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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문화 수용의 역사적·문화적 제네시스 : 포섭과 배제의 정치

        윤대식 ( Youn Dae Shik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7 동양문화연구 Vol.26 No.-

        본 연구는 다문화주의 담론과 행태에 내포된 역사적, 문화적 연원을 추적한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갈등의 양상 중 다문화 요소의 출현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과 적대감, 동화(同化)와 차별(差別)에 대한 강박 등 점증하는 양자 간 갈등에 초점을 맞출 경우,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 역시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하기보다 이질적이고 다원적인 외부인의 유입에 따른 동화와 차별에의 강박에서 비롯하는 문제일 수 있음을 다문화사회의 갈등양상을 통해 규명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한국의 역사에서도 귀화 외부인들이 정치 공동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원분배의 기회를 획득해야 하는 권리와 책무의 이행을 요구받았으며, 이를 위해 내부인과 더불어 정치적 경합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고려-조선에 이르는 역사-문화적 연원을 통해 찾았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경합은 한국의 정체성이 다문화적 원천의 혼융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결국 현재 한국의 다원주의를 위협하는 도전 중하나의 사례로서 다문화사회의 갈등과 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역사적·문화적으로 다문화 요소를 융합하거나 우리의 문화적 표준에 따라 동화하는데 오랜 경험을 지닌 연원(genesis)이 우리의 코드로 새겨져 있으며 그 단서의 재현(represent)을 통해 치유될 수도 있다. This study articulate how to recognize and accept these values through historical-cultural genesis in multicultural discourses and behaviors. Korea enter the multicultural society now. From this, multicultural conflict becomes a part of xenophobia as social blowout. Koreans get fury. Why? Because koreans think they is treated as junior creditor in the process of redistribution of wealth. Does it still operate strong nationalism and homogeneous identity in koreans`s mind? or are koreans anti-libertarians alone? The clue of puzzle-resolving unexpectedly is articulated by intrinsic spirits and values of koreans. According to this, the problem of social inequality in Korea can be problem not from economic inequality but from obsession of assimilation and discrimination forward heterogeneous and plural foreigners. That is the critical point. Korean history show that naturalization policy in Korea and Choseon demanded the political competition for getting a chance to distribute resources in substance. In the context of history and culture, coercive political competition by state proved the fact that Korean identity spring not from monocultural genesis but from hybrid of multicultural elements. Finally therapy for multicultural conflicts as a threat to plurality in Korean society can be humanistic approach from representation of historical and cultural hybrid genesis.

      • KCI등재

        『史記』, 제국(帝國)의 정의로움을 위한 변명: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에 내포된 폭력의 성화와 공사 경계 짓기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9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8 No.2

        『사기』는 현재까지 동아시아 역사서술의 전범으로 알려져 있는 사마천의 대작이다. 이후 동아시아 왕조들의 역사서술의 기준을 제시하고 역사가의 임무가 객관적인 사실 서술과 도덕적 평가의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것임을 확립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사기』의 완성이 한 무제 시기에 이루어졌고, 사마천과 한 무제 사이에 얽힌 애증의 관계를 고려할 때, 『사기』가 전적으로 제국의 출현 시점에서 이전 역사를 총정리하고 제국 출현의 역사적 필연성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자로부터 출발하는 역사서술의 전통이 ‘의리’의 규준에 따라 도덕적 평가와 교훈을 제시하는 것이 되었지만, 사마천의 의도는 전통과 현재의 접점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율배반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일 수 있다. 그것은 한 제국의 탄생과 통치구조가 지닌 자기모순과 사마천과 제국황제와의 모순된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사적 폭력과 제국의 국가폭력을 모두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역사서술의 기준으로서 ‘의리’의 규준에 따라 어떻게 사적 폭력과 공적 가치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그 근거로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적 폭력행사가 공적 가치와 목표로 환원될 수 있는 단서를 개인의 이야기로 구성함으로써 의론의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사기』는 제국의 통치자가 보여주는 사적 동기에 의한 자의적인 폭력사용이 제국지배와 질서로 합리화될 수 있다 할지라도 ‘의리’에서 일탈한 불합리한 선택일 수 있으며, 거꾸로 제국 지배와 질서에 부합하는 어떠한 행위도 그 동기의 사사로움과 상관없이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대해 접점을 찾아내 새로운 정의의 규준을 세우려는 고도의 정치적 작업이었던 것이다. Shiji is a masterpiece by Sima Qian; it is a well-known example of East Asian History literature. It established the concept that the mission of a historian is to present a standard of objective factual description and moral evaluation. However, the love–hate relationship that existed between Sima Qian and Emperor Han Wu reveals that the sole aim of Shiji was not clarifying history but presenting the historical inevitability of the Empire’s emergence. It is conjectured that Sima Qian’s intention was to identify the interface between tradition and modernity and, during this process, he faced a situation where he had to produce an antinomic justification. This situation resulted from the birth of an empire that withheld a self-contradictory governing structure and relationship with Sima Qian and the Imperial emperor. Sima Qian adopted the story of assassins and chivalry to hint that private violence could be a feedback to public justice. Shiji exemplified a highly political effort to identify the interface of an antinomic situation where any act conforming to imperial rule and order should be rationalized regardless of any prevalent private motives.

