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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장로교회의 장로주의 정체성 회복에 관한 고찰 : 교회정치를 중심으로

        우정우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8703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정치원리는 뚜렷하게 구분되어서 계승되고 있으며 감독주의, 회중주의 그리고 장로주의라고 하는 정치원리가 교회들에 의해서 각각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장로교회이어야 하는가? 먼저 장로주의 정치원리를 교회의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성경적 교회이다. 지도자이건 신자이건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참된 장로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서가 고백하고 있는 장로주의에 대한 확신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앙고백은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 고백서가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고백서는 장로주의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와 함께 작성된 정치조례는 이에 대한 해설과 적용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고백과 일치하도록 만든 것이 교회헌법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구성원인 장로교도들은 자신이 장로교도인 것에 대한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주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복음주의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에 교리나 교회정치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교회의 질서와 신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잃어가게 하는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 인해서 교회의 권위가 상실되고 신앙과 교회의 무질서를 초래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적, 구체적인 규범이 있고 그것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에는 교회의 정치원리에 대해서 직접적,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교훈하고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정치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록된 교훈들을 통해서 연역해 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장로주의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역사적, 필연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교회의 정치형태로서 장로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떠나서 단순히 필요성과 합리성과 현실성, 유용성을 전제로 해서 착안해 낸 방법론적인 원리를 교회적인 현실에 맞게 만든 것이 장로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전적으로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신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정치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의 신학적 입장이다. 개혁파의 신학적 원리를 따르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장로주의가 교회의 정치 형태 중 가장 성경적이며 역사적이라 인식할 때 세워지며 장로교의 독특성이 구별될 것이다. 오직 성경을 원리로 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좋은 정치형태가 심어진 것이 장로정치이다. 또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착안되어서 새롭게 등장한 교파가 아니다. 비록, 장로교회라는 교파의 명칭이 등장하고, 하나의 고유 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17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신구약 성경의 역사는 물론, 주후 2000년이라는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라는 점에서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장로주의 정치원리는 성경적임과 동시에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교회형성의 원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이러한 장로정치는 개교회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데 가장 합리적인 정치원리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는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으며 한 사람의 강력한 리더쉽의 담임목사에 의해 교회가 다스려지고 있기에 더욱더 장로교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장로주의가 성경적 정치 원리임을 믿는다면 한국장로교회는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 정치 원리로서의 장로주의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진단과 전망

        김은배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8703

        지금까지 맥가브란과 피터 와그너, 슐츠의 이론을 중심으로 교회성장 원리와 유형, 현대적 의미의 교회성장원리를 살펴보았고, 세계교회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던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되고 정체된 원인을 진단하고 그 대응책을 논하였다. 21세기를 맞은 한국교회는 급변하는 사회상황과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현저한 변화는 교회성장의 정체 및 감소이다. 교인 이탈의 외적 요인으로는 경제수준, 사회복지 수준이 높아지고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경제적, 사회적 박탈감이 감소되어 종교에 대한 의존감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적 변화,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약화되면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확산이 한국 교회의 양적인 측면에서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교회 자체가 보여주는 문제점으로는 교회가 돌봄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신자 개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지 못하며, 목회자의 자질이나 능력부족, 세속적인 것의 추구라는 현실이 교인이탈을 촉발하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파와 교회가 공존하고 있는 다원주의 상황, 그래서 자유롭게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시장상황, 그리고 끊임없는 이동성을 유발하고 있는 도시화 현상과 지리적 사회이동, 소속교회에 대한 불만 현실은 교인들의 교회이동을 촉진하고 있다. 이제 교회들은 자유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흑은 생존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새 신자는 잘 안 들어오고, 기존 신자는 잘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새 신자가 늘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의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 기인하기도 하지만, 한편 교회가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기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기존 신자가 빠져 나가는 것은 이주 등 불가피한 상황 변화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한편 그들이 소속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교회, 더 훌륭한 설교, 더 영적이고 인격적인 목회자, 더 좋은 교회 프로그램, 더 나은 교회와 예배 분위기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 안과 밖으로부터 동시에 역풍을 맞고 있다. 밖으로부터는 교회를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비교인들이 있고, 안으로는 자신의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를 향해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 방안으로는 영성과 성숙, 교회 지도력의 함양, 교회다운 교회상 정립, 급변하는 문화 변화에 적절한 대응, 사회봉사를 통한 사회 공신력 회복과 교인의 수평이동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성장은 그 자체가 건강한 것이라 볼 수 없으므로 회심성장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열정을 함양해야 하겠다. 수평 이동하는 교인 분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교인들의 욕구가 다원화되고,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는 그들의 요구를 잘 파악해서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성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되, 그 욕구를 승화시켜서 바른 방향으로 성도들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는 섬기는 교회, 돌보는 교회, 나누는 교회, 사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인격적 감화를 줄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교회부터 도덕성을 회복하고 나아가서 사회에 참된 도덕적, 영적 가치를 심어주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 그리고 삶의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역학 졸업을 앞두고 목회현장에 뛰어들기 전 본 연구는 대단히 의미가 있다. 교회성장에 있어 사회와 교역현장의 어려운 여건을 발견하게 되고 자칫 목회에 대한 환상 속에서 예상되는 시행착오를 예방하고 새삼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의 자질과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도 나름대로 숙고하고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겪고 있는 한국 교계의 위기는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고 변질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교회성장에 있어 역할이 막중한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을 높이고"전략을 세울때' 교회성장이 이루어지리라 생각된다.

