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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의 동화론 「새로 開拓되는 童話에 關하야」에 대한 고찰 : 일본 타이쇼시대 동화이론과의 영향 관계
이정현(Yi Jung-hyun)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2008 아동청소년문학연구 Vol.- No.3
Bang Jung-hwan(1899-1931) is surely an indispensible writer when we look back on Korean Children’s Literature in 1920’s. Truly Bang Jung-hwan set up innumerous achievements. One of them was that he settled a genre called as a fairy tale in the modern age of Korea. In this sense this thesis will study on Bang Jung hwan’s theory of fairy tale, ‘About the Newly Developed Fairy Tale’. This thesis especially will contemplate on how Japanese writers, including theirfairy tale theory, their point of view on the fairy tale, and books about the theory of the fairy tale in Daishow Era, influenced on Bang Jung-hwan’s theory. Bang Jung-hwan went to Japan in 1920’s when children’s literatures in Japan blossomed most. In 1918 the magazine, ‘Akaitori’ was launched. From the year the fairy tale and children’s song movement as kind of Akaitori movement was in the period of the prosperity. It was the period all the magazines listing children’s song and fairy tales were sold well. Many works were written. And it proves studies on the children and fairy tales had become more active from Maysy. When Bang Jung-hwan wrote his theory, ‘About the Newly Developed Fairy Tale’, he was influenced by several Japanese writers and their works, which were Takagitosio’s Fairytale and Study(1916), Ogawa Mimei and Akita Wuzak’s theories about fairy tale in special July issue of Wasedabungaku in 1921, and Fairytale Study’s first edition 1922, 7) published in June of 1922. As a result of comparing and analyzing these texts with Bang Jung-hwan’s writing style, it became obvious that Ewaya Sazanami’s Otogibanasi and Szki Miekichi’s fairy tale were fused in Bang Jung-hwan’s work. Also Bang Jung-hwan was influenced by Takaki Tosio’s text, Ogawa Mimei and Akita Wuzak’s theories about fairy tale, and the periodical, ‘Study on Fairytale’. Mimei said , “Fairytale is not for only children but for all the people who have innocent mind.” And Wuzak said, “adult and children in their whole life become one through only fairytale world and there difference between the soul of adult and that of children disappears. We should write about the childlike characters in mankind.” Bang Jung-hwan made these two Japanese writers’ point of view about fairytale fused in his writing and he created his own point of view. Bang Jung-hwan’s theory was most detail and it is important in that it shows Bang Jung-hwan’s thought and knowledge about fairytale. It is regrettable that it was necessary to be influenced by Japanese children’s literature. But it is more important that there exists Bang Jung-hwan’s own point of view. Moreover he created his own style with his affection on children and the influence of the Chundo religion insisting all the human are created equal.
이정현 ( Jung Hyun Yi ) 건국대학교 동화와번역연구소(구 건국대학교 중원인문연구소) 2007 동화와 번역 Vol.13 No.-
방정환은 1921년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를 번역, 발표한 이후 계속해서 동화를 번역하여 발표하게 된다. 1922년 7월에는 『사랑의 선물』을 간행함과 동시에 『개벽』 7월호와 9월호에 2회에 걸쳐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 「호수의 여왕」을 번역하여 발표했다.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 중에는 「호수의 여왕」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아나톨 프랑스의 창작 동화로써 『세카이도우와호교쿠슈(世界童話寶玉集)』에 쿠스야마 마사오(楠山正雄)의 번역으로 실려 있다. 필자는 졸론 「방정환의 번역동화와 『모한가테이분코(模範家庭文庫)』에서 『사랑의 선물』의 다섯 번 째 동화 「한네레의 죽음」이 『세카이도우와호교쿠슈(世界童話寶玉集)』에 실려 있는 미즈타니 마사루(水谷勝)역 「한네레노 쇼우텐(ハンネレの昇天)」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한 것에 대해 논했다. 