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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현종대 羅城 축조 과정에 관한 연구

        김회윤(Kim Hoe-Yun) 고려사학회 2014 한국사학보 Vol.- No.55

        고려시대 개경의 나성은 군사적?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성의 축조 과정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나성의 시축시점을, 『고려사』현종세가?지리지는 현종 즉위년으로『고려사』강감찬전?『고려사절요』는 현종 11년 이후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명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점을 유념하며 나성의 축조 과정을 분명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고려사』는 原典선정을 엄격히 하였고 史料集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료들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를 편년으로 줄이는 데 목적이 있던 책이었다. 따라서 두 책에 기록된 나성의 축조 과정과 관련한 기록들은 우선 사실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당대의 여러 정황과 함께 검토될 필요성이 있다. 검토 결과 나성의 축조 과정은 현종 즉위년의 시축, 거란의 침입 등으로 인한 축성 중단, 현종 11년 강감찬의 재축조 건의, 현종 20년 완공으로 정리된다. 현종 즉위년에 나성이 시축된 까닭은, 목종 12년의 정변으로 인한 거란의 침입을 예상한 강조가 전쟁과정 중에서 개경이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예측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현종 11년에 강감찬이 나성의 재축조를 건의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강감찬은 현종 11년에 조성된 고려-거란 간의 평화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거란의 재차침입을 우려하였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성의 재축조를 건의하였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전쟁에 지친 民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기에 축성을 곧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직접적인 축성을 후일로 미루고 우선 왕가도에게 축성계획을 명하였다. 왕가도는 현종 15년 이전 어느 시점에 나성의 재축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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