      • KCI등재

        연산군(燕山君), 권력과 폭력 간 불안한 경계 짓기의 실패자?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7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6 No.1

        본 논문은 연산군을 공적 영역의 정점에 놓인 정통성을 가진 국왕으로 상정하고, 국왕으로서 리더십 행사과정에서 그가 사용한 폭력이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당화조차 필요 없는 정당한 권리행사였는지의 여부를 권력과 폭력의 경계짓기라는 맥락에서 규명하는 것이다. 연산군의 리더십은 논리와 절제로 출발했다. 즉 자신에게 부과된 정치적 유산을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고, 유가적 교의로 무장된 삼사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의 논리와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능상지풍에 대한 국왕으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치세 초기에 계승한 정치적 유산을 유지하기 위해 절제된 논리적 대응으로만 일관했지만, 이것마저 정당화할 것을 강요받는 순간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폭력을 통한 정당화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산군은 정당성의 문제를 다루는 권력의 경계 내에 머무는데 성공적이었지만, 그 경계선 위로 밀려 올라간 순간 폭력의 영역으로 경도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산군은 폭력을 권력으로 오인한 폭군이기보다 권력과 폭력의 경계를 명확히 구별 짓기 위해 정치적 유산과 자신의 리더십을 조응하는 과정을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This study is to articulate King Yeonsan"s leadership whether he use physical violence to justify his own power or he use legitimate power without justification in the context of drawing boundary between power and violence. King Yeonsan" leadership departed from well-disciplined logic. King Yeonsan did not refuse his political legacy from his father King Seonjong arbitrating the tension between chancellors and three inspection(三司) armed with confucian dogma and sustaining self-esteem as a king against vassal"s contempts. Nevertheless vassals compelled his king to justify his own leadership, so King Yeonsan was restricted his options by them. The last option to King Yeonsan was to justify his legitimacy with violence. After all King Yeonsan succeeded staying within boundary of power, but the time to rise on border-line pushed by vassals King Yeonsan was in danger leaning to violence. Maybe King Yeonsan was more loser of drawing boundary between power and violence than tyrant who misunderstood violence to power.

      • KCI등재후보

        백호관(白虎觀) 회의를 통한 이념의 제도화와 공(公)의 독점

        윤대식(Youn, Dae-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2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1 No.2

        고대 중국의 제국 출현은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했고, 이로 인해 일원적 질서의 주재자인 황제의 정치권위를 뒷받침할 새로운 이념적 근거를 모색해야 했다. 그것은 공적 영역과 권위의 본질과 성격을 제도적 장치로 구체화했는데 바로 회의(會議)의 개최였다. 한 제국 전반에 걸쳐 세 번의 국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소제 시기 염철 회의, 선제 시기 석거각 회의, 장제 시기 백호관 회의로 진행되었으며, 염철 회의가 국가의 정책방향을 결정하고 회의의 제도화를 보여준 출발점이라면 석거각 회의는 경학의 권위와 정치 권위의 일체화를 가져왔다. 최종적으로 백호관 회의는 정치권위의 제도적 안정성과 우월성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경학 텍스트의 정리에 따른 국가이념의 통일성을 완결했다. 그렇게 보자면 일련의 국가 회의 개최는 여기에 참여한 황제 및 신료와 경학자들에 의해 공(公)의 영역과 경계를 확정지어‘누가 통치할 것인가?’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공의 영역과 경계를 확정짓는 일련의 회의가 독점적 지위를 향유한 지배 계층의 사적 통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사적 동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참여자들로 인해 공의도출이 사에 의해 폐쇄적이고 독점적으로 주도되었다는 태생적 한계성을 반영한다. 결국 제국에 의한 질서조차도 물리적 폭력에 의한 문제해결을 지양하고 토의와 논변을 바탕으로 하는 회의의 제도화를 통해 일원성과 통합성을 추구했을지라도 공적 가치와 공론의 도출과정에서 과거와 동일한 하향식 의사결정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의 공론 형성과 도출 역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Emergence of empire in ancient china contains the meaning of entering new order. So empire should develop new ideological basis to backup empire"s authority. It grew institutional heuristic as a conference, a series of conference are called by conference in Salt and Iron, Stone Canal Pavilion, White Tiger Hall. Officially conference in White Tiger Hall derived from emperor"s intent to sanction a text and integrate interpretations divided by schools. But the hidden meaning of conference was to decide the border of public and private section, to suggest who govern and how to govern. The emperor hoped to get the legitimacy from public opinion. In fact, conference could not represent the public opinion, vice versa. That was still articulated the exclusive and monopolistic decision making process. Even if a series of conference contained institutionalizing conference based on debate and discussion, they could not free from hierarchial old order based on the unilateral relationship of prince with subjects. Now our political culture also can not free from this pattern of assembling public opinion. Finally the traditional conference in ancient china is a common inheritage in East Asian political culture.

