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태국에서의 동반자 선교에 관한 연구

        최승근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50703

        선교에 있어서 협력이 강조 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부터 선교에서만이라도 협력과 연합, 일치를 가지고 사역하자는 선교사들의 열망은 뜨거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교현장에서는 동반자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동등한 자세로 선교를 협력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주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실 때, 그 당위성과 고귀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선교에 있어서 동반자 선교를 통한 선교협력은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다. 본 연구에서는 제1장에서 동반자 선교에 대한 연구의 배경과 연구 목적, 연구범위 및 방법에 대해서 밝혔고, 제2장에서는 동반자 선교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동반자 선교의 정의와 그 정의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그리고 필요성을 살펴보았다. 동반자 선교의 근거로는 성경적인 근거, 즉 삼위일체이시며 서로 완전하게 동역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그 원형을 살펴보았고, 인간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과 신구약에 나타난 협력의 예를 알아보았다. 이어서 신학적 근거, 상황적 근거를 차례를 살펴보아 우리시대에 동반자 선교가 여전히 중요하고 시대적인 요청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2장에서는 동반자 선교의 유형들과 발전단계, 방법론이 어떤 것이 있는가를 고찰하였고, 동반자 선교가 진행될 때 발생되는 긴장 요소들과 어려움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이러한 동반자 선교에 대한 이론과 방법론, 필수적인 자세 등은 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태국기독교단과 총회태국현지선교사회 사이의 동반자 선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제3장에서는 태국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위해서 태국 기독교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여기서 태국 기독교가 가지는 다양한 특징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제4장에서는 태국기독교를 구성하는 중심교단이며 현재 총회태국현지선교사회와 50년이 넘게 동역을 해온 태국기독교단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동반자 선교의 역사, 현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동반자 선교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여 왔고, 현재는 어떠한 사역들과 선교적 과정을 통해서 동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현재 총회태국현지선교사회는 동역교단과 함께, 에큐메니칼 협력사역, 교회개척사역, 교육사역, 신학교 및 신학생 양성 사역, 사회복지사역, 목회자 및 평신도 지도자 육성 사역, 디아스포라 한인사역, 세계선교와 인접국가 선교사역 등 다양한 선교사역을 펼쳐나가며 동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각 사역의 수요제기와 발전의 단계에서 오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현지교단과 밀접한 사역을 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장에서는 위에 살펴본 협력교단과의 동반자 선교를 제2장에서 살펴보았던 이론과 방법론에 비추어 평가를 시도하여보았고, 장단점을 분석하여, 현지선교사회와 현지교단 간의 바람직한 동반자 선교를 위한 제안들을 하였다. 우리는 서구교회의 경험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우리의 선교적 실수를 줄이고, 장점들을 활성화하여 세계선교의 주역으로서 이 시대를 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서구선교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다양한 선교적 실수들과 극복해야할 선교의 양태들인 교파주의 선교, 제국주의 선교, 개교회 중심주의 선교, 성장지상주의 선교, 개종주의 선교, 경쟁주의적 선교, 물량주의 선교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선교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경계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바른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반자 선교는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값진 선교적 도전이요, 실천의 테마이다. 