiln site in Naenammyeon, which are studied as the oldest roof-end tiles of Silla. These are studied as made with an old style manufacturing technique that is less skilled than that for the roof-end tiles of Yuktongri kiln site in Angang, and it is being studied that they were made by a pottery craftsman who produced the Silla short mounted cups. The two aspects of the early Silla rooftile production technique were, namely, that Silla rooftiles were produced by the Silla earthenware craftsman, and that Silla rooftiles were made by the Baekje rooftile craftsman. Therefore, it is presumed that the tile-making group at Yutongri rooftile kiln of Angangeup was the rooftile craftsmen of Baekje, and that the reason why they had no choice but to stay away from Gyeongju is considered to be related to the martyrdom of Lee Chadon, a Buddhist official of King Beopheung. In other words, it is because the establishment of Heungryunsa Temple was based on collusion with the Buddhist community of Baekje rather than the political agreement of the Six-bu of Silla. 이 글은 신라초기 경주 안강읍 육통리 기와 가마의 성격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 가마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신라기와를 전공하는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아 왔다. 하나는 여기에서 출토된 신라 고식연화문수막새가 백제의 고도 공주 대통사지 등에서 출토되는 수막새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왕경에서 약 20km 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안강읍 육통리와요지, 천북면 물천리가마터, 내남면 화곡리가마터,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지 등에서 출토된 신라 초기기와 연구현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육통리와요지 출토 신라 고식연화문수막새는 드림부 문양과 제작기법적인 측면에서 백제지역의 웅진기 수막새와 동일계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기와는 신라 흥륜사지 창건기와로 연구되고 있다. 이들 수막새와 함께 신라 最古의 기와로 연구되는 천북면 물천리가마터, 내남면 화곡리가마터 고식연화문수막새가 있다. 이 수막새들은 안강 육통리와요지 수막새보다 미숙한 제작기법으로 생산된 것이며, 신라 단각고배를 제작하는 토기제작 공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 초기기와 제작기술은 두 가지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신라토기 공인에 의해 제작된 신라 초기기와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 웅진기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연화문수막새, 유단식 암막새와 유사한 신라 초기기와이다. 결국 안강읍 육통리와요지 신라 초기기와는 웅진기 백제기와와 관련이 깊고,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 등에 관해서는 향후 고고학 조사를 더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 황룡사지 출토 고려시대 마루장식기와에 대한 시론(試論)
유환성 한국기와학회 2024 한국기와학보 Vol.0 No.9
전국박물관 소장품검색에서 경주 황룡사지 출토 마루 장식기와와 관련하여, 153건 803점(치미: 76건 316점, 용두 및 잡상: 77건 487점)의 수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보고된 803점의 마루 장식기와편이 과연 어떠한 종류의 마루장식 기와였는지, 몇 점을 제외하고는 파악하기가 힘들다. 본고에서는 그나마 형태 파악이 가능한 마루 장식기와 27점을 선별하였다. 선별한 마루 장식기와는 국립경주박물관의 배려로 모두 실견하였고, 이를 토대로 치문(鴟吻) 6점, 용두형(龍頭形) 장식기와 10점, 장경용두형(長頸龍頭形) 장식기와 11점 등에 대하여 각각의 개념을 나름대로 정의한 후, 그 특징을 파악하였다. 그런 다음, 동 시기 불화, 동경, 청자, 금동삼존불감, 소형 청동 팔각탑 등의 비교자료와 타 유적에서 출토한 마루 장식기와류를 통해, 황룡사지 마루 장식기와의 시기는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었다. 추가로 고려시대 황룡사의 역사 및 고고학적 배경도 마루 장식기와 연대와 함께, 그 관련성을 따져 보았다. 그래서 다섯 가지 정도의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한 마루 장식기와는 11세기대가 다수이며, 이는 귀목문 막새의 출토량과 편년안을 기준으로 삼았다. 둘째, 치문의 경우 완형에 가까운 출토품(황룡3997-1, 황룡6811)을 통해 문헌에 보이는 치문의 실체를 황룡사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황룡사의 대형치미(황룡99)와 별개로, 황룡사가 존속했던 시기에 전각의 위용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와 자료로 판단된다. 셋째, 황룡사지에 출토한 마루 장식기와는 그 형태가 다양하지만, 모두 용의 모습을 띠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특히 추녀마루 위에 시설되었을 장식기와의 경우, 타 유적에서는 조형(鳥形), 장경용두형(長頸龍頭形), 용형(龍形), 괴수형(怪獸形)이 함께 출토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황룡사지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용만 확인되는 점이 특징적이다. 넷째, 완형에 가까운 장식기와(치문: 황룡6811, 용두형 장식기와 : 황룡2533, 장경용두형 장식기와; 황룡3558)는 고려시대 황룡사의 전각 지붕 가운데 마루 부분에 시설되었을 것이다. 이는 동 시기 고려불화, 동경, 금동유물에서 보이는 장식기와류와 함께, 당시 지붕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판단된다. 