      • 한국교회 예배에 대한 토착화적인 접근 -상황화와 변형화를 포함하는 통전적 접근-

        김서곤 호남신학대학교 2002 국내석사

        RANK : 248703

        서론에서는 연구의 동기와 목적, 범위, 방법 등에 이어 2장에서는 예배의 어원적 의미, 신학적인 의미, 기독교 예배의 성격등을 살펴보았다. 예배의 어원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 일반적 의미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의미를 찾아보며 "예배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존경하는 뜻으로 부복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가진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볼 때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선이며, 살아 계시고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과 성육신하셔서 구속하시고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드리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며 거룩한 제사장인 공동체가 드리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임을 알게 되었다. "성서와 전통 속의 예배"를 통하여서는 모든 신학과 교회의 기본 원칙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구약시대의 예배와 신약시대의 예배, 또한 교회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초대 교회, 중세 로마 및 카톨릭 예배,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현대 개신교 예배의 본질과 그 형태, 발전 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백성에게 자기를 계시하고 자신을 섬기도록 요구하고 계시며, 그 섬김의 방법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 예배의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는 이교적인 문화의 바탕과 그 영향에서 한국의 고유한 문화가 기독교와 어떻게 접목하여 기독교 신앙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봄으로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이 허무주의적이고 내세주의적인 신앙 형태와 파당적 교파주의적 신앙 형태, 현세 기복적 신앙 형태 등 부정적 영향이 켰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에 전승된 예배의 배경과 성격에서는 영국 국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자유교회(Free Church)의 형식을 채택한 미국 교회의 예배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에 이식되어 즉흥적인 전도 집회형태가 절충되어 이교 문화적인 바탕을 가진 한국인의 생활 양태에 접목되어 바람직한 기독교 예배를 정립하는데 장애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 예배의 토착화를 위한 고찰"에서는 토착화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 토착화를 위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노력, 토착화를 위한 기본원리 등을 살펴보았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할 때 인간이 속해 있는 그들의 고유한 심성, 감정, 언어, 사상으로 예배를 표현할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가 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성숙한 교회로서 하나님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 민족과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 오신 태초부터 계신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토착화를 시도할 때 기본적으로 성서, 전통, 경험, 이성에 근거하여야 하며, 한국인에게 자연스러워야 하고 우리의 심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전통성, 다양성, 고유성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배의 토착화를 위한 실제적 접근"에서는 문화 변동과 기독교의 상관성, 토착화가 가능한 실제적 부분들, 주 5일 근무에 따른 예배의 변화, 디지털 정보 기술을 활용한 생활 예배 등을 살펴보았다. 한국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토착화가 가능한 부분들은 먼저 예배 장소인 예배당의 건축구조나 내부장식, 설교대, 성찬기, 헌금함 등을 한국적 정서가 풍기는 기와 지붕이나 가구, 도자기 등으로 할 수 있으며, 교회력을 한국적 절기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추수 감사절 같은 경우 우리민족 고유명절인 추석에 맞추어 지킬 수 있으며 기타 국가 기념일 등도 교회력에 잘 맞추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에 사용하는 음악이나 악기가 모두 서구적이므로 우리 정서에 맞는 가락과 전통적인 악기를 사용하는 방안과 성찬 성례전에서 성물을 합이 아닌 떡으로 목회자와 예배위원의 가운을 개량 한복이나 두루마기로 할 수 있다. 그밖에도 토착화를 위해 토착적 감각을 가지고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친다면 토착화를 위한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은 얼마든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주 5일 근무가 실시되고 디지털 정보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시대의 변화에 교회도 민감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동시대의 문화와 정서 및 수단인 영상 매체를 통한 다양한 장르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예배의 내용과 형식등에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여야 함을 역설하였다.