방정환은 「호수의 여왕」에도 「한네레의 죽음」과 같이 일본어 저본에 실려 있는 3점의 삽화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어, 「한네레의 죽음」의 번역에 연이어 「호수의 여왕」을 번역해 개벽에 실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삽화는 모두 오카모토 키이치(岡本歸一)의 그림으로 졸론 「방정환의 번역동화와『킨노후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본 논문은 쿠스야마역과 방정환역의 삽화의 비교 및 내용의 비교분석을 함으로써 쿠스야마역 「湖水の女王」을 방정환역의 저본임을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이 작업을 통해서 근대 한국에의 아나톨 프랑스의 수용에 있어서의 근대 일본의 아동문학의 영향에 대해서 고찰함과 동시에 방정환의 번역의 특징에 대해서도 고찰하고자 했다. 이상의 목적으로 고찰한 결과, 방정환의 번역동화 「호수의 여왕」의 저본에 있어서 삽화의 일치, 그리고 내용 면에서도 완역에 가깝게 충실히 번역되어 있는 것 등의 근거로 쿠스야마 마사오역 「湖水の女王」가 그 저본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필자는 쿠스야마가 사용한 저본이 아나톨 프랑스의 원작 "Abeille"가 아닌 앤드류 랑의 "The Story of Little King Loc"임도 확인했다. 방정환은 다만 쿠스야마가 제목까지 바꾸어 번역해 놓은 일본어역을 저본으로 번역을 했을 뿐이다. 내용면에서는 방정환이 1921년에 번역한 「왕자와 제비」를 결말 부분을 재화한 것과 1923년에 번역한 「성냥팔이 소녀」를 번역할 때 한국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번안한 것에 비해 등장 인물인 소인의 성격을 조금 바꾸어 묘사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완역에 가깝다. 그리고 문체의 면에서는 어린이를 생각하여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전문을 한글로 표기하여 한자는 괄호 안에 넣어서 표기하는 등의 배려가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 뿐 아니라 방정환의 동화에 전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으로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 초에 한국에 아나톨 프랑스의 이름과 그의 동화를 소개한 것에는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After Bang Jung-hwan translated and announced Oscar Wilde`s fairy tale "The Happy Prince" in 1921, he started to translate more fairy tales frequently. Bang Jung-hwan published Gift of Love on July, 1922, translated and announced Anatole France`s work "Queen of the Lake" over two times in Gebyuk, July issue and September issue at once. Among Anatole France`s work, title that is "Queen of the Lake" does not exist. But this title has created by Kusuyama in Sekaidowahogyokusyu which is a translation of Anatole France`s original fairy tale. The writer discussed that Bang Jung-hwan`s translation of a fairy tale and the 5th story of "Gift of Love" in Mohankayeibunko` were the origin of Mizutani Masaru a part of "Hannere`s Ascension". It is conjectured that Bang Jung-hwan used the same three illustrations in "Queen of the Lake" as same as "Hannere`s death" which are from original Japanese work, After translation of "Hannere`s death" he translated "Queen of the Lake" then announced in Gebyuk. All these illustrations created by Okamoto Kiichi, and it have mentioned already in Bang Jung-hwan`s translation of a fairy tale and Kinnohune, so it`s not mention in main contents. Also, I wished to investigate about that investigate about Anatole France`s effect of modern age Japanese juvenile literature in accommodation to modern age Korea through this work and at the same time Bang Jung-hwan`s characteristic of translation. Results investigating by purpose of singularity, queen of Bang Jung-hwan`s translation of a fairy tale "Queen of the Lake" that was translated nearly faithfully into complete version, and contents of illustration by Kusuyama Masao "Queen of the Lake" is an origin of Bang Jung-hwan`s translation. And the writer confirmed Bang Jung-hwan used Andrew Lang`s "The Story of Little King Loc" as an origin not from Anatole France`s original work "Abeille". Bang Jung-hwan used original work for the translation, instead of using direct Japanese translation which Kusuyama translated. It is almost complete translation except the end part of "The Happy Prince" that Bang Jung-hwan translated in 1921 and "The Little Match Girl" that translated in 1923 which is considered the circumstance at that time of Korea and changed the personality of the part in that story. Also, used full text in Hangul readably and put all the Chinese characters inside of parenthesis for the children. Commonly these characteristics are seen by visible characteristics in Bang Jung-hwan`s animation as well as this work. Finally, we can evaluate that it was large sense to introduce Anatole France`s name and his fairy tales in Korea in early 1920s.