다섯째, 황룡사지에서 출토한 장식기와와 유사한 형태의 기와가 개성 고려궁성, 파주 혜음원지, 안성 봉업사지 등 고려시대 왕실 관련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이는 황룡사지가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국가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In the search of the collections of the National Museum, it is possible to find a quantity of 153 cases and 803 pieces (Chimi: 76 pieces and 316 pieces, and Dragon Head Roof Tiles and Roof tile-shaped shapes: 77 cases and 487 pieces) related to the floor decoration roof tiles excavated at the Hwangryong Temple in Gyeongju. However,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what kind of floor tiles the 803 pieces reported were, except for a few of them. In this article, I have selected 27 pieces of floor decorators whose shapes can be identified. The selected floor decoration roof tiles were all examined with the consideration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and based on this, 6 pieces of chimun (鴟吻), 10 pieces of Dragon Head Roof Tiles, and 11 pieces of Long-necked dragon head roof tiles were defined in their own way, and their characteristics were identified. Then, through comparative materials such as Buddhist paintings, bronze Mirror, Koryo Celadon, golden bronze triad Buddha statues, and small bronze octagonal pagodas from the same period, as well as floor tiles excavated from other sites, it was possible to know that the period of the floor decoration tiles of the Hwangryong Temple was the Goryeo period. In addition, the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background of Hwangryong Temple in the Goryeo period was also examined for its relevance, along with the date of the floor decorators. As a result, I was able to come up with about five meaningful outcomes. First, many of the floor decoration roof tiles excavated at the Hwangryong Temple in Gyeongju are from the 11th century, and gumockmoon-macksae is based on the amount of excavations and chronology. Second, in the case of the Chimu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reality of the Chimun as seen in the literature at the Hwangryong Temple through the excavated items (Hwangryong 3997-1, Hwangryong 6811) that are close to the complete form. Apart from the large chimi of the Hwangryong Temple (Hwangryong 99), it is judged to be an important Roof tile and document that shows the greatness of the hall during the period of the Hwangryong Temple existence. Third, the floor decoration roof tiles excavated at the Hwangryong Temple are in various shapes, but they all have the common feature of being in the shape of a dragon. In particular, in the case of decorative tiles that would have been installed on the floor of the Chunyeo, there are cases where bird shapes, long-necked dragon head, dragon shapes, and monster shapes have been unearthed together in other sites. However, it is characteristic that only the dragon with its mouth closed can be seen in the Hwangryong Temple. Fourth, the decorative roof-tiles that are close to the complete shape (Chimun: Hwangryong 6811, Dragon Head Roof Tiles: Hwangryong 2533, Long-necked dragon head roof tiles: Hwangryong 3558) would have been installed on the floor of the hall roof of the Hwangryong Temple in the Goryeo period. This, along with the decorative roof-tiles seen in Goryeo Buddhist paintings, bronze Mirror, and gilt-bronze relics of the same period, is considered to be an important material that can restore the appearance of the roof at that time. Fifth, tiles similar to the decorative tiles excavated at Hwangryong Temple have also been unearthed at Goryeo Palace, Paju Hyeumwonji, and Anseong Bongup Temple, among other royal relics of the Goryeo Dynasty. This shows that Hwangryong Temple was an important place managed by the state even during the Goryeo period.