더욱이 선교사의 구분이 없이 세계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하여야하고, 선교지의 구분이 없이 모든 지역이 선교지가 되어버린 범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선교는 필연적으로 서로 동역하는 동반자 선교를 지향하여야 한다. 지난 200년 동안 지구상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 교회들은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가난하고 부한 교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교회와 가짜교회는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지체이며, 한 몸이다. 이제 이전에는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맞이하였다. 우리들의 세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계가 하나가 되고, 정보가 네크워크를 통해서 물같이 흐르고, 인종들이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 협력하고, 세계가 다극화되며, 문화들이 융화되고, 지식이 교류하는 시대이며, 생존을 위해서 지구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며, 세계를 하나의 생명으로 이해하는 환경의식이 강화되는 시대인 것이다. 교회관도 선교에 대한 생각도, 서구교회와 2/3세계교회간의 구분과 역할도 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한 몸인 세계교회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변하지 않는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랑을 따라서 급변하는 세계를 함께 섬겨야 한다. 전통적으로 선교지라고 생각되어온 나라들의 교회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들은 서구와의 협력을 통해 절감했던 의견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제 일방적인 가르침은 그만 되었다고, 이제 일방적인 주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이제 우리 함께 동역하고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저들의 외침에 우리는 겸손히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반자 선교가 이 시대에 필요하고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함을 인식하며 이 연구를 함께 하였다. 현지선교사회와 현지교단간의 선교적 협력의 구체적인 예도 살펴보고 연구하였으며 더 발전적인 모델을 세워보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바람직한 동반자 선교를 위한 10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태국선교에도 자성과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더욱이 다른 선교지에서도 더 많은, 더 다양한 동반자 선교의 모델들이 세워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동반자 선교의 방법 및 자세들이 현장에서 잘 적용되기를 희망한다. 동반자 선교는 그동안 경쟁적이며 교회확장, 교파확장의 전략 속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한국교회 세계선교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 동반자 선교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전략이 되도록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선교전략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서 지속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행정적, 전략적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선교는 한세대의 과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동반자 선교의 영역과 분야가 매우 다양한데 이 논문에서는 그중 일부만을 연구하여 제안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음을 알고 있다. 더 발전적인 동반자 선교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본 연구에서 다룬 현지선교사회와 현지교단 간의 동반자 선교 외에도 현장 선교사 또는 선교단체들 간의 협력, 한국내 교회 혹은 교단 간의 협력,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과의 협력, 현장 선교사와 지역사회의 현지인들 간의 협력, 교단선교부와 선교단체들 간의 협력, 한국선교단체들과 서양선교단체 그리고 현지교단간의 다자간 협력, 민족교회 공동체간의 협력, 세계선교를 위한 다국적 팀으로서의 협력, 세계교회들 간의 협력 등이 연구되기를 바라며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 세계상황 변화에 따른 교회의 선교 과제