김정택 ( Jung Taek Kim ) 한국분석심리학회 2011 心性硏究 Vol.26 No.1
본 논문에서는 무의식의 창조성이 종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 관이 오직 자아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부문만을 포함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무의식의 범위에는 억압된 내용뿐만 아니라 의식의 문턱값에 이르지 못한 모든 심리적 소재가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인간 정신 역시 전적으로 개별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집단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기에, 이러한 집단정신이 정신기능의 하부를 포괄하고 있고, 의식과 개인적 무의식은 정신기능의 상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았다. 무의식은 자기조절의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융은 다양한 임상경험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요구를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융은 무의식이 지닌 자율성으로 보았으며, 이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무의식이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꿈이나 환상을 통한 상(像)들은 풍성한 관념뿐 아니라 감정을 포함하는 모든 것이다. 무의식의 이러한 창조적인 상들이 인간이 본래의 자기(Self)를 찾아나가는 ‘개성화의 과정’을 도와주고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의식을 보상하는 무의식의 과정은 전체 정신의 자가조절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어 창조적인 방법으로 자율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융이 체험했던 종교란 바로 무의식의 창조성과 자율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집단의식의 상들이 의식을 사로잡아 형성된 ‘누미노줌’에 대한 숙고의 자세이며, 종파란 바로 이러한 상(像)들이 제의(ritual)나 의식으로 굳어져 신앙 공동체로 형성된 것이다. 융은 종교를 최고, 혹은 가장 강력한 가치와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러한 관계는 양면적, 즉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불수의적인 것이기도 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의 가치, 즉 어떤 에너지가 부하된 정신적 요소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힐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게 된다. 융은 인간 속에서 최대의 세력을 갖고 있는 압도하는 정신적 요소, 또는 그러한 심리학적 사실이 신(神)으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스위스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자신을 헌신적인 그리스도교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다가온 기독교는 지적(知的) 정직성도 부족했고 영적인 활력도 부족한 생명력이 사라진 습관적이고 관례적인 한 기관일 뿐이었다. 융은 12살 때 자신의 환상을 통해 만났던 극적인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무의식 안에 살아있는 신의 존재를 인식했기에, 일생을 통해 끊임없는 신학적인 질문과 삶 안에 얽혀있는 종교적 문제들과 대면했다. 이는 분명히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소생을 위한 융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이고 사랑이었음을 이 논문에서 밝혀보려 한다. The goal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connection between creativity of unconscious and religion. Jung criticized how Freud``s approach in studying the unconscious as a scientific inquiry focuses on the unconscious as reflecting only those which is repressed by the ego. Jung conceived of the unconscious as encompassing not only the repressed but also the variety of other psychic materials that have not reached the threshold of the consciousness in its range. Moreover, since human psyche is as individualistic as is a collective phenomenon, the collective psyche is thought to be pervasive at the bottom of the psychic functioning and the conscious and the personal unconscious comprising the upper level of the psychic functioning. Through clinical and personal experience, Jung had come to a realization that the unconscious has the self-regulatory function. The unconscious can make demands and also can retract its demands. Jung saw this as the autonomous function of the unconscious. And this autonomous unconscious creates, through dreams and fantasies, images that include an abundance of ideas and feelings. These creative images the unconscious produces assist and lead the individuation process which leads to the discovery of the Self. Because this unconscious process compensates the conscious ego, it has the necessary ingredients for self-regulation and can function in a creative and autonomous fashion. Jung saw religion as a special attitude of human psyche, which can be explained by careful and diligent observation about a dynamic being or action, which Rudolph Otto called the Numinosum. This kind of being or action does not get elicited by artificial or willful action. On the contrary, it takes a hold and dominates the human subject. Jung distinguished between religion and reli gious sector or denomination. He explained religious sector as reflecting the contents of sanctified and indoctrinated religious experiences. It is fixated in the complex organization of ritualized thoughts. And this ritualization gives rise to a system that is fixated. There is a clear goal in the religious sector to replace intellectual experiences with firmly established dogma and rituals. Religion as Jung experienced is the attitude of contemplation about Numinosum, which is formed by the images of the collective unconscious that is propelled by the creativity and autonomy of the unconscious. Religious sector is a religious community that is formed by these images that are ritualized. Jung saw religion as the relationship with the best or the uttermost value. And this relationship has a duality of being involuntary and reflecting free will. Therefore people can be influenced by one value, overcome with the unconscious being charged with psychic energy, or could accept it on a conscious level. Jung saw God as the dominating psychic element among humans or that psychic reality itself. Although Jung grew up in the atmosphere of the traditional Swiss reformed church, it does not seem that he considered himself to be a devoted Christian. To Jung, Christianity is a habitual, ritualized institution, which lacked vitality because it did not have the intellectual honesty or spiritual energy. However, Jung``s encounter with the dramatic religious experience at age 12 through hallucination led him to perceive the existence of living god in his unconscious. This is why the theological questions and religious problems in everyday life became Jung``s life-long interest. To this author, the reason why Jung delved into problems with religion has to do with his personal interest and love for the revival of the Christian church which had lost its spiritual vitality and depth and had become heavily ritualized.
