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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세기 충청 지역 소론계 서원과 魯岡書院

        홍제연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2 민족문화논총 Vol.81 No.-

        魯岡書院은 충청도 니산(노성) ‘尼山’은 신라때부터의 지명으로, 조선에 들어와 尼山縣이 되었고 1800년에 魯城縣으로 바뀌었다. 이 글에서는 ‘니산’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에 세거하던 파평윤씨가의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을 제향한 서원으로 1675년 범 서인계가 윤황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을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1600년대 후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윤증이 소론계를 주도하게 되자 노강서원은 소론의 首院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정계의 주도권을 노론이 잡게 되면서 노강서원은 점차 파평윤씨와 니산 사족들의 활동 공간으로 위축되어 갔다. 노강서원 건립 후 충청지역 곳곳에 우계 성혼의 학맥을 이은 사족들에 의해 소론계 서원이 건립되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윤증, 崔錫鼎, 南九萬, 李世龜, 趙克善 등 당대 소론계 명유들이 머물며 재지사족에게 영향을 끼친 곳, 노소분열 이전 영남계(북인 남인) 사족의 존재가 확인되는 곳이란 공통점이 있다. 즉, 애초에 서인 일색의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계를 장악한 노론이 충청지역 서원에 영향력을 강화하며 정치색이 없는 서원까지 포섭해 비노론계 서원을 압박하자 소론 서원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니산 인근에 노론 서원이 경쟁적으로 세워졌고, 청주와 진천에서는 향전이 벌어졌으며, 제향인의 관작 추탈・철액 논의 등 정치적 견제 속에서 점차 약화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노강서원이 명맥을 유지하며 고종 대에 대대적인 서원 훼철까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파평윤씨가에서 자제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계속해서 관료를 배출함으로서 중앙정계 내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소론의 수원이라는 상징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모든 소론계 서원은 훼철을 피할 수 없었다.

      • KCI등재
      • 충남의 내포문화권 개발과 역사문화 콘텐츠의 활용 : ‘충남 문화유산 콘텐츠 활성화 사업’과 관련하여

        홍제연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5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 Vol.2015 No.1

        조선시대 충청도는 홍주목과 공주목을 중심으로 한 충청우도와 청주목 충주목 관할 군현의 충청좌도로 편제되어 있었다. 충청우도와 좌도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해 왔다. 조선시대 주로 충청우도였던 지역이 지금의 충청남도로 편제되었는데 충청남도 내에서도 문화권이 존재한다. 서해에 접해있는 내포문화권과 내륙의 금강문화권이 그것이다. ‘내포’나 ‘금강’이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지칭하던 지리적 상징어였고, 현대에 들어와 해당 지역의 문화권을 대표하는 용어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 충남에서는 내포문화권, 백제문화권, 금강문화권, 유교문화권 등으로 지역 문화권을 구분하여 그 안에서 지역 정체성을 찾고 문화산업 부분에서 활용도를 높이고자 다양한 문화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그중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은 1994년~2010년까지 15년간 성과를 거두었고, 내포문화권 개발사업은 200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유교문화권은 2014년도에 처음으로 국비 지원을 받아 기본계획 수립 단계에 와 있다. 또한, 2014년부터 ‘충남 문화유산콘텐츠 활성화 사업’이 진행중이다. 이 사업은 문화권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산업에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순도 높은 원형소재를 확보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DB구축이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원형콘텐츠의 DB구축 사업과 문화권 개발사업이 연계할 수 있도록 개발 대상 문화유산의 유형화와 주제별, 지역별 분류 방안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내포’라는 지역 문화의 특징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내포문화권개발사업 대상 역사문화자원은 약 50여건이다.