      • KCI등재후보

        선진 법가철학의 내적 발전경로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9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8 No.1

        본 연구의 목적은 상앙과 한비자로 이어지는 선진 법가철학의 이론적 완성과 정치적 실천과정을 법가철학이 지닌 내적 발전경로로 파악하고, 이로부터 선진법가철학이 지닌 논리적 일관성을 찾아서 정치교의로서 법가철학의 계보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상앙과 한비자의 법치론은 양자 모두 그 이론적 전제로 법치실행의 필연을 위한 발전적 역사관과 역사의 필연성을 이끌 합리적 인간을 상정한다. 그것은 법의 제일성과 공정무사함에 기초한 법치의 객관성에 의해서 상호이익의 보장이라는 실천을 통해 규범화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한비자는 상앙을 계승한다. 상앙과 한비자는 법 인식에서 분기한다. 상앙은 법의 제일성과 공정무사성을 일률적인 법 적용을 통해 률로 전환시킨다. 반면 한비자는 법을 질서의 본질로서 도의 구현으로 규정한다. 순수한 ‘법’에 의한 지배의 일원성을 신뢰했던 상앙의 비극적 종말은 한비자로 하여금 ‘법’에 의한 지배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통치술의 보완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최종적으로 상앙의 법치론은 존법과 존군의 균형을 시도하고 한비자의 법치론은 존법과 독존의 양립을 시도한다. 따라서 상앙과 한비자는 군주의 통치술로서 위세와 술수를 권고하지만, 상앙의 경우 법에 의한 지배만으로 지극한 경지로 도달한다는 기대에 의해서 위세와 술수의 보조적 기능에 국한시킨 반면 한비자는 법에 의한 지배와 군주의 지배를 양립하는 결정적 관건으로 위세와 술수의 적극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의 교화조차 필요없다는 상앙의 이상과 무위의 통치라는 한비자의 이상 모두 지극한 통치의 상태를 의미한다. The aim of this article makes my position clear that the legalist philosophy from Shang Yang to Han Fei-tzu in ancient china suggested inner path of theorectical and practical development like the geneology of Confucian School. Shang Yang and Han Fei both assumed the growing history and rational man as a theorectial premise. They suggested that ruling by law(Fa) should guarantee mutual aid through uniformity and impartiality of law. So they are called Legalist(Fajian). But both diverged whether ruling by law only or statecraft was the best way. Shang Yang chose law and suceeded change-law(Bian fa). Han Fei chose statecrafts(ShuㆍShi) and achieved a synthesis of legalist philosophy. Nevertheless their political vision coincided with moving toward supreme state of idleness.