      • 초기한국감리교회의 부흥운동과 민족운동에대한연구

        윤용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8703

        The study deals with the historical trend of the early revivalism in Korean Methodist Church Form 1903 to 1910 against the broder background of Korean protestaut Church. After that, Methodist revivalism's influenu on the general movement of revivalism in Korea at time. I attempt to reveal Rev. Duk Gi Chun's and Rev. R. A. Hardie crifical rolein the revivalism both of Methodist and other denominations in Korea. The pious conservative mission policy maed trouble with the Korean culhral structures. It is due to the shard division betweenChurch and aggressive mission policy. In result, Korea Church had to stress the personal faith and the conversion by repentance. This made the religious community to neglect a social issues. But we must appreciate it's value in terms of it's revivaling the personal and faith. The content of this study is as follow ; In chapter one, I deal with purpose, method, extent of the study. In chapter two, I discuss the eariy revivalism foundation of Korea Church and protestant mission policy. In chapter three, I tell the early revivalism in Korea and Methodist Church. I write the early revivalism of Korea Church from 1900 to 1910. In chapter. four, I research the research the early revivalism of Korea Methodist Church and the charcter. In this chapter of the Methodist Church revivalism is a recial movement, a down prayer, a Bibie Study, the education of women. In chapter five, I conclde.