        김무열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50703

        지금까지 20세기 이후 세계상황의 변화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지나온 시기를 돌아볼 때에 참으로 많은 세계상황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변화하는 세계 상황에 적절한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과 선교전략이 새롭게 요청되고 있다. 세계상황 변화에 따른 다양한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를 공부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선교의 세기를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모든 영역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에 따른 선교적 자세나 전략도 계속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특권적 위치를 잃어가고 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돌아보면서 회개와 자성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선교 현장에서 서구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아무튼 전적으로 과거와 단절되기 보다는 과거에 충실하면서도 미래에 담대하게 참여하는 선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계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처해 나가는 신학적 탄력성을 훈련하며 교회 역시도 빠르게 진화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려졌던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선교의 상황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교는 어떤 하나의 성경 본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하나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선교는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이다. 20세기 말의 위대한 선교 신학자인, 그러나 아쉽게도 199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아공의 데이비드 보쉬는 선교 개념을 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선교는 ‘전환과 검증과 재정립과 폐기의 연속적인 과정’이다. 변화하는 선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활동이요, 동시에 선교 그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는 계속적인 필요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선교는 자연히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으로 개념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증거, 봉사, 정의, 치유, 화해, 해방, 평화, 전도, 교제, 교회 개척, 상황화 등의 다면적인 사역’이다. 이런 정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그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면만을 선교의 전부로 규정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일방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축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데이비드 보쉬가 지적한 것처럼 선교는 변화하는 선교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닌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 다양한 요인들로 인하여 변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의 선교정책은 그리고 전략은 부단히 고민하고 공부하고 씨름하며 늘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어야 한다. 선교의 장인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언어를 배우고, 상황에 맞는 즉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공감하는 비유로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세상의 고통을 우리와 동일하게 느끼고 경험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누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을 이해하신 것처럼 교회 역시도 세상 구석구석 모든 현장에 그들의 언어와 모습으로 참여하고 그들의 일부가 되며 철저한 예수님의 대리자로 선교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기로에 서 있다. 절대적인 가치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상대적인 가치가 세상을 빠르게 오염시키고 있다.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말처럼 오늘을 다시 생각하면 한 번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에 직면해 있다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를 품고 다시금 하나님께 모든 주의 백성들이 회복을 부르짖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또한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다할 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많은 선교적인 비전을 주셨다. 그러하기에 한국 교회는 다양한 선교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인 잠재력이 시너지 효과(sinergy effect)를 발휘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사명이 있다. 첫째,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교회는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성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길 임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기본인 성서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로 거듭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선교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둘째, 교회는 종교다원주의 정신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희망과 구원이라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신학정신을 발전시켜야 하고, 교회와 교인들을 이 정신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종교다원주의 정신은 제1계명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정신으로, 성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깊이 충돌될 위험을 안고 있는 정신이다. 교회 속에 이 정신이 확대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사상적인 우상을 교회 내에 허용하는 것으로, 교회의 위기와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회는 상대주의의 미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상대주의의 미로에 빠지면 교회는 힘을 잃게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종교로서의 기능 역시 상실하게 된다. 21세기에 살아남는 교회는 그래서 힘 있게 선교하는 교회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미로에서 헤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을 힘 있게 전하는 교회일 것이다. 셋째,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팽배해 있는 사상과 문화와 그 모든 것, 세상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과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에 맞는 선교적인 대안들을 탄력적으로 세워 나가야 한다.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층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정신과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를 앞장서서 이끌어갈 수 있는 문화와 가치관을 만들어야 하고, 이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의 요람이어야 하고, 이것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 지금은 첨단이 경쟁하는 시대이고 문화와 가치관에 있어서도 첨단끼리의 경쟁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교회의 정신과 가치관이 세상의 첨단의 정신과 가치관을 무너뜨릴 힘이 없으면 그 순간부터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몰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첨단의 경쟁시대에 승리할 수 있는 문화와 정신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넷째,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그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입술을 벌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이에 맞는 선교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공통적으로 요청되는바 우리의 선한 삶을 통해서 이웃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현재 선교의 방법론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를 축소하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급변하는 상황 속에 있는 현실에 맞추어서 선교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세계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변화에 능동적이어야 한다. 정체되지 않고 부단히 거듭나며 새롭게 변화될 때 교회의 선교엔 미래와 희망이 있을 것이다.