      • KCI등재후보

        선진 유가와 법가의 왕패론에 내재한 정치적 의무의 기제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7 No.1

        본 연구의 목적은 상앙의 법치주의와 맹자의 왕도주의를 정립-반정립의 정치교의로 설정하고, 양자의 정치교의에 내포된 정치적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군주-신민 간 정치적 의무의 인지와 이행을 위한 합리적인 통치기제의 구축을 목표로 했던 동일한 논리임을 밝히는 것이다. 상앙의 법치주의와 맹자의 왕도주의는 현재를 무질서와 혼란으로 규정하고, 역사의 법칙성을 변환과 순환으로 파악한다. 이를 위해서 양자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법제와 도덕에 의해 규범화된 합리적 인간을 상정한다. 또한 상앙의 법치와 맹자의 왕정은 군주-신민 간 관계의 당위성을 보장하는 안전장치로 법제와 천명이라는 익숙한 정치적 기제를 이용하고, 새로운 군주-신민 관계를 법제와 도덕적 완성이라는 새로운 의무의 기제로 합리화한다. 그것은 군주-신민 간 정치적 의무를 생존보장과 농전의 종사라는 실천기제로 규범화함으로써 군주의 시혜-신민의 보상이라는 호혜성에 기초한 쌍무성을 결과한다. 최종적으로 상앙의 법치와 맹자의 왕정은 더 이상의 교화가 필요 없는 질서정연한 왕천하를 지향한다. 결국 선진유가와 선진법가의 정치교의로서 왕도주의와 법치주의는 법과 도덕이 절충되고 겸전된 합리적 통치기제의 구축을 위한 단서이다.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make clear the heuristics of political obligation in ancient chinese Fachian and Confucian political doctrines. Shang Yang and Mencius had the same logic and political vision. Both had only the methodogical difference. Shang Yang and Mencius departed from their view of history oriented change and circling in real world. And both recognized that men had egoistic or good nature empirically or psychologically. These were the premises guaranteed their legalism by Shang Yang and kingly government by Mencius. From these, Shang Yang and Menciusthe could set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prince and subject who performed their own political obligation spontaneously. Therefore Shang Yang and Mencius moralized the working and war as the current issue through duty of agricultural farming and following the army of the subjects. If the ruling by Pa symbolized as a legislative system obtained prevailing values in their own times, the ruling by Wang symbolized as a moral cultivation system also would be an intention which obtain prevailing values about typology of moral cultivation. So it is, which was the good choice? The answer is the fusion of Fachian legalism and Confucian kingly government as the rational heuristic of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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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실학의 중국실학사상 수용과 주체적 변용과정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7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6 No.1

        중국실학은 이민족의 통치로 인한 인식론적 성찰로부터 발생했다. 그 대표자로서 고염무는 삼대의 정치와 왕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동시에 현실군주의 정치적 역량으로 체제의 공고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다. 이 점에서 동시대의 유형원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실학은 중국실학의 인식론과 실천론적 대안을 공유한다. 17세기 동아시아의 변동과정에서 수평 이동했던 정치적, 인식론적 대안들 중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을 달리하는 것일까? 조선실학의 정치적 이상상은 왕정실현이라는 목표를 담고 있으며, 주례적 질서로의 복귀라는 중국실학의 정치적 의도와 목표를 공유한다. 하지만 조선실학자들은 동시대의 중국실학이 제시하는 개혁론의 출발점과 과정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즉 조선실학자들은 성공했던 조선의 원형적인 통치기제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목표로 했던 반면 실현 불가능한 중국의 정치적 규준과 이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진보적이고 근대적이어서 또한 조선에서 수용할 수 없는 정치적 규준과 이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통치기제가 가졌던 장점과 순기능, 즉 합리성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자신의 시대적 요구에 충실한 반응이었을 뿐이다. Chinese shixue originated from the epistemological reflection in the reign of manchurian dynasty. Gu Yanwu, who was a founder of Chinese shixue and a author of Rizhi lu, expected revival of Three Dynasty and Benevolent Ruler and demand the institutional revolution for consolidating political ability of prince in real politics. From this, Chosun shil-hak and Chinese shixue came together their epistemological alternative and praxis. What were those? The political vision of Chosum shil-hak and Chinses shixue oriented toward Benevolent Government and revival of Zhou-li order. But Chosun shil-hak had a different proto-type. That was regime of Kyungkuktaejon. Therefore Chosun shil-hak corresponded with demands of those days to revive the rationality of ruling mechanism which was successful in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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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중국의 서진(西進) 전략에 혼재된 공사(公私) 동기의 실체 : 『사기』「대원열전」과 「흉노열전」을 통해 본 대외정책의 단서들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21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20 No.1