      • 한국 개신교 "대형 교회" : 그 현상의 분석과 평가 : 박창현

        박창현 Augustana-Hochschule Neuendettelsau 1999 해외박사

        RANK : 248703

        이 논문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양태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그 성장의 이유를 한국적인 신학의 장 (Context: 사회 문화, 종교, 정치, 경제)에서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교회의 양태와 성장의 이유로 얻어진 결과가 얼마나 "기독교"적인가?를 점검하는 시도로써 성경과의 비교를 하였다. 그 근거는 세계 기독교의 교회와 교인이 그들의 서로 다른 삶의 현장 (Context) 에서 생겨난 서로 다른 신앙의 양태는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그 공통적인 신앙의 근거는 성서 (Text)가 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한국이라는 삶의 마당에서 벌어진 한국 사람이 한국사람에게 맞게 이루어놓은 교회의 양태를 한편으로는 다수를 이루는 교인들의 신앙의 일상적인 모습과 그들의 경험과 필요에 따라 재 정립해보고, 또 다른 한편 그 교회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담임목사와 그들의 사역에 가장 중점을 두는 주일예배 설교를 분석하여 정리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로 교회의 성장은 한 교회가 얼마나 교인들의 모든 시급한 문제에 얼마나 적절히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대처하느냐? 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혀 이것을 한국교회가 얼마나 적절하게 사람들의 "한풀이"를 하였는가?에 대한 것으로 논지를 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으로든지 그 중심은 성서적이어야 하고, 이 말은 성서의 중심인 "예수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와 일치되어야만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기에 성경의 전통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쉬운 비유로 말해보자: 한국교회의 이러한 "한국적 양태"를 "순 한국적 예수의 이야기"라는 하나의 강물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이때, 이 강물이 다른 강물들과 만나서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자연 현상을 연상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기반에서 생겨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기독교의 양태들이 그들 나름대로 이루어놓은 어떤 형태의 "예수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 강물이 함께 만나서 이루어놓은 바다는 함께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으로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서로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로 예수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전승)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비평해 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관하여서는 복음서 중 가장 처음으로 편집된 마가복음의 신학적 중심 주제를 통하여 성서적인 측면에서 한국교회를 비평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본인은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의 현상을 마가복음의 핵심적인 신학인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신학의 빛에서 재 조명하여 봄으로서 한국교회의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진단을 하고자 하였다. 결국 예수는 왜 예루살렘에 가서 대형교회를 만드시지 않고 십자가에 죽었는가? 와 왜 이러한 예수가 부활하여 다시 갈릴리로 간다는 말을 하였는가?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복음의 의미를 통해 세계 교회에서의 선교 115년의 한국교회의 현재의 위치를 신학적으로 검증해보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천년에 대한 소망을 그려 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본문의 전개는 먼저 선교학내에서의 논문의 의미를 다루고 (개론) 이어 한국교회의 역사와 현재의 정황, 그리고 일반 성도들의 삶 중심으로 대형교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시도를 하였고 (Ⅰ편),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서의 한국대형교회의 표본으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장로교 소망교회의 곽선희 목사를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정밀 분석하였으며 그 외에 9개의 대형교회를 성장의 이유와 함께 분석해 보았다 (Ⅱ부). 그리고 이러한 한국의 대형교회를 한풀이와 교회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마가 신학에서의 예수운동과 비교하는 작업을 하였다(Ⅲ부).

