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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주변지역 지원사업의 실적과 계획 - 지원금 대폭 증액, 다양한 사업 신설
이인복 한국원자력산업회의 1996 원자력산업 Vol.16 No.2
발전소주변지역 지원사업은 발전소주변지역의 개발을 지원하여 지역사회와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지역이기주의의 심화 등으로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신규발전소 건설입지를 적기에 확보하고 원전 등 기존 발전소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국전력공사에서 90년부터 시행하여 왔다. 특히 95년에는 지원법을 획기적으로 개정하여 지원금 규모를 전기판매 수입금의 0.5$\%$ 이내에서 0.8$\%$ 이내로 대폭 증액시켰다. 또 사업내용도 다양화하여 종전에 시행해 오던 소득증대사업$\cdot$공공시설사업 및 육성사업 외에 원자력발전소주변지역에 대한 전기요금 보조, 주민복지지원 융자, 기업유치 융자 및 발전소 건설지역에 대한 특별지원사업 등을 추가로 시행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90년부터 시행한 지원사업실적과 96년도 지원사업계획을 중심으로 발전소주변지역 지원사업의 내용을 살펴본다.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관직 활동과 서원 복설 건의
이인복 대구사학회 2024 대구사학 Vol.157 No.-
이만도(李晩燾, 1842~1910)는 이황의 후손으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1910년 한일합병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한 인물이다. 이만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낙향한 이후의 구국활동과 자정순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순국의 배경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그의 가계와 학문적 배경, 관직생활 등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다. 한편 이만도의 경세론에 대한 연구는 이를 살필 수 있는 사료가 적은 편이라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이만도는 생부인 이휘준과 족형 이만각(李晩慤), 처가의 권승하와 권연하(權璉夏)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만도의 학문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만각이다. 이만각은 조부 이태순(李泰淳)과 외숙인 유치명(柳致明)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문장과 시는 이야순(李野淳1)과 이가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이만도는 권승하와 권연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승하와 권연하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벌(權橃)의 후손으로 유치명의 문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만도의 학문적인 배경으로 퇴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학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각이나 권연하 등 이만도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준 이들이 대부분 유치명의 문인인 것으로 보아 유치명과 정재학파의 학문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876년(고종 13) 이만도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주로 역임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홍문관 관원으로서 재임한 것이 가장 많다. 이에 이만도는 고종 초기 경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만도는 주로 맹자 를 진강하였으며, 소대에서는 자치통감 을 진강하였다. 이만도가 강조하는 것은 군주의 중요성, 그리고 정학(正學)이었다. 즉 맹자 에 따라 요순의 도가 인의(仁義)에 지나지 않으며, 위에서 인의를 좋아하여야 아래에서 인의를 좋아함을 언급하면서 국왕의 역할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비판하면서 유학을 숭상하고 정도(正道)를 중시하여 선왕의 옛 법도를 회복하여 객사(客邪, 동학)가 침범하지 말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만도는 사술(邪術)을 배척하기 위해서는 정학(正學)을 숭상해야 하고, 정학을 숭상하기 위해서는 유현을 존숭해야 하고 유현을 존숭하기 위해서는 훼철한 서원을 복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원을 없애게 되면 인의와 도덕의 설을 들을 곳이 없어져서 결국 사설(邪說)에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만도는 사설(邪說)에 빠지는 것은 곧 객병(客病), 객사(客邪)가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동학(東學)을 말한다. 당시 유학자들은 유학에서 말하는 정(正)과 사(邪)의 논리에 따라 동학을 사(邪)로 규정하였으며, 동학이 지닌 기복적 요소에 미신적 요소 등을 비판하였다. 이만도 역시 당시 경북지역 유학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보여주며, 동학을 저지하기 위해서 서원의 복설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Yi, Man-Do(李晩燾, 1842~1910) is a descendant of Yi, Hwang(李滉), a scholar and bureaucrat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nd a person who committed suicide by fasting against the Korean-Japanese Consolidation in 1910. Most of the research on it is focused on activities and independence movements after quitting government life and returning to his hometown. In addition, in the process of examining the background of suicide for the country, his family, academic background, and office life are being dealt with. On the other hand, research on his response to reality has not been conducted because there is little data to examine it. He studied mathematics with his father, Lee Hui-jun, and his relatives, Yi, Man-gak(李晩慤, 1815`1874), and Kwon Seung-ha of his wife's family. Among them, Yi, Man-gak influenced Yi, Man-do's studies. Although the academic background of Lee Man-do emphasizes the sadism that continues from Toegye, most of the people who influenced Lee Man-gak and Kwon Yeon-ha were literary figures of Yoo Chi-myung(柳致明), so they must have been influenced by the Confucian name and Jeong Jae-hak. He mainly served as a government official of the Ministry of Social Affairs, Saganwon, and Hongmungwan, and among them, he served as a government official of Hongmungwan. As a result, Lee Man-do was able to participate in the early competition of King Gojong. He mainly lectured on 孟子 and 資治通鑑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role of the king, mentioning that Yo, Soon(堯舜)'s Do(道) is nothing more than human righteousness, as the contents of 孟子 , and that he likes human righteousness only when he likes human righteousness above. He said that in order to defeat Sasul(邪術), we must worship Jeonghak(正學), and in order to worship Jeonghak(正學), we must respect Yoohyeon(儒賢), and in order to respect Yoohyeon(儒賢), we must Restoration for Seowon(書院). It was said that if the Seowon was removed, there would be no place to listen to the theories of humanity and morality, and eventually fall into an editorial, soon Donghak(東學). At that time, Confucian scholars defined Donghak(東學) as private, and criticized the undulating and superstitious elements of Donghak(東學). He also showed a perception that was not very different from that of Confucian scholars in Gyeongsangdo(慶尙道) at the time, and said that it was important to review the Confucian academy to prevent Donghak(東學).