      •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따른 교회의 선교

        유경선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50703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는 현재 우리 삶에 외면하거나 세계화로 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세계화 안에 숨어있는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신앙적 관점과 선교적 관점에서 세계화를 검토해야한다. 본 논문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 아래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부정적 관점에서 비판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경제세계화가 이루어놓은 죽음의 현상인 경제적 불평등, 부의 양극화, 환경파괴를 살펴보고 이에 대해 우상숭배적 관점, 경제적 정의, 창조신학 관점, 청지기적 관점에서 신학적 비판을 함과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의의 선교적 대응과 활동을 중심으로 논한다. 1998년 하라레 총회 이전과 이후의 세계교회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여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활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총체적, 포괄적, 통전적인 생명선교임을 밝히고 앞으로의 교회의 선교는 생명선교를 통하여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가 이루어 놓은 죽음의 현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 베트남 선교와 한인 디아스포라교회 역할 연구

        김영진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50687

        디아스포라(Diaspora)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특히 유대인으로 팔레스타인 이외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자라든가, 그 거주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흩어져 산다는 것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 본향을 떠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현 21세기를 과학문명의 첨단시대라고 하지만 그 속에 도도히 흐르는 디아스포라 군상을 감지해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19세기 말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해간 소수의 조선인들과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3년 하와이의 ‘애니깽’ 농장으로 102명의 한인들이 정식 노동 이민을 떠난 것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재외 한인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해오던 이광규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가 본격화된 과정을 “ ‘잔잔한 물’을 일제가 주먹으로 내리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나간 것”에 비유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은 온 세계 방방곡곡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91년 재외한인은 4,832,414명이었고, 2001년에는 5,653,809명이 세계 151개국에서 생활하였고, 2005년에는 2009년에는 176개국에 6,822,606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80여만 명이 이민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민 운동이 더 활발해져서 8년 만에 162만 명이 더 늘어났으며 거주지를 25개국이나 더 넓혔다. 윤인진, “세계 한민족의 이주 및 정착의 역사와 한민족 정체성의 비교연구.” 서울: 재외한인학회, 2002. 중국, 미국, 일본은 물론 유럽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그 국가 수도 무려 176개국이나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 어디를 가든 그곳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앞서 언급한 통계를 남북한 인구와 대비시켜 보면 한민족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선교의 제 1차적 대상은 우리와 종족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것이 선교의 전부라고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주로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선교를 하는 반면,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은 할례 받은 자들을 상대로 선교하기로 결정 한다. (갈 2:9) 이것으로 보아 동족에 대한 선교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를 위한 교회가 필요하고 실제로 한인교회는 자유주의 국가는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개혁 개방화가 이루어지면서 한인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으며 그 교회를 통하여 한인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음을 세계어디를 가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 반도에 위치하여 대륙을 향하여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라 베트남, 수많은 외세에 맞서 싸운 베트남,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 낮설지 않은 나라이다. 1975년 남북전쟁을 마친 베트남은 공산화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도 만신창이가 되어 떠났고, 한국도 다시 볼것 같지 않으면서 베트남을 떠났다. 베트남은 철저한 국가통제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우리와는 먼 나라가 된 듯 싶었다. 그러나 경제라는 문제가 베트남 사회주의 국가로 하여금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게 만들었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 개혁정책을 채택하고 시장 경제적 요소를 전반적으로 수용하며 세계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드디어 다시 대한민국과도 경제수교를 통해 손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열리게 된 베트남은 경제인들에게 매력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인도차이나의 보고 베트남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저렴한 인적, 물적 자원 때문이었다. 서방의 자본과 기술은 자국의 국익을 위하여 경제협력을 앞다투며 베트남으로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 역시 베트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베트남에서도 특히 경제도시인 호치민시에 산업인력들이 대거 몰리면서 재한인이 급부상하고 있다. 베트남에 이렇게 한인이 많은 이유는 값싼 재조인력 때문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신발, 봉제, 가발 등 인력집중형 저부가가치 산업들은 동남아시아 등 저임금 국가로 이양하게 되었다. 그중에도 중국에 집중하던 산업체들이 중국정부의 고임금추세 때문에 베트남으로 방향을 돌려 투자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현재에도 꾸준히 한인의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재한인들은 날로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곳에 필자의 시선과 마음 또한 모아졌다. 그리고 베트남을 품고 기도하였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바라보시고 그 땅에 마음을 두시고 아파하시며, 그 땅에 하나님은 수많은 한인을 보내시고 있다. 그러한 한인들이 가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난다. 일본인이 있는 곳에는 상사가 세워지고,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식당이 세워져 가고, 한국인이 가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져 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디아스포라 선교를 꿈꾸시며 그 땅에 21세기에 선교한국의 백성을 베트남에 보내시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한인들의 예배를 기대하시며,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베트남 사람들의 예배를 바라시면서 말이다. 이러한 베트남의 상황, 그중에 호치민시의 종교적 상황은 새로운 선교적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현지에 터를 잡고 있어 선교적으로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한인 디아스포라를 바탕으로 세워진 해외 한인교회가 그것을 인식하고, 또 새롭게 세워질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디아스포라 선교에 동참하여야 한다. 필자는 한국에서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디아스포라 한인을 통한 베트남선교를 꿈꾸어 왔다. 그리고 그 꿈을 어떻게 실현시킬까를 고민하면서 선교전략들을 구하고 찾았다. 그곳은 바로 성경이었다. 초대교회 하나님의 선교의 방법은 바울을 통한 디아스포라 선교였다.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하여 유럽과 세계를 선교하신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에 우리는 선교학 교수인 이광순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의를 귀울여야 한다고 본다.