      • 미군정하에서의 한국교회 연구

        박진욱 강남대학교 실천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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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미군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대한민국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가 직접 부정되거나 냉소의 대상이 되면서 역사의 중요성이 반감되거나 소멸되어버림으로써 미군정기의 역사는 최초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형성되어지고, 교회가 자리잡아가는 등 역사적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그렇게 중요성이 인식되어지지 못하고 있다. 정말 우리의 역사는 갈등과 반목의 역사였는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은 좌파세력이었다. 해방이 되자 좌파세력들은 정치뿐 아니라 사회 각 방면에서 선제활동을 전개했다. 남한의 경우 이러한 정치적 활동의 결집체가 1945년 8월 17일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였다. 건준은 조선 내 주요 항일투쟁집단의 연합체로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후에도 조선민족 해방운동을 계속하였다. 건준의 위상은 해방 후 여러 주일 동안 건준, 인공 및 인민위원회는 약 반세기만에 세워진 조선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인민위원회와 그 산하조직은 불과 수주일 사이에 농촌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미군정은 이후에 다른 조직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인민위원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 일적 성향은 매우 강했는가? 하는 점이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일제의 물리적 탄압이 교회의 양적인 피해와 기능마비를 가져왔다면, 일제의 회유·분열정책은 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정신적인 피해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1946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은 국제주의 노선에서 민족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본국 정부의 이러한 외교정책의 변화는 미군정의 정책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미군정의 정책방향이 반공노선의 강화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 미군정의 종교정책은 반공과 서구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이라는 기본정책의 틀 속에서 시행되었다. 당시 한국교회가 미군정의 기본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이 ‘의도적인 특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해방 이후 초래된 변화의 시대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구조와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선교사들은 미군정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견고하게 이어주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그들은 미군정의 인사에 주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천거하였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영어구사능력과 반공주의가 고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군정내에서 한국기독교인의 역할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 대두된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이다. 남북교회의 활동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개신교 교회 내에서도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운동이 전개 되었다.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인 현실문제 참여에서 극복해보려는 부류와, 신앙의 본질 가운데 개인적 변화를 통하여(회개운동, 영적쇄신 운동) 이룩해 보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결국 미군정은 한국사회와 특히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순기능으로는 서구식 교육을 바탕에 둔 지식인들이 개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둘째, 자주국방의 기초를 놓았다. 셋째, 미군정은 한국교회의 형성의 기틀을 종교정책시행과·미군정하의 선교사· 그들이 지원한 적산 및 귀속재산·그들이 세운 학교기관을 통해서 이루었다. 넷째, 자유민주주의를 대한민국에 접목시켰다. 미군정의 역기능으로는 첫째, 친일청산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둘째, 자유주의체제가 권위주의로 나아가 군사독재로 악화되었다. 셋째, 자유민주주의가 직접 부정되거나 냉소의 대상이 되면서 역사적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보적 민족주의자 어떤 면에서는 배외 주의적 이었던 인물들이 사라짐으로써 철저한 민족주의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Due to the lack of understanding about American military Government(low AMG), the democracy which was the national ideal envisioned on the founding of a country was directly denied or became a laughingstock of oneself . Though there were many valuable things such as forming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very first and gaining the footing ground of Korean church, the historical importance of AMG was reduced or disappeared. Do we really have the history with discord and variance? Let me throw the question. It was left-wing's influence that had the initiative in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When Korea was released, the left wingers expanded their first action in politics, in society and in every field. In case of South Korea, the committee for National foundation(low Geon-jun) which was organized on August 17th, 1945 concentrated the political activity. Geon-jun continued the movement for liberation of Cho-sun nation as a federation of anti-Japanese group since Japan had lost in the world war Ⅱ. The position of Gun-jun took a role of the Cho-sun government which had not been founded until half a century. The People's Commissariat and the subsidiary organization had dominated the rural community in only several weeks. Because the People's Commissariat was rooted deeply and firmly,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had to remove it to organize other pro-American organizations. In addition to it, another question was whether most christians had strong anti-Japanese sentiment or not. The Christian religion played the largest role in the samil independent movement. The oppression measure of Japan brought about quantitative decrease of churches and had paralyzed the function of them, on the other hand, the conciliation and division policy caused the qualitative change and spiritual damage at the same time. The American policy for Korea began to change from internationalism line to nationalism line on 1946 as the starting point. The Change of the diplomatic policy of home government significantly caused the change in the policy of AMG. The policy direction of AMG focused on the aspect which would reinforce the anti-Communist line. The religion policy of AMG was enforced in the basic formula which drafted anti-Communist and establishment of western democracy. That was why the Korean church had an idea which was correspond with the basic policy of AMG at that time. But it didn't mean that it was 'Intentional preference'. Christian religion had the structure and the capacity that could be adaptable the best in period of change after release. American missionaries were important couplers who firmly connected between AMG and Korean churches. They mainly recommended Christians to the personal manager of AMG. Because they considered that the christians had a good commend of English and anti-Communism at that time. One of the most outstanding phenomenons was a positive participation in politics under AMG since release. There were two remarkable campaigns that were developed within Protestant church with release. One was the group that tried to overcome the social problems with the positive participation in realities, the other was the movement to solve them with the personal change(repenting of one's sin, spiritual reform) among the essentials of faith. Finally, AMG affected a lot the South Korean society and especially church. There were some affirmative functions. First was that the intellectuals who had western education could participate as innovators. Second, it made out a draft of self-reliance of national defense. Third, it served as a stepping-stone for the formation of the South Korean church by means of the religious policy, missionaries under AMG, financial aid with government- vested property and the schools that they had founded. Fourth, it introduced Democracy into the Republic of Korea. To the contrary, there were some negative functions of AMG. First it didn't settle the problem of cleansing Japanophiles and pro-Japanese group. Second, the liberalism became worse to the military dictatorship through the authoritarianism. Third, the democracy was directly denied or became a laughingstock of oneself, so the historical importance of AMG was not recognized. Fourth, because the progressive nationalists or the anti-alienists were gone, the drastic nationalists couldn't help losing their influence.