孫貞姬 한국무용연구회 1982 한국무용연구 Vol.1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stablish a clear concept on “Dong-Ak-Jung-Jae” (Chinese music-styled court singing and dancing) by comparatively analyzing contents, forms and various elements of “HEON SUN DO” which belongs to “Dang-Ak-Jung-Jae” among traditional court dances, and also to examine the possibility of the revival of old court singing and dancing which has been handed down only through document, by resorting “Heon Sun Do” to it’s original form through reviewing of it’s general forms and characteristics. In the changing process and structure of “Goong-Joong-Jung-Jae” (court singing and dancing), it is considered that each work of court singing and dancing has a racial character rising above an unique expression of feeling, and oriental thought of philosophy of “Eum Yang Five Elements” dwells in the ceremonial procedures and framework itself, and that form of dance is characterized by it’s courtesy, slow tempo and it’s meaningful, free use. The “Goong-Joong- Jung-Jae” is classified into two parts of “Hyang-Ak-Jung-Jae” (Korean traditional music style) and “Dang-Ak-Jung-Jae” (Chinese music-styled singing and dancing). The contents of “Heon-Sun-Do”, a typical dance of “Dang-Ak-Jung-Jae are that Wang-Mo comes down from the fairy land to present the fairy land’s pcaches to the King to pray for long living of the King. In the form of dancing motion, the first KuHo of the ceremony is announced by 2 Bongjuk- Kanja (ceremony processors who are playing a role of guide for dancing), then stands facing inward each other. Then, 1 Kisaeng (youth or juniors are preferrable) gives fairy land's peach tray to Wang-Mo, and Wang-Mo faces westward, singing words of song in Chinese characters. Thus, all procedures for ceremony to announce the beginning of dance are just finished. Now, they start dancing in full scale. First, all of dancers return to their original form, performing various dances, such as “Sasu-Mu”, “SuboRock-Mu”, “Hyupsu-Mu”, etc, and singing words of other songs between some intervals of dancing. After that, facing forward, Bongjuk-Kanja announce “after-KuHo” by saluting that the dancing was finished, and all of dancers move backward. In the comparative analysis of music journal “Koryo-Sa-Ak-Chi”, “Ak-Hak-Kwe-Bom” and “Goong-Joong-Jung-Jae-Mu-Do-Hol-Gi” (at the end of Yi Dynasty), some music used for the subject dancing is found to be of the same name of melody (or tune) and some others are found to be of different name of tune. However, the details on the forms and contents of music are unknown, because it was not shown in old documents. Therefore, the forms and contents of music used depend upon common name and pen name which were established by the National Classical Music Institute. Moreover, “KuHo-Chio” and “Chio” of “Koryo-Sa-Ak-Chi” were divided into “before- KuHo" and “after-KuHo” since “Music Standard”, and the “Jakkan-Ja” announced it in such way, and sang it in the abridged form of contents. “Won-Mu” (dancing team consists of 3 dancers), 1 “Wang-Mo” (Sun-Mo shown in “Goong-Joong-Jung-Jae-Mu-Do-Hol-Gi”), 2 “Hyup- Mu”, and “Bongwi-Eui” consists of 18 members. Moreover, we can easily understand that costumes and ceremonial things for them are found to be the same one as in other “Jung-Jae” in most cases. However, many changes for dancing motion and forms had been made due to the contemporary performance situation, especially in it’s contents. Moreover, we are unable to compare such changes in detail because there are not records in documents for it. As commented above, it is well concluded that, some changes has been made for “Heon Sun Do” during the period from “Koryo-Dynasty” to “Chosun-Dynasty”, including changing of names, singing it in the abridged form of song words and changing of music, especially in con¬tents and forms. However, it is considered that “Heon-Sun-Do” is a typical “Dong-Ak-Jung-Jae” which preserves it’s original form without being much changed both in it’s contents and forms.
