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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Yi, Kisung) 한국상고사학회 2018 한국상고사학보 Vol.99 No.-
본 논문은 한반도에서 고고학 조사가 시작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고고학에 대한 연구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에서 고고학 연구가 시작된 지 일제강점기를 포함한다면 100년 이상, 해방 이후부터로 보아도 70여년의 시간이 흘렀으며, 지금까지 2,000여개소 이상의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고, 1,000여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금석병용기의 개념의 폐기,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구분, 초기철기시대의 설정 등 고고학 연구의 대전제가 되는 시대구분이 이루어졌으며, 유물과 묘제 중심 연구에서 점차 사회상, 취락, 생업 경제에 대한 연구로 변해왔다. 해방 이후 청동기시대 및 초기철기시대 연구의 흐름에서 획기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대학 박물관협회 발족과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개설(1961년), 『한국고고학개설』 발간(1973년), 송국리유적의 발굴(1975년), 신고고학의 수용(1980년대), 발굴 법인의 설립(1994년), 청동기시대 조기의 설정(2000년), 한국청동기학회 발족(2007) 등을 들 수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 흐름을 편의상 10년 단위로 나누어, 해방 이후 50년대의 고고학, 196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여명기), 1970년대의 고고학(정리의 시대), 198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활성화), 1990년대의 고고학(연구대상의 전환), 200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확장)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기별 연구의 현황을 정리하였다. 그와 더불어 북한고고학의 연구 현황과 문제점도 검토하였다. This paper summarizes the stream of archaeological studies on the Bronze Age and the Early Iron Age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hen the archaeological surveys began on the Korean Peninsula. At least 100 years includ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or at least 70 years exclud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as passed since the beginning of archaeological studies in Korea and more than 2,000 Bronze Age and early Iron Age remains accounting for approximately 20% of all remains excavated were surveyed thus far. In the meantime, more than 1,000 study results were published and the tendency of studies has been changing little by little over time. In the 1980s, studies of relics and burial systems began to rapidly increase and from the beginning of the 1990s, studies of settlements, subsistence economy, and social aspects were remarkable. As the rapid quantitative growth of excavation investigations has been gradually changed into qualitative growth of archaeology since the 2000s, now, the stream of studies thus far should be scholastic-historically reviewed to organize basic data to determine the perspective to view the Bronze Age and the Early Iron Age hereafter. In this paper, the stream of studies thus far was divided by times into prehistoric archaeolog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rchaeology in the 1950s after the liberation, archaeology in the 1960s (the dawning of studies), archaeology in the 1970s (age of organization), archaeology in the 1980s (activation of studies), archaeology in the 1990s (from the bronze tools to the pottery), and archaeology in the 2000s (from quantitative growth to qualitative growth) and the statuses of studies by time were summarized. In addition, the present situation of North Korean archaeology was reviewed.
문화사적 시기 구분으로의 무문토기시대 조기 설정 재검토
이기성(Yi, Kisung) 한국상고사학회 2012 한국상고사학보 Vol.76 No.-
2000년대 초반 무문토기시대 조기가 설정된 이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무문토기시대 시기 구분에 있어 조기는 거의 정설처럼 인용되고 있다. 안재호에 의해 제기된 조기 설정론이 무문토기시대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학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획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또한 조기 설정론이 점차 확장되는 과정에서 돌대문토기를 비롯한 청동기시대 이른 단계의 유물상, 지역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무문토기시대 연구에 있어 매우 큰 성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새로운 토기 형식의 설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기의 설정, 더욱이 기존에 전혀 논의되지 못하였던 신석기시대에서 무문토기시대로의 전환기에 해당되는 조기의 설정이라는, 한반도 선사문화 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시기 구분의 의미 등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조기 연구가 점차 확산되는 과정에서 조기는 당초의 개념에서 점차 멀어져, 단순히 청동기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라는 형식학적 분류에 기반한 편년 체계로 한정되는 경향을 보이며, 결국 조기 설정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의미였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기의 과도기로서의 의미는 점차 흐려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에서 어떻게 조기의 개념이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조기 설정의 타당성과 문제점에 대해 검토하고, 문화사적 시기 구분이라는 측면에서 조기가 아닌 전기로 포괄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The Incipient Mumun model which is raised in the early 2000s has important implications in the history of Korean Archeology and in the process of expansion of Incipient Mumun model, the aspects of remains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has been known. But, not simply fixing the new pottery type, despite of the new division of new period which means transition period between Neolithic and the Bronze Age, The fundamental concepts of the Incipient Mumun model is not argued until now. In the progressing of research for Mumun pottery, meaning of incipient period as transition period has gradually disappeared and just simply means very early period of Bronze age which based on pottery typology. The archaeological aspects of recent survey results, unlike the first expectations, Doldaemun pottery did now show the transition aspects of material culture and Incipient Mumun model does not have the historic-cultural meaning anymore. In this article. I argue that Doldaemun Pottery and the other artifacts which are considered as Incipient Mumun until now, have to be seen as not transition period but Early Mumun Period.