      • KCI등재

        여말선초 錦山지역의 재지세력과 신진사대부의 정착

        홍제연 전북사학회 2018 전북사학 Vol.0 No.52

        이 글은 고려말의 지방 토착세력이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과 관련하여 경제적 기반 마련, 유교문화의 실천과 관직 진출, 장거리 혼인을 통한 이거 양상 등을 살펴 본 사례 연구이다. 13~14세기 정치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며 왕조교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지방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의 분화와 함께 본관지를 떠나 정착한 사족의 지역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지방 사족은 관개수리가 용이하고 개간 가능성이 높은 하천의 중상류지역을 차지하고, 이미 개발이 된 향, 소, 부곡 및 폐현 등의 공간을 선점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앙으로 진출, 요직을 거치며 인적 교류를 넓히고 유력한 인물과의 혼인을 통해 그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여갔다. 전라도 전주부 소속 금산군의 경우 전주부의 17개 군현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밭의 비율(60%)이 높은 산간지대이면서 인구가 많았고, 충청도 경상도 등과 접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고려말의 행정 상황을 볼때 금산군의 영역은 무주와 진안 일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표적인 토착성씨인 금산김씨, 금계한씨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또한 그와 같았다. 이들 성씨는 금산의 읍치와 폐현(부리), 제원역, 安城所 등, 금강이 상류지역이며 특수행정구역이 설치되었던 곳에 기반을 두어 경제력을 확보했다. 금산의 토착성씨와 혼인으로 입향하는 무송윤씨(윤택), 해평길씨(길재), 경주이씨(이유태) 등은 모두 자신들의 본관지로부터 먼 거리의 금산으로 이주해 동족촌락의 초기 형태를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조선 초부터 유교의례를 실천하고, 유명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조선후기까지 영향을 미쳐 금산의 선진적 유교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This is a case study on local noble families in the Late Period of the Goryo Dynasty and the process of expanding influence, focusing on their establishing economic bases, practicing Confucian culture, entering government service, and migration patterns through long-distance marriage. In the 13th and 14th centuries when political and social unrest deepened with the change of dynasty, there began the differentiation of the privileged class and the regionalization of noble families settling down from their originated land. During this time, they captured river sites of the middle and upper reaches where they could make easy irrigation and get high possibility of land reclamation, and preoccupied spaces already developed in abolished prefectures or special residential districts called ‘Hyang’ and ‘Bugok.’ With this economic power, they entered the political arena and hold important positions to widen personal exchanges. In addition, they had marriages with the influential to establish a firm foothold. In case of Geumsan-gun in Jeonju-bu Jeolla-do, it was, out of the 17 counties and prefectures in Jeonju-bu, a mountainous and densely populated area, where the grainfield was in high proportion. It also was a very important geographical area in contact with the Chungcheong-do and Gyeongsang-do. In the late Goryo period, the territory of Geumsan-gun was located in the areas of Muju and Jinan, and it was the same range as the influence of Geumsan Kim and Geumgye Han which were representative local families. These families secured economic power by basing on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s and the upper reaches of the Geum River, such as the ruling place(Eupchi) and abolished prefectures in Geumsan, Jewon Station, Anseong-so, etc. In common, families like Musong Yoon(Yoon-taek), Haepyeong Gil(Gil-jae), and Gyeongju Yi(Yi-yutae) marrying with local families of Geumsan moved to Geumsan a far distance away from their originated land, shaping the early form of the family village. They practiced the rituals of Confucianism and also produced famous Confucian scholars from the early years of the Chosun Dynasty. This had an influence until Latter Period Chosun Dynasty, and provided a background for Geumsan’s advanced Confucian culture.

      • KCI등재

        충청지역 서원의 복설 추이와 성격

        홍제연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3 민족문화논총 Vol.85 No.-

        충청지역은 1914년 이후 수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와 전라도 일부가폐합되며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등으로 편제되었다. 본 고에서는 현재 이 네 개 광역시도에 존재하는 서원 사우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서원 관련 관찬기록에는 이 지역에 107개소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고 이중 44개가 사액받았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한 원사는 이보다 많았다. 서원훼철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각 지역의훼철대상 서원 목록은 기존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던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인조대 이후 서원 설립을 규제하며 숙종, 영조, 고종대에 대규모 서원 훼철이 이어졌고, 충청지역에 남은 서원은 5개소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조치 이후국내에서 가장 먼저 복설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청주의 화양서원이다. 훼철된지 불과 3년만인 1874년에 전국 각도의 유생이 일제히 화양서원 복설 요구 상소를 올리며 훼철령이 잘못되었음을 확인받고 복설의 명분을 얻으려 하였으나, 끝내 불허되었다. 화양서원은 그 상징성으로 인해 복설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보은 상현서원은 고위 관료였던 제향인의 후손이 재건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제 지역 유림들은 각 서원 터에 단을 설치하거나 서당, 사서, 누정 등을 활용해 제향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1910년 이전 서원 건물을 다시 지은 곳도 8개소에 달하였다. 1910년 일제의 식민통치로 조선의 전통이 단절되면서 문중과 지역 유림은그저 제향 공간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서원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충청지역에 22개소가 복설되었는데 그중 3개만 옛 충청좌도(현 충청북도) 지역이다. 이 시기에는 새롭게 창건된 서원도 등장했다. 대부분 문중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충무공 이순신 등을 제향하는 아산 현충사는 언론사의 복설 운동으로 전 국민이 성금을 모아 재건한 특별한 사례이다. 광복 이후에는 많은 서원이 다시 세워지는데, 이중 조선시대에 훼철된 연혁을 가진 것은 44개소 정도가 된다. 한국전쟁 후 10년 단위로 약 10여개의서원이 꾸준하게 복원되고 있다. 옛 서원의 이름을 그대로 살렸지만 제향 인물이 달라진 경우도 있고, 부조묘, 영당 등으로 존재했던 제향시설이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워지는 것도 확인된다. 최근에는 지자체에서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성역화 사업을 벌이거나, 문화관광 시설로 활용하는 경향이다. This study is about the aspects of demolition and reconstruction of Seowon that currently exists in the Chungcheong region(South Chungcheong Province, North Chungcheong Province, Daejeon Metropolitan City, and Sejong Special City). In the materials related to Seowon created by the government during the Choseon Dynasty, it is recorded that there were 107 Seowons and Confucius in the Chungcheong region, and 44 of them received Saek(賜額). However, looking at the records created during the policy of abolishing seowon , it was foun d that there were man y more seowon . After the reign of King Injo, the establishment of Confucian academies was regulated,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demolished on a large scale during the reigns of Sukjong, Yeongjo, and Gojong, leaving only five Seowons in the Chungcheong region. Afterwards, the first discussion in Korea took place demanding the restoration of Hwayang Seowon in Cheongju. It was 1874, just three years after it was demolished. However, due to the symbolism of Hwayang Seowon, the state did not allow its reproduction. Now, the Con fucian class just wan ted a space to worship their an cestors. They just build a Dan(壇, altar) or held Ancestaral Rites in pavilion or seodang. Additionally, 8 rebuilding of previous seowon can check in 1910.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wenty-two seowons were rebuilt, and new seowons also appeared. In most cases, it was created under the initiative of the family. Uniquely, the ‘Asan Hyeonchungsa’ dedicated to Admiral Yi Sun-Shin(李舜⾂), was re-opened by the press through a campaign to re-open it. After liberation, Forty-Four seowons were reestablished. However, it was not reproduced in its original form. Recently, there is a tendency for local governments to designate Seowon as a cultural asset or carry out a project to transform it into a sanctuary and use it as a tourist fac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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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세기 충청 지역 소론계 서원과 魯岡書院

