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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4 한국문화연구 Vol.7 No.-
현재 고구려사가 당면한 여러 가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체계적인 역사서가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층위로 존재하는 고구려 관련 자료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 낼 수 있게 해준 필자에게 감사한다. 고구려 건국에서 4세기, 7세기에서 거슬러 올라온 4세기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며, 자연스럽게 고구려사를 이어가는 논리로 체계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아시아 삼국의 사료가 하나로 일치되는 7세기 사료를 통해 복원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필자는 당시 정치적 실체를 반영하는 관등제를 복원함으로써 정치운영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관등제에 대응하는 정치적 현실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확인하고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중국사서에 보이는 고구려사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생명을 얻고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되살린 것이다. 신빙성 문제는 김부식이나 고대사 연구자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한계였다. 필자는 이러한 짐을 덜어주었다. 짧은 공부로 인해 필자의 진지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점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점은 평자의 어리석음으로 이해하기 바라며, 저자의 진지한 고민을 재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모두 평자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류현희(Ryu, Hyon-Hee) 백산학회 2003 白山學報 Vol.- No.67
We cannot confirm the master of burial of Jang-Gun Tom. We have three masters of Tomb, King Jang-Soo, Kwang-Ge-to, and founder of Koguryo, Ju-Mong. But it had no actual historical records and ruins. In this article, I pointed that this tomb was built following condition, the location and characteristic of tomb, the transference of capital to Pyong-Yang, and scope and limitis of Koguryo’s territory. This tomb indicated the the succession of stone grave with steps, and growing process of Koguryo, But it was special style of Koguryo’s mode and showed the powerful King’s au thority and systemic ruling class. It was a Symbolic relic of Kuk-Nae-Song’s age, mark of expansion of it’s nation. In this view, I think it is possible that this is King Kwang-Ge-To’s t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