조성윤 한국기와학회 2024 한국기와학보 Vol.0 No.9
이 글에서는 경주에서 출토된 ‘(己酉)’ 명 평기와, ‘丁巳習陵’ 명 암키와를 소개하였다. ‘(己酉)’ 명 평기와의 명문은 ‘(乙酉)’ 명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丁巳習陵’ 명 암키와의 명문은 판독에 문제가 없다. ‘(己酉)’ 명 평기와는 통일신라시대 평기와의 中板打捺技法으로 제작되어 있고, 백제의 고대도시에서 다수 출토되는 백제 干支명 기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여 삼국통일 후 70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丁巳習陵’ 명 암키와는 삼국통일 직후 신라 왕궁 내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는 이른바 新式短板打捺文樣 암키와와 유사하여 65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종류의 ‘(己酉)’, ‘丁巳習陵’ 명 간지명 기와는 신라 경주에서는 출토 예가 이 두 예뿐인 반면, 백제 고도인 공주‧부여는 물론이고 익산‧금산 등의 지방에서도 출토 예가 많은 것을 근거로 하여 백제 기와의 영향으로 보았다. 이런 백제기와의 신라 기와로의 영향은 신라초기 백제계 신라 연화문수막새에서도 찾을 수 있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백제 아비지 관련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기와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도 백제기와 제작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In this article, I introduced the ‘(己酉)’ and ‘丁巳習陵’ roof tile excavated from Gyeongju. The inscription on the ‘(己酉)’ roof tile can also be decoded under the ‘(乙酉)’ name. In contrast, the inscription on the name of ‘丁巳習陵’ roof tile has no problem in reading. The ‘(己酉)’ roof tile was made using the mid-plate paddle technique of the roof tile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and it was consider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Baekje roof tile, which was excavated in Baekje's ancient city, it was believed to have been produced in 709 after the reunification of the three countries. ‘丁巳習陵’ roof tile was considered to have been produced in 657, similar to the so-called New-style single-paneled pattern roof tile, which is believed to have been used only in the Silla palace in the late 7th century. These types of roof tiles named ‘(己酉)’ and ‘丁巳習陵’ roof tile were only two examples of excavations in Gyeongju, Silla, while Baekje roof tiles were considered to be the influence of Baekje roof tiles based on many examples of excavations in Baekje's ancient cities, Gongju and Buyeo, as well as Iksan and Geumsan. The influence of the Baekje period on Silla roof tiles can also be found in the early Baekje-Silla‘s lotus-design convex roof-end tiles, and it can also be found in records related to Baekje Abiji, which built a nine-story wooden tower at Hwangryongsa Temple. Therefore, it is understood that the Silla period was influenced by the Baekje period and production technology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Unified Silla period.
기와로 보는 일본의 지붕과 장엄-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역사적인 관계에서-
주홍규 한국기와학회 2024 한국기와학보 Vol.0 No.9
일본열도에서의 조와술(造瓦術)은 동북아시아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6C 말경에 백제에서 도입된 이후로, 고대(飛鳥時代-平安時代), 중세(鎌倉時代-室町時代), 근세(戦国時代-江戸時代), 근‧현대(明治時代-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역별‧시대별로 다양한 기와류를 제작해 지붕의 장엄함을 과시했다. 일본열도 내에서의 기와 제작은 각 지역과 시기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기와를 통한 토목기술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도시경관 및 세력권의 파악, 동북아시아의 문화 교류 및 전파 등을 확인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주목할 부분들이 많다. 본 연구는 일본기와의 종류 및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주의할 점들을 먼저 살펴본 후, 각각의 시대별로 일본의 역사와 결부된 막새기와, 귀면와, 치미 등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열도에서 요구되던 기와의 기능과 역할 및 한반도 기와와의 관련성을 통해, 자체 변화하는 조와술을 가진 일본 사회가 동북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일본의 기와는 그들만의 독자성을 가지는 한편으로, 많은 외래의 영향에 의한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기와의 문양적 속성이나 제작 기법상의 특징, 형태적인 특성 등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근세 이전까지 기와를 통해 일본 사회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 지배의 거점 지역이나 종교시설의 지붕을 장식해 그 장엄함을 드러내려 함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기와는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기와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외래의 조와술을 도입하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변화‧발전시켜 나갔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와를 생산하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교류의 형태와 내용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일본열도의 기와는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한‧일의 지붕을 장엄하게 한 기와에 대한 보다 충실한 이해와 새로운 역사 인식으로의 접근이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It was around the end of the 6th century that the technology of making roof tiles in the Japanese archipelago was introduced through Baekje, and it was relatively late in Northeast Asia. The Japanese showed off the majesty of the roof by producing a variety of roof tiles from the Asuka to the modern. There are differences in the making of roof tiles in each region and period in the Japanese archipelago. However, there are many areas to pay attention to because roof tiles are advantageous for confirming the development of civil engineering technology, urban landscape, and sphere of influence, cultural exchange and dissemination in Northeast Asia. In this study, the types and terms of Japanese tiles are first identified. After tha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changing patterns front roof tiles, Gyimyon tile and chimi that are linked to Japanese history in each period. Based on this, through the function and role of tiles in the Japanese archipelago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Korean Peninsula roof tiles, the position of Japanese society with the technology to make tiles that change themselves was identified in the history of Northeast Asia. Japanese roof tiles have their own characteristics, but they also went through a process of change due to many external influences. This aspect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characteristics of the pattern of the roof tile, the characteristics of the manufacturing technology,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shape for each period. However, what the Japanese wanted to pursue through roof tiles was to decorate the roof of the most powerful in each era and use it as a means to reveal the majesty. These Japanese roof tiles are closely related to the roof tiles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ancient times to modern times. The Japanese introduced tile-making skills, while changing and developing their own techniques, and came to produce their own new roof tiles. Although there are differences in the form and content of exchanges depending on the times, it can be seen that the roof tiles of the Japanese archipelago were directly or indirectly influenced by Goguryeo, Baekje, Silla, Goryeo, and Joseon. Through this study, I hope that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roof tiles that made the roofs of Korea and Japan majestic and an approach to new historical awareness will be possible.