김홍중(Kim Hong Jung) 한국이론사회학회 2015 사회와 이론 Vol.27 No.-
이 논문은 한상진의 중민 이론을 후기 근대적 상황에 맞추어 성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 중민이론의 기본개념과 분석틀을 살펴보고, 사회이론으로서 중민이론이 갖는 특징을 ‘실천적비판이론’이라 명명한다. 이어서 중민 개념의 중요한 의미소인 ‘中’을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중민 이론이 양 극단의 중간에 대한 이론적 상상계 위에 서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중민 이론을 좀 더 발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나는 중민 의식 대신 중민심을 탐구할 것을 제안하고, 그것이 한국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특징짓는 생존주의를 초월하려는 집합적 심리로 구축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성찰적 노스탤지어의 감정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비판이론의 정서적 스탠스를 점검한다. This article attempts at reflecting on the Jung-min theory of Han Sang-Jin again in the context of late modern era. For this, I will examine basic concepts and frameworks of Jung-min theory, and by naming it praxeologico-critical theory, I try to reveal its strong points as social theory. I will also analyze the important semantic element of Jung-min theory which is the Jung(中) to show that Jung-min theory is established on the theoretical imaginary of communication. Finally I propose to explore the heart of the Jung-min instead of its consciousness, as a way of reconstructing Jung-min theory. And this will lead to the fact that Jung-min’s collective heart is oriented toward the transcendence of the survivalism which is fundamental tone of Korean modernity in terms of ethos of the people. Finally I will examine the reflective nostalgia, which would be the basic theoretical affect to reconstruct the Jung-min theory.
정혜진(Jung, Hyejin) 구보학회 2021 구보학보 Vol.- No.29
이 글은 체험·경험의 동일성(sameness)이 아닌 자매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규범적 이성애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을 페미니즘 의제로 구성한 고정희의 여성해방론을 고찰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고정희가 ‘여성 동일시’(woman-identify)를 여성해방 주체화의 전략으로 삼고, ‘정상 섹슈얼리티’ 규범을 문제화하는 주체로서 ‘독신자’를 여성해방의 역사에 위치시키는 장면에 주목한다. 고정희는 초기 시에서부터 독신자의 실존의 문제로 사랑·모성을 재론하며 여성 물화(reification)에 도전했다. 이는 ‘또 하나의 문화’와의 만남 이후, 1980년대 페미니즘의 ‘생물학적 본질주의 비판’을 매개로 하여 성별 이분법을 극복하는 페미니스트 실천으로 전개된다. 이를 통해 자매애는 이항 대립적 본질론과 차이의 중립화를 넘어, 존재의 다수성과 접속되는 집합으로서의 여성해방 주체의 원리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이념은 1990년대 초반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표현되었다. 고정희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향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섹슈얼리티 개념이 숙고되기 시작하면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재조명됐던 페미니스트 지성사와 관련된다. 고정희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및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구별되는 것으로 파악하며 ‘성의 혁명을 여성해방의 우선 과제로 삼는’ 운동으로 설명했다. 고정희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재생산/노동 문제로서의 성별분업 논의를 섹슈얼리티 의제로 전환하고, 이로써 헤테로 메일 쇼비니즘-자본주의라는 이분법적 성차 생산 체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념을 구성하는 또 다른 원리인 연대는 「외경읽기」 연작시 중 「다시 오월에 부르는 노래」에 잘 나타난다. 이 시는 1991년 5월 투쟁을 폄훼하는 노태우 정권, 박홍, 김지하 그리고 그 역사인 군부 파쇼정권과 대결하면서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5월 투쟁과 연대한다. 고정희는 5월 투쟁의 죽음에서 외경을 읽고 ‘정상성’을 심문하며 새로운 지평의 열림을 보고자 했다. 5월 투쟁과의 연대는 자본주의적 이분법의 생산과 여성 물화를 의제화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정상성’과의 불화와 연대하는 이념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연대의 원리는 페미니즘의 급진성을 ‘정상성’과의 불화로 구성한다. This article examines Go Jung-hee’s theory of women’s liberation. Go Jung-hee’s theory of women’s liberation seeks the possibility of sisterhood, not sameness of experience. And it constitutes a feminist agenda for criticism of normative heterosexuality. To this end, Go Jung-hee used “woman-identify” as a strategy for women’s liberation as a knowledge of internal division. And ‘single’ was positioned as the subject of women’s liberation that criticizes the ‘Normal sexuality’ norm. This ideology was expressed as ‘Radical Feminism’ in the early 1990s. Go Jung-hee’s Radical Feminism is related to the history of of sexuality concept contemplated in Korea from the late 1980s. At this time, Radical Feminism was re-examined. Go Jung-hee’s Radical Feminism