        정치사적 맥락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 질서는 진(秦)의 전국통일 결과이지만, 지성사적 맥락에서 이미 전국시대 중기 이후부터 형성된 하나의 합의, 즉 통일 관념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반면 제국의 일원성은 모두에게 생경한 것이었고, 특히 한 제국의 경우 황제 권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안전장치를 필요로 한다는 현실적 수요를 정치적 관념으로 조작정의한 것이 대일통(大一統)이었다. 관건은 대일통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였다. 한 무제의 시호는 바로 이 과제를 국가폭력으로 해결했음을 의미하며, 내부적으로 제후왕들의 위협을 제거하고 중앙집권적 제민지배체제 구축에 성공함으로써 대일통에 근거한 정통성 확보에 성공했던 것이다. 동시에 대외적으로 한 무제 시기 지속적이었던 남북 이적과의 경쟁과정 역시 대일통의 외연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서역 교역과 실크로드 개척 역시 대일통의 두 가지 경로를 방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가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일까? 즉 역사상 최초로 제국 경계 너머 서쪽의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동서 문명교류의 문을 열었다는 한 무제의 서역 교역이 대일통의 외연확장이라는 이념적 동기에서 비롯했다는 이해는 역사전개 과정에서 보이는 착시현상이 아닐까? 당대 흉노 제국과의 전쟁과 서역 교역의 두 가지 대외정책 경로는 대일통의 외연확장이 아니라 사실 한 무제 개인의 복수심 또는 변덕으로부터 출발한 것일 수 있다. 즉 대일통의 이념성은 국가 대외전략의 합리적 근거가 아니라 강력한 전제군주에 의해 진행된 권위주의 확장을 합리화한 데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과거 역사적 경험이 현재적 의의로 해석될 여지를 갖는 경우, 즉 지금 중국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역사적, 이념적 기원을 한 제국의 서역 교역과 관련지으려고 한다면, 어쩌면 그 기원으로서 한 제국의 서역교역과 실크로드는 어떠한 영감과 단서도 제공할 수 없을지 모른다. In the context of political history, the first imperial order in East Asia was the result of unification by Qin Empire, but in the context of intellectual history it was also the result of ideas for unity from a hundred of Schools since the mid of Warring States period. Especially Han Empire, Huang-ti(Emperor)’s supreme authority ought to begin from legitimacy in real politics. For this, The Great Unity Paradigm came out of the operational definition. Han Wu ti(Military Emperor) was successful to achieve centralism internally, to expand boundary of Empire externally. Wu ti managed two-tracked path of war and trade against The Huns(Xiongnu;匈奴) and Da Yuan(大宛). Indeed was Toward West of Han Wu ti originated from The Great Unity Paradigm? Probably two-tracked path by Wu ti was homogeneous policy such as two sides of coin. That might be just the personal motif from Wu ti’s aggressive personality. We maybe cannot search any ideological and public clues from Toward West as origin of One Belt On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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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駑馬戀棧豆의 경계와 白熱의 정치적 삶

        윤대식(Youn Dae Shi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0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9 No.1

        3ㆍ1운동을 기점으로 조선의 식민통치는 문화정치로 전환한다. 1920년대 민족주의를 자처했던 일부 부르주아 세력들이 절대독립을 포기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민족을 개량하려는 실력양성우선론과 민족개조론이 등장한다. 안재홍은 노마연잔두(鷺馬戀殘豆)의 고사를 비유하여 식민통치에 타협적이고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진영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비타협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융합과 포섭의 부재를 우회적으로 토로한다. 따라서 비타협적 운동노선의 결정체로서 신간회 참여야말로 안재홍의 정치적 삶이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결과한 합리적 선택인 셈이다. 반면 전민족적 정치투쟁을 극대화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기대했던 신간회 내부의 분열과 해소의 움직임은 안재홍으로 하여금 좌우의 협동을 도모한 백열적인 삶을 진전시켜야 하는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 해답은 전략적 신협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간회는 안재홍이라는 지사적 투사가 자신의 정치적 사유와 삶의 일관성을 정합한 대상이었고, 이로부터 타협적 민족운동노선의 거부와 비타협적 민족운동노선의 최종적 완결체로서 민족단일당의 결성을 염원하면서 내부적인 대립과 분열의 현실에 직면해서 협동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안재홍의 정치적 삶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이해와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New Roots Association was consistent in An Chae-hong's political speculation and action as a resistant intellectual. He tried to make new cooperation resistant nationalists and socialists for one party. And he denied to match conformable nationalists' voices, futhermore he distinguished himself as a resistant nationalist from themselves as a traitor. If it could be evaluated in right way, An's speculation and action should be role model of public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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