      • 초기 한국교회의 기독교문화 이해와 문화선교 방향 : 장로교를 중심으로

        주호중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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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개화 운동1)에 있어서 기독교는 초기에는 반봉건적 잔재인 계급사회의 타파와 여성의 해방과 인권옹호, 미신타파와 관혼상제의 개혁, 한글의 재발견과 그것의 대중화, 독립협회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민권운동의 전개등에 주안점을 두었고, 1905년 이후에는 애국애족 운동에도 앞장서서 3.1운동2)을 주도하여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의 기독교 대표자가 서명하였고 3.1운동이 민족운동이 되도록 승화시킨 것도 전국 방방곡곡에 수천 교회당이 민족운동의 조직체 역할을 수행하여 민족운동으로 세계만방에 알게 하는 중추 세력인 당시 교회가 담당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약탈하는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이라는 국권회복운동에 교회가 앞장섬으로서 그 초창기부터 우리민족사에 크게 공헌하여 암담했던 당시의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회 운동에 대한 기독교의 여러 활동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그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가정과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의 유형을 분석하여 보고, 문화를 기독교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 시켰는지를 알게 된다면 오늘날 혼탁한 현대 문화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이 문화들을 접해야하고 변혁해야만 하는지를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 첫째,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에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문화적 상황과, 종교적 문화를 살펴보고 둘째,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를 들고 온 초기 선교사들의 문화 신학 및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렇게 상황들을 살펴봄으로서, 초기 한국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문화를 통하여 어지러운 현재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회복해야 하고 대응해야 할 문화에 대하여 고찰 및 제언하도록 한다.