      • 자립선교를 위한 교회개척 사례연구 :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를 중심으로

        김정희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50687

        본 논문은 ‘어떻게 러시아 모스크바시에 자립하는 교회를 세웠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대도시 안에 있는 작은 노동자 교회인데 이 교회가 자립되기까지의 방법과 원리를 연구하였다. 그 원리는 바울의 자립선교방법과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채택한 네비우스의 삼자원리와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을 통하여 이루진 자립선교 정책을 원리로 삼았다. 초기 가난한 한국교회는 삼자원리를 통하여 교회가 자립되어 성장과 부흥으로 세계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KWMA 제시한 통계를 보면, 2013년 169국에 24,742명, 한인 선교사 협의회(KWMF)가 발표한 한국 선교 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2014 한국교회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는 180개국에 총 26,000명이다. 『KWMF 세계한인 선교사』 송충석 공동회장 발제 (2014년 10월 26일). 한국교회는 짧은 교회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에 열정을 품고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자립교회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자립선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올바른 선교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선교신학의 연구가 따라야 한다. 선교사들의 선교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떻게 선교해야 할지 선교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교신학이 뒷받침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는 선교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선교 신학의 부재는 선교사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즉흥적인 사업이나 프로그램의 위주의 선교를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일, 『세계를 품는 선교』, 10. 필자는 한국교회의 선교방법을 반성하며, 올바른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러시아 선교가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본 논문은 방법론에서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네비우스의 자립선교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하였고,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와 살아온 문화를 다루었다. 러시아인의 삶은 공산주의 혁명과 사상 속에서 서로가 믿지 못하고, 피폐된 고통의 삶이었다. 천년 동안 내려온 정교회가 무너지고 공산주의를 지내오면서 내면적으로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습관된 것을 답습하면서 살아오게 되었다. 정교회에 가지는 않아도 집안에 이콘(icon)으로 그리스도의 성상을 가정에 모셔 놓고 기도를 드린다. 러시아 정교회는 극장같이 아름답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재해석이 필요하였다 필자가 전도한 한 러시아 여성(말리까)이 말하는 러시아 교회는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뛰어나지만, 말씀의 재해석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녀는 첫 번째 교회에서 1994년 세례를 받았다. 말씀의 재해석이 없는 정교회의 예배 속에, 말씀 교육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하나님은 러시아 땅에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으로 열려지게 되었다. 모스크바 남동쪽에 위치한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의 구성원은 정교회의 문화권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경험한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 코이노니아는 성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가 되어있다. 자립된 교회로서 사회와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교회로 지향하며 나가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의 자립정책은 필자에게 자립선교의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지난 60년 동안 거의 모든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비를 지원하여 자립에 성공한 교회가 없었음을 알고 새로운 방법인 네비우스의 자립선교 방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비록 느리게 진행되고, 여러 해 동안 가시적인 사역의 열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더 확실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자립 방법임을 확신했다. 이후 필자는 러시아 대도시 교회에서 한국교회 삼자원리의 자립선교를 적용해 보았다. 선교사는 성경의 방법과 올바른 신학의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의 선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 과시적이고 물량적인 선교를 피하고, 성육신되신 주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며, 현지인들의 문화를 존중히 대하는 선교를 하여야 한다. 필자는 자립선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선교사들은 자립선교를 추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교사는 재교육을 통하여 자립에 대한 자기만의 분명한 선교정책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네비우스 방법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의해서 처음부터 모두가 하나 되어 자립선교를 밀고 나간 것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부터 자립 정책을 철저하게 적응시켜 나갔다. 변창욱, “한국교회의 자립선교 전통과 비자립적 선교 행태,” 240, 258-59. 초기 한국교회의 자립정책의 역사 중에 중요한 것은 내한 선교사들 모두가 자립 정책을 채택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자립정책은 중요한 것이며, 러시아의 한인 선교사들도 개신교 교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선교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교회 개척 7년이 지난 후에 자립이 되었다. 교회 개척 후 자립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또 하나의 교회(부로니짜 교회) 부로니짜 교회는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를 통하여 2014년 5월부터 건축하고 있다. 현지인 교회를 통하여 현지인에 의해 건축되는 교회는 3층 150평이며, 현지인 성도들에 의해 건축되어지고 있다. 가 개척되어 건축 중에 있다. 