was to transform the discussion of gendered division of labor into a sexuality agenda. As a result, criticizing “hetero mail showbinism- capitalism” as a “producing machine of sex difference” was the agenda of Go Jung-hee’s Radical Feminism. Solidarity, another principle that constitutes the ideology of Radical Feminism, appears in ‘Song of May again’. This poem is one of the serial poems of ‘Reading apocrypha’. reading apocrypha is an act of interrogating ‘Normality’. This poem practices reading the apocrypha in solidarity with “May Struggle” in 1991. It was a showdown with the Roh Tae-woo regime, Park Hong, and Kim Ji-ha, who disparaged “May Struggle” in 1991. Solidarity with “May Struggle” in 1991 shows that Go Jung-hee’s Radical Feminism is an ideology of solidarity with ‘disagreement with Normality’. This principle of solidarity constitutes the radicality of feminism as a ‘disagreement with Normality’.
신정아(Shin Jung-a) 동아인문학회 2019 동아인문학 Vol.46 No.-
어린이들을 바르게 기르고 가르쳐야 한다는 소파의 일관된 정신은 1920년 그가 일본에 유학한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방정환이 유학기간 동안 일본에서 받은 영향은 외국 작품을 번안하거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화구연을 한 것, 그리고 개벽사의 일을 도우면서 『어린이』지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 일본 아동문학의 중심인물인 이와야 사자나미(栗谷小波) 혹은 오가와 미메이(小川未明)와 사상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시 일본의 주요 잡지였던 『소년세계』(少年世界), 『아카이도리』(赤い鳥),『킨노후네』(金の船)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유인즉 방정환의 어린이문학교육은 독립을 향한 의지와 투철한 민족주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번안 작품집 『사랑의 선물』과 소년운동의 실천적 모체인『어린이』지에 선별된 작품은 식민지 상황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민족의 고통을 동반한 그의 작품은, 식민지 시대를 사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우선시했다. 특히, 어른에게 구박을 받거나 매를 맞는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는데,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를 동정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작품을 읽히는데 주력했다. 이것은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성립되기도 한다. 약자와 강자로 정리되는 관계는 시대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Cheondoky`s council for children was established by Kim, Ki-joen, Bang, Jung-hwan, and Lee, Jung-jo on May 1st, 1921 but Bang, Jung-hwan was studying abroad at that time, not involving directly in it. Bang, Jung-hwan was responsible for tasks as a special correspondent in Tokyo for Kaebyeok, a comprehensive magazine which had been established in June, 1920, and for building Tokyo branch of Cheondokyo"s council for youth(Feb 13th, 2921)(Yeom, Hee-kyoung, 78). Since then, he organized Saekdongheo(Coloring Council) with other Korean students who shared his thought, and held the opening ceremony. In addition, early editing for the magazine, Children(Eorinyi) was made in Tokyo. So the Japanese influences on Bang, Jung-hwan during his study in Japan truly affected Korean modern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There have been quite many studies about the Japanese influences on the modern Korean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These studies are dominated with the evaluation that key role of Ywaya Sazanami(hereinafter Sazanami), the father of Japanese children`s literature with regard to the Japanese influences on modern Korean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However, in-depth analysis, Bang, Jung-hwan`s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was derived from hope of salvation for Korean people to recover Korean sovereignty lost by Japan during Japanese colonial times, having clear difference from Japanese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Therefore, this study, focusing on Korean modern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and the Japanese influences on it, aims at analyzing its truth, and reviewing Bang, Jung-hwan`s idea on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through Gift of Love and the magazine, Children(Eorinyi). It is expected that it will be valuable study for building more accurate recognition about Bang, Jung-hwan`s children`s literature education.
