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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북도 근ㆍ현대 화단형성과 전시공간의 변화연구

        김원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48687

        본 논문에서는 근ㆍ현대 전라북도화단의 형성과 발달과정, 전시공간의 생성과 변천과정을 구체적으로 연구해보고, 내용의 선별ㆍ조사를 통해 그 흐름을 연구하여 전라북도의 미술활동 일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었다. 연구방법은 석ㆍ박사 논문, 학회지의 선행연구를 분석하고 정기간행물, 전문서적, 신문 등을 근거로 문헌연구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부족한 부분은 생존 작가들의 면담과 녹취자료로 보충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전후로 서본원사, 동본원사, 본원사 등 ‘종교공간’과 학교, 공회당 등 ‘공공(公共)공간’의 전시공간이 부족했던 시기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 6.25전쟁 후에 생겨난 미국공보관을 통해 기간시설 파괴와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등 시기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전북화단의 열정과 욕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셋째, 1954년 전라북도공보관, 다방, 예총회관, 월담미술관의 백제화랑을 통해 주요 전시공간이 ‘공공(公共)공간’에서 시작되어 ‘사적(私的)공간’으로 이동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부족한 전시공간이 필요에 의해 확장되어 진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시공간의 활발했던 배경으로 전북화단을 흐름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풍요로운 물산을 바탕으로 유학에 뿌리를 둔 선비 작가군이 있다. 이들은 주로 사승관계를 통해 발달하였으며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를 고수 하였고 일제강점기 굴하지 않는 기개를 통해 민족정신을 드높였으며 전북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화목은 주로 사군자를 그렸다. 둘째, 교육기관을 통한 화가군이 있다. 이들은 학교를 통한 공교육기관과 서화소, 연구소 등으로 대표되는 사설교육기관으로 나누워져 있으며 본격적인 개인전, 단체전 구성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전북화단의 활기를 불어 넣는 한편 중앙화단으로 이름을 알렸다. 공교육기관 화가의 시작은 대체로 일제강점기 1937년 설립된 전주사범학교의 일본인화가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이들은 광복전후 꾸준하게 활동을 하였다. 1950년대를 전후로 본격적으로 대학을 통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가 활동하였으며 도내에는 1970년 원광대학교 미술교육과, 1973년 전주대학교 미술과, 군산전문대(현 서해대학교) 생활미술과, 1981년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가 신설되어 전북화단의 두꺼운 화가층과 다양한 화목을 형성해 주었다. 셋째, 군산 서화연구소, 전주 동광미술연구소 등 사설교육기관 출신 화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전후로 나타나고 있으며 대체로 사승관계를 통해 작가군이 형성되었고 선비 화가군과 대학출신의 공교육 화가군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근대 전북 화단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한국화를 중심으로