선교는 가난한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선교사 안에 자립하려는 목표와 의지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현지교회가 한국교회 선교사를 의지할 때는 올바른 자립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필자가 러시아에서 개척한 첫 번째 교회는 옛 방법을 의지하여 선교부 자금을 넉넉히 지원받을 때에는 자립이 길이 열리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자립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고, 현지교인들은 어려움 삶을 호소하며 선교사를 더욱 더 의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선교사가 언제까지 한국교회를 의지하며 선교비를 가져다주어야 하는가? 였다. 고민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방법, 즉 자립을 향하여 결단을 내렸다. 이후 자립에 대한 확실한 목표 설정을 갖고 시작한 두 번째 개척교회는 모스크바의 줄리비노 임마누엘교회다. 자립원리를 적용시키기 시작하면서 첫 세례자 훈련 교육을 옛 방법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세례 신청자에게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교육하고, 십일조와 성수주일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줄리비노 임마누엘교회는 세례자에게 4주에 교육과 시험, 고백을 통하여 성수주일, 십일조 생활을 고백하는 입교인에게 세례를 준다. 이것은 정교회 세례는 태어난 아기에게는 누구나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성례전에 참여 시킨다. 정교회에서 세례 받은 세례자는 재교육을 통하여 교회 앞에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세례교인으로 받아 들였다. 교회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코이노니아 교제를 나누며, 서로 돕고, 위로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이끌어 나갔다.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이지만 새로운 방법에 적응하였다. 자립원리 목표를 갖고 교육하며 나갈 때, 선교사에게 사례를 받고 함께 사역하였던 전도인 두 가정이 교회를 떠났다. 더 낳은 조건으로 대우하여 주는 다른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로 갔는데,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선교사 간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필자는 교회가 완전 자립이 아니라도 다른 교회를 돕고, 2010년 캄보디아 교회 우물파기에 러시아 교회 성도들이 $400의 헌금을 모아 캄보디아 시섹폰 신학교에 전달하였다. 지역 사회와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옛 방법으로 모든 것을 선교사가 하려 했던 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자립 원리로 나갈 때에, 5년 만에 50% 자립되었고 현재 80% 자립이 되었다. 자립의 원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자립 원리에 대한 도전과 교육이 더 빨리 있었더라면 일찍 자립의 선교를 하였을 것이다. 자립선교의 원리는 경제적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한국교회 선교에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선교사는 자립선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처음부터’ 자립 원칙을 고수해야 하며, 가난하기 때문에 자립선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선교 지역의 상황에 맞는 자립 방안을 세워야 한다. 또한 100% 자립이 불가능하더라도, 부분적인 자립을 이룰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의 파송교회가 성급하게 선교의 열매를 보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장기적 안목에서 선교를 바라보아야 한다. 변창욱, “한국교회의 자립선교 전통과 비자립적 선교행태,” 258-70. 자립선교의 원리를 통해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건강한 자립교회로 성장하였다. 줄리비노 임마누엘 교회는 한국교회 후원을 통하여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지만, 자립교회가 되었고, 2014년부터 모스크바에서 50km 떨어진 부로니짜 교회 건축을 후원하고 있다. 러시아 선교는 자립선교를 통하여 사회와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필자는 선교사로서 20년간 교회개척 사역을 정리하면서 세계선교대학원에서의 재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방법과 자립선교에 대한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하게 되었다. 끝으로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교회가 자립하게 된 원인을 결론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필자는 자립선교에 대한 9가지 교훈 1. 자립선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 2. ‘처음부터’ 자립 원칙을 고수하라. 3.가난하기 때문에 잘시 선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라. 4. 건축비 지원을 받은 교회로 하여금 더 가난한 교회를 돕도록 하라. 5. 교회설립에 성공하려면 중류층 하층부나 하류층 상층부에 교회를 세워라. 6. 현지 교인들에게 선교사가 모든 재정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 마라. 7. 이양을 대비해 현지 교회가 운영할 수 있는 규모와 시설로 교회를 건축하라. 8. 선교 지역의 상황에 맞게 특화되고 융통성 있는 자립 방안을 세워라. 9 완전한 자립이 불가능하더라도, 부분 자립에 대한 계획을 세우라(변창욱, “한국교회의 자립선교 전통과 비자립적 선교행태,” 258-270). 을 7년 동안 실행하여 나가면서 교회를 토착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자립선교의 원리에 따라 교회 크기와 지역 상황에 맞게 자립방안을 수립해 나갔다. 이로써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교회는 자립교회로서 러시아 복음화를 위하여 현지인에 의해 재생산이 일어난 교회가 되었다. 현지인의 성도들을 통하여 부로니짜 자로봐 교회가 건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50km 외곽의 지방도시에 있는 자로바 교회는 지역선교를 위한 선교센터로 숙박시설과 그룹세미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현지 성도들의 헌금으로 기본 건축이 마무리되었고, 지금 내부시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줄리비노 교회 주일학교 학생 안드레꼬바 파샤 세르게이 비취는 6세에 본 교회에서 태권도를 배운 후에 청년으로 성장하여 러시아 청년부 태권도 3위에 입상하였고, 열심히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있다. 미약한 복음의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고, 때가 되면 거두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모스크바 줄리비노 임마누엘교회를 통하여 건축되고 있는 부로니짜 자로바 교회가 러시아 복음화의 재생산 기지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를 섬기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것을 기대한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세대 청년 맞춤선교