        홍제연(Je Yeon Hong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2 민족문화논총 Vol.81 No.-

        魯岡書院은 충청도 니산(노성)1에 세거하던 파평윤씨가의 尹煌, 尹文擧, 尹 宣擧, 尹拯을 제향한 서원으로 1675년 범 서인계가 윤황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을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1600년대 후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윤증이 소론계를 주도하게 되자 노강서원은 소론의 首院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정계의 주도권을 노론이 잡게 되면서 노강서원은 점차 파평윤씨와 니산 사족들의 활동 공간으로 위축되어 갔다. 노강서원 건립 후 충청지역 곳곳에 우계 성혼의 학맥을 이은 사족들에 의해 소론계 서원이 건립되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윤증, 崔錫鼎, 南九萬, 李世 龜, 趙克善 등 당대 소론계 명유들이 머물며 재지사족에게 영향을 끼친 곳, 노소분열 이전 영남계(북인 남인) 사족의 존재가 확인되는 곳이란 공통점이 있다. 즉, 애초에 서인 일색의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계를 장악한 노론이 충청지역 서원에 영향력을 강화하며 정치색이 없는 서원까지 포섭해 비노론계 서원을 압박하자 소론 서원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니산 인근에 노론 서원이 경쟁적으로 세워졌고, 청주와 진천에서는 향전이 벌어졌으며, 제향인의 관작 추탈・철액 논의 등 정치적견제 속에서 점차 약화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노강서원이 명맥을 유지하며 고종 대에 대대적인 서원 훼철까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파평윤씨가에서 자제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계속해서관료를 배출함으로서 중앙정계 내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소론의 수원이라는상징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모든 소론계 서원은 훼철을 피할 수 없었다. Chungcheong-do is a place where Yulgok and Ugye schools dominate among the schools of Confucianism. Those who studied in the two groups belonged to the Seoin party. Seoin was seriously opposed after the the Noron-Soron Divergence in the late 17th century, and Seowon became the site of conflict in each region. Before 1800, 107 seowon Confucian academies in Chungcheong Province were built. Among them, there were only 11 Soron Confucian academies, and most of them were Noron Confucian academies. As Noron took the lead mainly in the central political world, Soron-line Seowon was in a difficult situation. It was also the subject of discussions on the abolition of Seowon, and Hyangjeon(鄕戰) took place. Nogangseowon Confucian Academy Altogether in Noseong, Chungcheong-do was established by SeoIn-line in 1675. Noseong Papyeong Yoon is celebrating a distinguished scholar of the Nojong faction. Since Yun Jeung, a native of this family, became the leader of Soron after the Noron-Soron Divergence, Nogangseowon Confucian Academy also became the source of Soron-sided Seowon. Therefore, Nogangseowon Confucian Academy was the strongest target of check for Noron. Nogangseowon Confucian Academy remained a symbol of Soron-sided Seowon until the end despite several crises caused by political pressure. This is because Papyeong Yoon Clan has established a strong support base for Nogangseowon by educating their descendants through Nogangseowon for more than 200 years and raising disciples to produce high-ranking of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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