        박성수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32303

        Abstract Research on the Formation of Painter Society in Modern Jeollabuk-do -Focusing on Korean Painting- Park Sung-Soo Department of fine Arts The Graduate School Chonbuk National University Directed by Professor Lee Cheol-Ryang In Jeollabuk-do, traditional art and culture such as folk song folklore, and folk arts remain in existence and thus has been called a city of culture and art. Also in the modern times, active and creative activities in the painting field has been in place in Jeollabuk-do, well-matching the reputation of Jeollabuk-do. Rivers including Geum, Mangyeong, Yeongsan, Dongjin, and Seomjin flows from north to south and the Honam plain, the largest breadbasket of Korea, is situated in Jeollabuk-do area. As a result, rice became the primary product and the region was able to achieve abundant cultural assets. Affluent life was the matrix for diverse art. Also, remoteness from the central region granted unique cultural characteristics to Jeollabuk-do. Compared to other regions, language, arts, and culture of Jeollabuk-do show oustanding and strong features and at the same time the original form has been maintained relatively well and has been passed down through generations. However, in case of painting field of Jeollabuk-do, the aspects of painters are categorized into two. First is literary painters who painted in the Literary Painting style, which became famous by Kim Jung-Hee in the late Chosun period. Due to stable environmental condition, the region was populated by classical scholars. As a result, paintings in literary artist's style, which the scholars enjoyed painting, were able to be successful in modern times as well in Jeollabuk-do. Contemporary exemplary literary painters are Seok Jeong, Lee Jeong-Jik, Byeok Ha, Jo Joo-Seung, Yoo Jae, and Song Ki-Myeon. Another aspect is career painters who painted for liv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painters is that they did not limit themselves to a specific group or style and painted freely and variously in terms of ideology, style, and theme. Exemplary career painters are Seok Ji, Chae Yong-Shin, and the brothers Hwang Jong-Ha, Hwang Seong-Ha, Hwang Kyung-Ha, and Hwang Yong-Ha. Modern Jeollabuk-do painter society was more active than ever before. The reason why modern Jeollabuk-do painter society was able to be formed can be credited to national political condition. Literary painters of Jeollabuk-do during the addled modern period may had repulsion since the colonization of Korea by Japan. When the nation fell into confusion and chaos, and when achieving government position became very difficult, the painters intended to reveal nationalism through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This became the opportunity to focus on painting and calligraphy. For career painters, the reason why they were able to carry out vital creative activities in modern period was because distribution of paintings in central and rural regions became easier due to expansion of market after the development of production and monetary economy. Also, the abolishment of caste system following Gabo Revolution allowed the increase in classes who wanted to possess paintings and this increased demand for paintings. This increase became the foundation for career painters who painted for living. By observing the backgroud how the modern painter society in Jeollabuk-do was able to be formed, it is expected to serve as the opportunity for researches on modern period paintings to achieve great progress. 전라북도는 민요, 민속, 민예등과 같은 전통예술과 문화가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예로부터 예향의 도시라고 불리어 왔다. 회화분야에 있어서도 근대시기 전북 지역에는 예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활발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북지역에는 금강, 만경강, 영산강, 동진강 및 섬진강 등이 북동지역에서 서남지역으로 흐르고 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쌀은 전북지역의 주된 생산품이었으며 그로인해 문화 전반에 걸쳐 풍부한 자산을 이룩할 수 있었다. 풍족한 삶은 바로 다양한 예술을 잉태 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또 중앙과의 원격성(遠隔成)은 다른 한편에서 전라북도에 문화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부여해 왔다. 전라지역의 언어, 예술, 문화 등에서 국토공간의 타 지역에 비해 그 특색이 뚜렷하고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동시에,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근대 전북화단의 경우 작가의 양상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로 조선 말기 김정희로부터 성행하였던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던 선비화가들을 들 수 있다. 안정적인 지역 환경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는 선비들이 많이 분포하게 된다. 때문에 선비들에 의해 즐겨 그려지던 문인화는 근대에 들어서도 전북지역에서 성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전북지역의 선비화가로서 대표적인 인물로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 1854-1903)과 유제(裕薺) 송기면(宋基冕 1881-1954)을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직업작가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어떠한 집단의 영향 관계에 있지 않아 사상적인 면이나 화풍․소재 면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작품들이 전해진다. 직업 작가로 활동한 작가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과 황종하(黃宗河, 1887-1952), 황성하(黃成河, 1895-1966), 황경하(黃敬河), 황용하(黃庸河, 1899-?) 형제를 들 수 있다. 근대의 전북지역 화단은 그 유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근대 전북 화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들 수있다. 혼란스러운 근대화시기에 전북의 선비화가들은 짐짓 일제의 강압에 의한 식민 사대주의로부터 큰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벼슬길도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평소 여기(餘技)로 삼던 서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드러내고자 하였으며 서화에 몰두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직업화가의 경우 근대시기에 들어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 후기부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시장권이 확대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서화유통이 원활해졌기 때문이다. 또 갑오개혁이 이루어져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그림을 향유하려는 층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른 수요자가 많아져 생계를 위해 작업을 하던 작가들에게 좋은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근대 전북 화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창작되었던 많은 회화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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