      • 해방 후 한국교회 종말론에 관한 연구

        조주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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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starts with the concern that the Eschatology of korean church since 1945 had to confront radical transitions. In the history of korean church the Eschatology was a significant faith. Especially in 1910, under the times of Japanese colonialism it deeply influenced and motivated the christians of korean church to overcome this challenge. But why this valuable faith start to deteriorate after the Independence(1945) and Korean War? In this thesis firstly this writer researched about the backgrounds of formation and origin of korean church's eschatology. That is the influence of korean traditional religions, which is Shamanism, Buddhism, Confucianism and Tonghak/Chondokyo. And the important influence is American missionary's eschatological theology. Especially those eschatological character is the desirable hope for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Most of all they had a faith of Premillenniallism. This eschatological theology develop by the Pyongyang Great Revival Movement on 1907, driven by pastor Sun-Ju Gil. On 3 Chapter this writer studied the Eschatology of the first period since 1945(1945-1960), when is the period of confusion after the Independence and 6.25 Korean War. The historical situations of this times is political/ ideological confusions, 6.25 Korean War and social disorders. The cause of church is schism of korean churches and denominations. And The Eschatological inclinations of Premillenniallism, which is weariful of the world, brought out the heretic phenomenon. From Korean War, a newly rising religions and Heresy movement begin to appear. Ironically they were a eschatologist with an unsound belief. A examples is "Park Tae Sun's Jeon-Do-Guon", "Moon Sun Myung's Tong-il-gyo". After 6.25 Korean War in the history of korean church, the original eschatological faith to be hard done by false prophet. On 4 chapter this writer researches the Eschatology of korean church since 1960'(1960-1980) in the period of economical development and settlement. The historical situations of this times is nationally economical development movement and a faith's current of seeking fortune. This facts weaken the faith of seeking the future life, which is real substance of Eschatology. That is to say, It brought out the faith more oriented the worldly hope than the heavenly hope. Therefore since 1960's The eschatological faith of korean church was becoming out of issue. Eschatological preaching disappeared from the church's pulpit and it appeared on christian's faith to absence's phenomenon of eschatological faith. In this times The important cause of korean church is so called "To-chak-hwa theology", that is the result of Korean theology. Interest of eschatology and secod coming dropped cause of To-chak-hwa theology. And the remarkable transition of eschatology in korean church is from Premillenniallism to Post-/Amillenniallism. On 5 chapter this writer studies since 1980's(1980-) in the period of the eschatology of korean church. In this times the historical situations is democratization movement, social participation of church, extension of unification movement and citizen movement. And since 1990 the time limit eschatology, so called "October in 1992's syndrome of Da-mi-son-gyo-hwe" occurred. These facts caused church pulpit to avoid the eschatological sermons. That result negligence's phenomenon of the eschatology. 본 논문은 초기 한국교회의 중심신앙이었던 종말론이 해방 이후를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를 거듭했으며, 각 시대마다 어떠한 종말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그 소중한 복음진리인 종말론과 재림신앙이 변질되어 이단화(異端化) 되어가고, 교회의 강단에서 경시(輕視)되어가고 있는가? 라는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수호하였던 한국교회의 원동력은 바로 종말신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생명력의 가장 중요한 근원 가운데 하나도 역시 종말신앙에 있다. 종말신앙은 일본의 식민통치, 특히 1935년부터 한국교회를 강타했던 신사참배의 도전과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 소중한 신앙의 진리가 해방 이후와 6.25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점점 변질되어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본 논문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교회가 왜 종말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뿌리내리게 되었는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어떻게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시대부터 종말신앙을 갖게 되었는가? 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전통사상’과 ‘재한 미국선교사들의 종말론적인 신학’의 영향으로 보았다. 특히 한국교회 초기 종말론 형성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으로써, 근본적인 뿌리가 되는 것은 역시 한국의 전통종교들의 세계관이다. 한국의 전통종교 즉 무교, 불교, 유교에는 종말론적인 암시들이 담겨있어서 초기 한국교회 종말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종말론적인 특징들은 해방 후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형성, 특히 종말신앙형성에 있어서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이점에 대해서는 해방(1945년) 이전으로 국한지어 설명하였다. 초기 한국교회 종말론 형성의 중요한 또 하나의 뿌리는, 재한 미국선교사들의 종말론적인 신학이다.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 종말론적 기대, 즉 복음주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입국한 재한 미국선교사들의 종말론적 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순수하고도 매우 헌신적인 신앙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성도들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 종말론적 기대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종교들의 종말론적인 특색이 가미된 한국교회 만의 독특한 종말론은 일제치하의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초기 한국교회 종말신앙의 형성에 또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함께 한국교회의 영적인 부흥을 주도했던 길선주 목사의 종말론이다. 길선주 목사는 “종말의 희망을 알리는 나팔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의 종말론은 역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써 한국교회사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 본 논문의 연구 주제인 해방 이후 한국교회 종말론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Ⅲ장부터 논의하였다. 해방 이후 시대구분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해방과 6.25전쟁 직후 혼란기(1945~1960), 2) 6·70년대 경제성장운동과 정착기(1960~1980), 3) 80년대 이후 성장기(1980~)이다. 본 연구자는 각 시대별 역사적 상황과 종말론적 특징들, 주요현상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첫째로 해방과 6.25 직후 혼란기(1945~1960)의 한국교회 종말론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보면,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남북한 교회의 재건, 6.25전쟁과 사회적 혼란, 한국교회의 분열이라는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과연 어떻게 한국교회 종말론에 영향을 주었는가? 본 연구자는 해방 후 정치적·사회적·교회적 혼란 상황은 분명히 종말신앙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았다. 해방 후 남북한의 정치적 혼란과 교회의 분열, 6.25동족상잔 전쟁 직후 사회적 혼란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다시금 종말신앙에 의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말론적인 이단과 신흥종교가 우후죽순처럼 발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6.25전쟁 이후 사회적 혼란은 한국국민들과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힘들고 불합리한 이 세상의 현실너머 초월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종말론적 동인(Motive)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6.25전쟁은 한국 땅에 종말론으로 무장한 신흥종교와 이단의 싹이 자라게 하는 역사적인 토양(土壤)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인 비극과 함께, 특히 한국교회의 분열은 그 당시 종말론 이단과 신흥종교 집단의 발흥케 하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해방이후 그리고 6.25 동란 이후 특히 성행하게 된 종말론적 이단들의 탄생은 한국교회가 해방과 전쟁 후 교회의 재건이라는 무거운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던 한국교회의 교단 분열과 동시대적으로 맞물려있다. 교회(교단)의 분열이 종말론적 이단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동시대적으로 간접적으로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세포분열처럼 교회의 분열이 가