한국고고학 형성기에 대한 비판적 검토-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
이기성(Yi, Kisung) 한국상고사학회 2017 한국상고사학보 Vol.97 No.-
한국인에 의한 한국고고학의 시작은 흔히 해방 이후부터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고적조사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의 소개(疏開)로 인한 고고학 연구자의 부재, 미군정기, 남북분단, 6·25 전쟁 등, 연이은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학문적 배경이 전혀 없었던 한국고고학의 시작은 파행적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50~60년대를 한국고고학의 ‘형성기’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2010년대 들어와 일제강점기의 고고학에 대해서는 다방면에서의 정리와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1950~60년대의 초기 한국고고학에 대한 학사적 검토는 그리 많지 않으며, 각 시대별 연구사 정리에서 간단하게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것은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 고고학의 그림자에서 시작해 1970년대 본격적인 학문의 시대로 접어들기까지의 애매한 시점으로, 어떠한 식으로도 평가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950~60년대의 고고학은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떠한 조사도 ‘해방 이후 최초’ 또는 ‘한국인에 의한첫 번째’ 등의 수식어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일제강점기 고고학과 차별되는 한국고고학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인력과 예산도 없었으며 고고학의 작은 성과마저 일반인에게 홍보되거나 국사 교육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전공자의 부재와 유물 중심의 연구경향은 고고학이 미술사학과 분리되지 않은 채 시작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1950~60년대 한국고고학의 위치와 특징을 검토하였다. Apart from a debate on whether Japanese-led archeological research of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should be seen as part of Korean archeology, it is evident that indigenous Korean archeology took off after independence. However, amid the aftermath of the independence, ruling by US military government, and the Korean war, its beginning was uneven and erratic, lacking academic background and completely severed from earlier research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n this sense, it might not be suitable to refer to 1950s through 1960s as a “formative period”for Korean archaeology. Since 2010, diversified efforts have been made to reassess Korean archaeology conducte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n comparison, there have been few academic reviews over the period of 1950s through 1960s, except for what is covered in a list of archaeological research by time periods. Korean archaeology during this time is hard to assess, suspended between the shadow of Japanese-led archaeology and a full-fledged academic approach that did not begin until the 1970s. Archaeological research during the period of 1950s through 1960s has been dubbed as ‘the first in the post-independence period’ or ‘the first conducted by a Korean researcher.’ However, their achievements were not enough to form the foundation and identity of Korean archaeology that can be set apart from earlier research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re were the shortcomings of researchers and research budget, and findings from research were hardly promoted to the public or reflected in teaching Korean history at schools. Also, the research focus on historic relics blurred the boundary between archaeology and art history, and this inclination held for a long time.
이기성(Yi, Kisung) 한국상고사학회 2018 한국상고사학보 Vol.100 No.-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고고학 조사는 식민지, 위임통치, 조차지 등 당시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이러한 고고학 조사는 기본적으로 식민지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기초 조사의 일환으로 실시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일본인에 의한 고고학 조사가 그 지역의 첫 고고학 연구 활동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고고학 조사는 일본과 직접적인 역사적 관련이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구분되며, 조사의 내용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일본의 선사·고대 문화를 증명하는 보조 자료의 확보와 그것을 통한 식민 사관의 확립이 고고학 조사의 주된 목적이었다면 대만에서의 조사는 대만 원주민에 대한 기초 조사 그리고 관동주, 만주 지역에서의 조사는 대륙으로의 일본 진출과 궤를 같이하는 사전 조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 활동의 배경 에는 당시 일본 내에서 자유로운 발굴 및 연구 활동이 어려웠던 일본 고고학계의 상황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근거로 제국주의와 고고학을 분리해서 평가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각 지역에서 어떠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일본고고학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 일본 고고학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평가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Archeological survey by Japanese imperialism were conducted in all areas of Japanese influence at that time, including colonies, mandate governments, and leased territories. That survey was carried out as part of a basic survey for the effective control of colonies, and archeological survey by Japanese were the first archeological research activities in most areas. Archeological survey by Japanese imperialism is divided into regions that have a direct historical relationship with Japan and those that do not, and the contents of investigations vary widely between them. In the case of colonial Joseon, the main purpose of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was to acquire supporting materials to prove Japanese prehistoric and ancient cultures and establish colonial view of history through them. On the other hand, the investigations in Taiwan were based on the basic survey on native people in Taiwan, and the investigations in the Kwantung Leased Territory and Manchuria were preliminary investigations to prepare for the advancement of Japan into the continent. In the background of these archaeological activities, there was a situation where Japanese archaeologists could not freely perform excavation and research activities in Japan at that time. At present in the Japanese archeological community, there is a tendency to separately evaluate imperialism and archaeology based on the social situation of the time. This study examined what types of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were conducted in each reg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how they are related to and evaluated in the current Japanese archeology.