정원혁 한국기와학회 2020 한국기와학보 Vol.1 No.-
본고는 삼국시대 신라 제와술이 시간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평기와에서 관찰되는 제작방법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공간적 범위로 설정한 경주지역은 한 국가가 수세기에 걸 쳐 점유하면서, 수도로써 유지된 지역으로 본고의 목적에 맞게 시간적인 변화양상을 확인하기 적합하다. 그리고 사용기간이 긴 기와의 특성을 염두하여, 수요지보다는 공급지의 성격을 보이는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범위에 속하는 평기와 속성을 토대로, 속성분석, 형식분류를 하고 제시 한 형식의 검증을 위해, 평기와와 공반하는 토기의 편년 안과 비교했다. 이를 통해 신라 평기와의 각 단계 를 설정하여, 각 시기별 특징을 서술했는데, 평기와 제작방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발전을 거듭한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6세기 전반부터 평기와가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기와제작도구 및 방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기존 에 이용되던 토기제작방법으로 기와를 제작한다. 6세기 후반·7세기 전반부터 기와제작도구 및 방법이 도 입되면서, 이전과 달리 체계화된 생산체계를 보인다. 특히, 점토판 소지가 도입되면서 기와의 규격화, 공 정의 분업화, 와장집단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중반부터는 전 단계에 도입되었던 기와제작방법에서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하여, 시간·인력·비용의 절감과 대량생산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특수기와는 사전에 다양한 형태의 도안을 마련하 여, 수요지에서 직접 제작·사용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신라 평기와가 발전됨에 따른 결과로써, 신라 제 와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Based on the previous research results that Silla's Plain Roof-Tile at Production Methods reflects time, this article examined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roduction methods observed in the Plain Roof-Tile section. The Gyeongju area, which has been set up as a spatial range, is an area maintained as a capital city, with centuries of occupation by a country, suitable for checking the temporal changes to suit the purpose of the home. Considering the characteristics of roof tiles with a long period of use, roof tiles excavated from historical sites show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supply area rather than the demand area were targeted. Based on the Plain Roof-Tile and properties within this range, for the purpose of property analysis, type classification and verification of the type presented, it was compared with the period classification plan of the earthenware that was in common with the Plain Roof-Tile. Through this process, each stage of the Silla Period was set up to describe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eriod, and it was confirmed that the Plain Roof-Tile and production methods continued to change and develop over time. Plain Roof-Tiles began to be produced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but they are not properly equipped with tile-making tools and methods, and earthenware-making methods are used to make Plain Roof-Tile. With the introduction of roof tile manufacturing tools and methods from the late 6th and early 7th centuries, the system of production is different from before. In particular, it is estimated that the introduction of clay plate affected the standardization of Plain Roof-Tile, division of process, and formation of artisanal tissue. By omitting unnecessary processes from the Plain Roof-Tile-making method, which had been introduced at all stages since the mid-7th century, it seems that the effect of reducing time, manpower, and cost and mass production was achieved. In addition, various types of designs were prepared in advance for special Roof-Tile that emerged from the mid-7th century, and were produced and used directly in the demand area. These phenomena are the result of the development of Silla's Plain Roof-Tile, which suggests that Silla's Roof-Tile Production Methods and made rapid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