      • 주후 313년 교회 변화와 현대 한국교회 비교 연구 : 교회 세속화 과정 중심

        이영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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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연구 목적과 의의 역사는 반복된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며 미래의 청사진이다. 역사에 관한 이러한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에 묻혀서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현재의 답답한 상황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미궁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를 특별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있는 현재의 거울이며 미래의 청사진인 과거를 우리가 진지하게 돌아볼 때 현재를 올바르게 진단할 수 있게 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연구는 초대 교회에 관한 논문이다. 그러나 현재를 위한 논문이며 미래를 위한 논문이길 바란다. 주후 313년은 기독교회가 기나긴 마이너시대가 끝나고 메이저시대로 등장하는 결정적 시기이다. 기독교의 발생부터 시작된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회와 성도들은 견디어 왔고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였다. 기독교회는 외부적으로는 철장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끈질긴 군사적 핍박을 온몸으로 이겨내었고, 유대인들의 집요한 모략과 박해를 견디어 그 본거지를 수없이 옮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는 초기부터 발생한 수많은 이단 사상들의 공격에도 기독교회의 복음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던 것이다. 그 결과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호의로 주후 313년 국가에서 자유를 보장 받는 공인 받는 종교로 변모할 수 있게 되었다. 300여 년간 지속된 끈질긴 사단의 불 시험을 드디어 통과하여 전 세계를 포용하는 새로운 메이져 종교로 거듭나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축복의 선물처럼 보이던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관용령으로 인한 박해의 종식은 아이러니 하게 기독교회를 기독교회답지 못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되는 교회의 모습은 67년 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더욱 가속하게 된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라는 엄청난 국가 권력으로부터 300여 년 동안 핍박과 조롱의 대상이던 종교에서 이제 로마의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종교로 변화되었으며 철저한 말씀의 순종으로 타인을 섬기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원수까지 사랑하던 자리에서 이교도들을 죽이고 고문하며 권력으로 군림하는 자리로 올라서게 된다. 우리는 기독교회가 로마의 제국 종교로 공인된 이후에 교회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고찰한 후에 한국 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한국교회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내 문제를 발견하면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지혜와 용기와 통찰력을 습득해야 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현재 침체의 침체를 거듭하는 한국교회의 침체의 근본적 원인을 교회사적 맥락에서 찾아볼 것을 기대하고 그 원인을 찾아 분석하므로 한국 교회의 침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므로 이러한 위기의 현대 한국의 교회에 바람직한 미래적 방향을 제시하기를 원한다. 1-2. 연구 방법 및 범위 먼저 초대교회의 역사를 개관하고 그 중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의 교회의 모습과 콘스탄틴 황제로 인해서 기독교회가 공인된 후에 나타나는 기독교회 변화의 모습을 통전적으로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떤 식으로 세속화되었고 그 세속화의 이유가 무엇이고 세속화의 결과가 어떤 방법으로 나타났는지를 살핀 후에 선교 120년을 넘긴 한국 교회의 1960년부터 80년까지의 변화되는 모습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근 2000년에 가까운 시간적, 환경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비교 분석하여 한국 교회의 현실적 문제를 점검하고 미래의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는 기독교의 시작으로부터 313년 공인 전후의 기독교회의 모습과 공인의 배경을 조사해보고 난 후에 한국 사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열풍으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1960년~1980년 사이)에 근현대교회의 모습을 연구해보고 그 여파가 지금도 침체의 위기 가운데 있는 현대교회의 모습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연구하는 것을 그 범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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