부여 송국리유적 세계유산 등재과정의 문제점과 추진 방향
이기성(Yi, Kisung) 호서고고학회 2021 호서고고학 Vol.- No.50
부여 송국리유적은 한국의 중서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지난 40여년간 26차 이상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에서는 100여 기 이상의 집자리, 수혈, 방어시설, 무덤, 목주열 등이 확인되어 당시 도작 농경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청동기 시대 대규모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수의 고인돌, 석관묘 유적 등이 위치하고 있어 청동기시대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여 송국리유적으로 대표되는‘송국리문화’는 멀리 일본까지 전파되어 일본 야요이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세계 유산의 기본적 전제 조건인‘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국리유적의 범위와 전모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개별 구성 요소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 주변유적의 조사가 미비한 점 등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 조사, 학술연구, 홍보, 지역주민과 연계된 활동 등이 필요하다. 단기간의 발굴조사, 정비 복원만을 통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은 무리한 작업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송국리유적과 부여군내 선사유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국내외로 널리 알리는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라는 목표점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송국리유적의 체계적이고 일관된 조사, 보존, 활용이 이루어지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부여 송국리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과정에서의 문제점에 대한 검토는 이후 선사시대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Located in the mid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Songguk-ri Site in Buyeo-gun is the most prominent historic site in Korea from the Bronze Age. Since its discovery in 1974, more than 26 seasons of excavation have been conducted for the recent four decades. Through the excavations, more than 100 items of pit dwelling, defense facility, tombs, and rows of wooden poles have been discovered, and they portray a life in a large village based on rice farming. The site is surrounded by many dolmen and remains of stone tombs, which describe a Bronze Age society. The Songguk-ri culture traveled as far as Japan, playing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Yayoi culture in Japan. These meet a basic prerequisite of world heritage, that is, outstanding universal value. However, some elements are lacking to qualify the site as world heritage, including that the full scale and scope of the Songguk-ri Site have yet to be identified,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many individual elements of the site remain unclear, and the investigation of the surrounding site is in an incipient stage. At least 10 years of steady investigations, academic research, promotion and activities engaging community residents are needed. Short-term excavation, refurbishment and restoration efforts alone are insufficient to qualify the site as world heritage. The most important task is to elucidate historical value of the Songguk-ri Site and other prehistoric remains in Buyeo-gun in diverse methods, and promote the findings at both home and abroad. More emphasis should be put on ensuring systematic and consistent investigation of the Songguk-ri Site as well as thei20r restoration and utilization with a clear goal of establishing the site as world heritage. This calls for a mid-to-long-term planning regarding archeological and local community activities carried out in Buyeo-gun.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자료 공개의 향후 사업 방향에 대한 제언
이기성 ( Yi Kisung ) 국립중앙박물관 2022 고고학지 Vol.28 No.-
The National Museum of Korea’s various projects related to the arrangement and release of a vast amount of material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 its long-term strenuous efforts are very significan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s projects have been focused on the disclosure of materials thus far, whereas its future projects should place an emphasis on making its disclosed materials more easily accessible for more researchers and moving toward the research of historical remain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or modern times. In this paper, the present status of release and utiliza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s material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outlined from a perspective outside the museum, and the following recommendations were provided for the future directions of the museum’s projects. ○Understanding an overall picture of the museum’s projects on historical remain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 the diachronic and comprehensive arrangement of documents and glass plates ○Summarization of projects on the investigation of historical remains in North Korea ○Release and translation of documents from the Museum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the provision of reference data ○Arrangement and research of materials in the field of ‘repair and restoration of historic remains and ancient buildings’ in collaboration with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Pursuit of its focus on projects for historical remains in the modern era of East Asia through joint research with overseas institutions The research of projects on historical remain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s not limited to academic studies in archaeology, art history, and architectural history. It can provide major materials in a range of fields spanning modern history and the return of cultural assets, and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should be positioned at the center of this research.