장정희(Jang, Jung-hee) 한국근대문학회 2015 한국근대문학연구 Vol.16 No.2
이 논문은 방정환의 초기 소설 「流帆」(흘러가는 돛)이 지닌 문학사적 위치를 진단하고 재평가를 시도한 연구이다. 「유범」은 『개벽』창간호에 ‘목성’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파 방정환의 소설이다. 본고는 1919년 3 · 1운동 이후, 이를 소재로 취한 최초의 항일 저항소설로서 방정환의 소설「유범」을 재평가하였다. 이 소설은 표층적으로는 연애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학생들의 비밀결사 활동과 3 · 1 만세운동과 관련된 서사를 은닉시키고 ‘독립’에 대한 서사 욕망을 뚜렷하게 부조해 낸다. 본고는 방정환의 소설 「유범」에 내포된 항일 저항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 ‘서사 공간’과 ‘서사 전략’의 측면을 나누어 분석하였다. ‘서사 공간’에서는 일제에 의해 삭제된 ‘4행’의 시편에 내포된 ‘독립’ 기표화의 전략과 소설의 무대가 된 인상산 ‘곱은성’의 지리학적 상상력에 대해 논의하였다. ‘서사 전략’의 측면에서는 「유범」에 나타난 은어의 양상을 검열 제도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소설에서 제시되고 있는 ‘오후 2시’ 기표를 ‘3 · 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하던 시점과 결부하여 해석하였다. 은어의 사용, 생략적 대화, 시간 축약, 공간 암시, 지시 대상의 생략 등 「유범」의서술 기법을 분석하였다. This study makes a diagnosis of the literary position that「Yoo-bum」(a flowing sail), Bang Jung Hwan"s early fiction has. And this study attempts to revalue it.「Yoo-bum」was the only fiction that the first issue of『Gae-byuk』 contained. It was also the first work of fiction that was dealt with of students" secret society activities and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since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It was published under a pseudonym of "Moksung’(the shepherd of stars), when the publication was made. So this work did not become well known as Bang Jung Hwan"s fiction in the history of general literature. In the mean time,「Yoo-bum」, Bang Jung Hwan"s fiction has been studied on the level of "a love story" several times. But the resistant elements to Japan of this fiction has actually been ignored. In fact, this fiction was equipped with the narrative that internalized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Lots of works have been produced in large quantities since Korea"s emancipation. However, the status of the korean literature history of this fiction is unrivaled in terms of nerrativizing those themes in the censorship of Japanese imperialism since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Most of all,「Yoo-bum」was also the only writing that cinematized the word of "independence" for the polling booth in the middle of going through the whole of the first issue of『Gae-byuk』. Having views on these points, this study analyzes how Bang Jung Hwan internalized his narrative desire of "Bang Jung Hwan(an intellectual as well as a young man at that time)"s independence" in his fiction「Yoo-bum」. This study analyzes the implied narrative techniques such as the use of jargon, an elliptical talk, time short, omission of the subject to instructions which 「Yoo-bum」practically used while it stood against the system of the censorship of Japanese imperialism. And this study illuminates the literary value of「Yoo-bum」 as the first anti-Japan fiction resistance since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On discussing these things, this study examines the organic relevance between the preparation process of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Bang Jung Hwan"s experiential narrative in terms of a cultural history.