이인복 한국원자력산업회의 1997 원자력산업 Vol.17 No.2
90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한국전력공사의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 사업이 사업 시행 8년째를 맞았다. 그간의 사업 시행 결과 발전소 주변 지역의 복지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특히 도로 시설$\cdot$복지 회관 등의 공공 시설 확충과 육영 사업은 지역 주미의 호응 속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소득 증대 사업의 집중 지원과 아울러 특별 사업, 사업 자금 융자 등으로 지역 주민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97년 지원 규모는 793억원으로 계획되어 있으나, 97년 1월 13일 지원법 개정으로 지원 규모가 전기 판매 수익금의 1.12$\%$로 확대됨에 따라, 현재 추진중인 지원법 시행령이 개정되면 연간 1,100억원 수준으로 대폭 확대될 전망이다.
이인복 한국국학진흥원 2022 국학연구 Vol.- No.47
홍호는 상주지역 출신의 영남 남인으로 벼슬이 대사간에 이른 관료이며, 홍귀달의 후손이다. 홍호의 집안은 홍귀달 대에서부터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고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호의 아버지인 홍덕록 역시 강직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강직한 내력은 홍호와 홍여하에게도 이어졌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다 말하고 절의를 강조하였다. 홍호는 이러한 강직함으로 광해군대 이이첨의 아들이었던 이대엽이 실력이 부족한데도 과거에 합격하자 승문원에 배정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인조대 초반에 박승종을 적몰한 것에 대해 부당함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조대 초반 박승종의 가산을 적몰한 것에 대해 부당함을 제기한 것은 인조반정 직후의 분위기에서 어려운 것이었다. 홍호는 대신의 신분으로 국왕인 광해군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스스로 자살을 한 박승종에 대해 국왕에 대한 대신의 의리를 다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조반정 직후 김류, 이귀, 이서 등이 박승종을 이이첨과는 다르게 처벌해야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박승종, 박자흥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고 가사와 전민을 몰수하였다. 이후 박승종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으나, 홍호가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결국 홍호의 의견은 사심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영변판관에 제수되는 것으로 끝맺었지만, 이후에도 홍호는 박승종 적몰이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한편 홍호의 관력을 살펴보면 외직으로 영변판관, 구성판관, 안음현감, 흥해군수 등의 지방관을 두루 경험하였으며, 내직에서는 주로 병조와 관련된 일을 많이 맡아보았다. 또한 이괄의 난 때에는 경상도검찰사 정경세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으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시양의 군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홍호는 평안도와 경상도의 방어정책에 관한 내용이나, 성책의 축조, 첨방군 문제, 포수의 양성 등 군사와 관련한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다. 대부분 의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서북방 지휘관이나 비변사 등도 모두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책의 축조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기에 조정에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홍호는 영변판관으로 자신의 권한 내에서 성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Hong Ho洪鎬(1586~1646) is a Yeongnam male from Sangju, a government official who reached the post of ambassador, and a descendant of Hong Gwi-dal. Hong Ho's family was evaluated by Hong Gwi-dal as being upright without giving in to unjust power. Hong Deok-rok, Hong Ho's father, was also upright and said what he thought was right without hesitation and was not afraid of other people's views or evaluations. The family's upright history also led to Hong Ho and Hong Yeo-ha, and they emphasized courtesy after saying everything they thought was right. With this rigidity, Hong Ho opposed Lee Dae-yeop, the son of Lee Yi-cheom of Gwanghae Army, to be assigned to Seungmunwon when he passed the examination in the past, and appealed for unfairness in the early days of King Injo's reign. Looking at Hong-ho's sensitivity, he experienced a wide range of local views, and he was mainly in charge of a lot of work related to the military-related tasks. In addition, during Yi Gwal's rebellion, he was in charge of collecting and managing the military as a worker of Gyeongsang-do prosecutor Jeong Gyeong-se, and during the Jeongmyo War, he belonged to the army of Gyeongsang-do observer Kim Si-yang and fought a war. For this reason, Hong Ho expressed many opinions on military affairs, such as the construction of state policies, the issue of the armed forces, and the training of catchers, as well as the contents of defense policies in Pyeongan-do and Gyeongsang-do. Most of the opinions were not accepted, but they were all agreed upon by the commander of the northwest and the non-speech. Among them, the construction of the holy book was difficult to accept even in the court because it required large-scale manpower, but the castle was also renovated within its own autho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