이기성(Yi, Kisung)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 한국학 Vol.47 No.3
청동기시대를 이해하는 여러 시각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청동기시대는 위계화된 사회이며, 많은 고고학적 증거, 예를 들어 취락 내 주거지의 규모 및 출토 유물의 차이, 무덤의 규모와 부장품의 차이 등은 그러한 사회적 위계를 반영한다고 보는 인식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청동기시대 사회는 종적인 위계질서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며, 다양한 방식의 횡적인 연계가 동시에 존재했을 것이고 이러한 다양한 관계는 어떠한 방식이든 물질 자료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계 개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유형의 군집묘를 검토했다. 그 결과 종적인 위계 구분 없이, 아마도 출자의 차이를 반영하는 두 가지 형식의 무덤이 합장되어 있는 횡적 연계가 확인되는 사례, 석관묘와 석개토광묘가 동일한 위계에 있으면서 횡적 연계를 기준으로 선택적으로 축조된 무덤 형식으로 볼 수 있는 사례, 종적 위계보다 횡적 연계가 우선시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례, 매장 자세의 차이를 횡적 연계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사례 등, 종적 위계 외에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군집묘 등을 확인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많은 추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무덤 피장자의 생물학적ㆍ사회적 정보를 얻기 어려운 청동기시대 무덤의 특성상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를 종적으로 서열화되고 위계화된 사회로 규정짓는 시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 종적 위계와 횡적 연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혼계의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청동기시대를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There are various viewpoints for understanding the Bronze Age, with the most common perspective being that it is a hierarchical society. This interpretation is evidenced by many archaeological facts, such as differences in the sizes of settlements, excavated artifacts, tomb sizes, and grave goods within a village. Many studies have been conducted to date based on this assumption, significantly advancing our overall understanding of Bronze Age society. However, it is unlikely that the Bronze Age society was solely composed of vertical hierarchies; various types of horizontal connections likely existed at the same time and should be reflected in the material data in some way. This study reviewed a wide range of group grave types based on the concept of heterarchy, identifying many cases of group graves that reflected diverse social relationships besides vertical hierarchy. In one case, two types of tombs, possibly reflecting differences in origin, were buried together, confirming a horizontal linkage. In another case, a stone coffin tomb and a stone pit tomb were selectively built based on horizontal linkage, while belonging within the same hierarchy. Still another case showed horizontal linkage taking priority over vertical hierarchy. Additionally, there was a case where differences in burial posture reflected a horizontal connection. Admittedly, this interpretation is based on several assumptions, and the study has fundamental limitations due to the nature of Bronze Age tombs, where obtaining biological and social information about the tomb occupants is difficult. Nevertheless, considering that previous studies defined the Bronze Age as a vertically ranked hierarchical society, this study is significant for its attempt to interpret Bronze Age society using the concept of heterarchy, where vertical hierarchies and horizontal linkages are composed in diverse ways. The study holds significance for understanding more comprehensively not just Korea’s Bronze Age but also for prehistory more generally.
이기성(Yi Kisung) 한국상고사학회 2008 한국상고사학보 Vol.59 No.-
일본 죠몽·야요이 전환기의 석기 연구에 대해서는 기존에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개별적인 특징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죠몽시대의 석기에 대륙계 마제석기의 추가로서 그 변화 양상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해, 일본의 킨키지역을 대상으로 죠몽·야요이 전환기에 있어서 석기변화의 전체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우선 일본 전환기의 석기 연구사를 검토하고 전환기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문화 요소의 구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킨키지역을 지형에 따라 5 지역으로 구분하여, 죠몽시대 후기·만기와 야요이시대 전기·중기의 유적을 대상으로 석기의 변화 양상을 검토한 후, 석기를 용도별로 구분하여 각 석기군의 비율 변화를 확인하여 각 석기군의 구체적인 변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킨키지방 전환기에 있어 석기의 변화는 그 내용에 있어 기종의 소멸·지속·등장과 각 석기군에 있어 추가·대체, 또한 석재의 사용에 있어서 기존의 석재사용, 죠몽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석재의 사용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Until now, there are several studies about stone tools in transition from Jomon period to Yayoi period in Japan. But most of previous studies, they treat individual features or explain simply as addition of continental polished stone tools on Jomon stone tool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understand the change of stone tools in transition in Kinki area as a whole. First of all, I explain the past studies about stone tools in transition era and division of cultural elements in Yayoi period. And I examine the aspect of stone tools change from late and final Jomon to early and middle Yayoi in Kinki area which is divided in five regions. The stone tools are classified as functional category and I examine proportion of categories and concrete aspect of change. As a result, I found stone tools change in transition from Jomon to Yayoi in Kinki cannot be briefly explained as addition of continental polished stone tools. In the change, there are various aspects, such as extinction, continuance, appearance of stone tools and addition, alternation in the categories and use of established stone sources or use of new stone sources from the point of stone sources. It could be said that stone tools change in transition era in Kinki area, Japan, is complex and has various aspe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