‘헤테로토피아’적 지성, 90년대 시적 주체의한 갈래(1) -장정일을 중심으로
김정현(Kim Jung-Hyun) 한국현대소설학회 2022 현대소설연구 Vol.- No.87
This study has a big point of discussion about the authenticity and indefinableness of 90s literature. Under this point of view, this paper discussed Jang Jung-ils intelligence behind ‘sincerity that destroys sincerity’. The core of Jang Jung-ils poem is the masochistic text composition method. Behind this masochistic poetic narrator, the self-consciousness of the poetic subject is implicitly mediated. This symptomatic and symptomatic utterance(écriture) is an important constituent principle in Jang Jung-ils poem. Jang Jung-ils thorough artistic self-consciousness, which tried to reveal his fundamental desires only as signs and surpluses without departing from the principle of producing text, is considered to be the culmination of individuality and internality produced by the 1990s. The desire of the poetic subject, which is revealed only by traces and surpluses in the text, actually corresponds to his efforts in intellectual literature. For Jang Jung-il, the allegorical images of ‘Burning Book’ and ‘death’ show how the poetic subject created his poem through intelligence as a result. Jang Jung-il maintained his literary style and ‘arrogant’ despite the chaos of the 1990s. Jang Jung-ils ‘language’ aspect and peculiarity are the origins of contemporary Korean poet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ulti-layered aspects of authenticity in the 1990s along with the research on Yu Ha.
박중국(Park, Jung-kuk) 중앙문화재연구원 2012 중앙고고연구 Vol.0 No.11
중부지역의 원삼국문화는 소위 ‘中島類型文化’로 대표된다. 박순발에 의해 제창된 중 도유형문화란 경질무문토기ㆍ타날문토기ㆍ회흑색무문양토기의 공반, ‘呂(凸)’자형 주거지, 즙석식 적석묘 등의 요소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한성백제의 기층문화이자 濊系집단의 고고학적 문화로 이해된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연구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현재까지도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조사의 폭증으로 인해 중부지역의 고고학적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확인되면서 기존 중도유형문화의 틀로는 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중도유형문화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중도유형문화를 재검토하여 그 개념을 재정립하고, 기존에 간과해왔던 중부지역의 지역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중도유형문화’라는 용어는 ‘중도 문화’로 대체하고 그 의미를 대폭 수정하여 ‘경질무문토기ㆍ타날문토기가 공반되는 ‘呂’ 자형 주거지의 공통분포권’으로 정리하였다. 그 시간적인 범위는 원삼국기부터 백제 한 성기까지이며, 공간적 범위는 중부지역에서 서해안 일대와 안성천유역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중도문화를 구성하는 토기-주거지-분묘는 서로 대등한 요소가 아니라 다른 공간적 위계를 가진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여 大-中-小지역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지역 구분을 시도해 보았다. 大지역권은 주거지의 爐시설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쪽구들 주거지가 주로 분포 하는 서울ㆍ경기지역과 노지 주거지가 주로 분포하는 영서지역과 영동지역으로 대별되는데, 이는 각각 韓濊의 생활양식이 투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中지역권은 수계와 지형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며, 서울ㆍ경기지역은 북부와 남부, 영서지역은 북한강유역과 남한강유역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영동지역은 해당되지 않는다. 경기북부지역은 원삼국기에서 백제 한성기로 이행하면서 취락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이 확인되며, 경기남부지역은 반대로 취락규모가 확대되는 경향이 관찰된다. 북한강유역에 는 낙랑계유물의 빈도가 높게 확인되는 반면, 남한강유역에는 낙랑계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지역차의 배경으로는 경기지역의 경우 백제와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영서지역의 경우는 낙랑과의 교역망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小지역권은 현재 적석분구묘를 기준으로 추출할 수 있으며, 이는 원삼국기의 강력한 소국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중 서울의 송파구 일대는 伯濟國, 연천지역은 臣 濆 沽國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론하였다. The notion of Jung-do cultural assemblage, which claims that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in central Korea as the association of specific types of potteries, dwellings and burials, has been widely accepted for a long time. However, as last 20 years of excavation much revealed new archaeological data, the argument shows clear limitation and loosing its power of explanation. This thesis aims to have a critical review on the Jung-do cultural assemblage first, and then redefine Jung-do archeological culture through detailed analysis of potteries, dwellings and burial types. The analysis shows that the ‘呂’-shaped dwellings, associated with hard plain pottery and beating patterned pottery, that widely distributed in central Korea, now are defined as new features of redefined Jung-do archeological culture. However, it was also noticed that there are regional variations, like heating system types of the dwellings – east and west part of central Korea. This seems to reflect different lifestyle, likely ethnic difference. Even more, the burial types showed clear differences among regions – it might be a signal of the growth of regional polities, and/or the result of their ‘peer polity inter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