        한경훈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50687

        오늘날 우리는 전통과의 단절을, 창조보다는 파괴를, 존재보다는 부재를, 이성보다는 감성을,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기성세대로부터 신세대라고 불리는 청년들은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복판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며 날이 갈수록 기성세대와 담을 쌓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기성세대의 모더니즘 문화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교회를 등지고 그들만의 포스트모던적 세계로 떠나가는 청년들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은 결코 영적으로 궁핍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서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교회는 청년들의 모임을 주관하고 그들의 문화를 생성하는 온상이자 배출구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교회 이외에 청년들의 만남과 관계를 이어주는 수많은 매개들이 생겨나고, 그러한 매개들의 문화적 자극성과 우위성 때문에 청년들은 자연히 전통적인 교회의 시스템에 대하여 고리타분함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 뿐 아니라, 상명하복식의 권위가 가득하고, 일방적이며, 딱딱한 설교와 틀에 박힌 봉사에 염증을 느껴 보다 자유로운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교회는 청년들의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전통적이고 획일적인 방식의 선교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틀에 박힌 주입식 성경공부라든가 총동원 주일, 길거리 전도 등은 아직도 기성 교회가 신세대 청년들의 문화 트랜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신세대의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디지털 코드와 그들을 온라인(on-line)으로 묶어놓고 있는 사이버 세계의 존재는 아직도 아날로그식 오프라인(off-line)의 선상에서 선교를 주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커다란 선교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신세대는 철저하게 포스트모던 시대가 산출한 새로운 인류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세대를 향한 적절한 선교전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는 별도로 포스트모던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신세대는 기성세대처럼 기성복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맞춰 입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세대들에게는 그들만을 위한 포스트모던적 문화 코드와 디지털 코드를 활용한 맞춤선교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신세대를 위한 포스트모던적 맞춤선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문화적이고 디지털적이어야 한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듯이 더 이상 현대 사회 문화의 소비자 내지는 준비 단계를 걷고 있는 차세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문화 영역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의 중심에 있고, 문화 생산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수용자와 참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형성되어진 사이버 공간은 청년들의 또 다른 삶의 자리이다. 따라서 신세대의 문화에 침투하여 차별화된 개인 감성과 참여를 통한 엔터테인먼트 취향의 선교전략을 구상하고, 신세대의 디지털 마인드에 맞추어 사이버 공간을 활용한 양방향 온라인 선교전략을 구축한다면 얼마든지 교회를 떠난 청년들의 발걸음을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선교 콘텐츠 연구 : 바로크 종교음악을 중심으로

        이상대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50687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모든 인식론을 근대 중심적, 서구 중심적 사고가 조작한 문화적 허구로 보고 해체한다. 문화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는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20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적 산업 활동과 결탁한 포스트모더니즘은 21세기 대중문화운동의 권력이 되어졌다. 실상 대중문화란 속이 텅 비어 있는 개념적 범주인데 여기에 각양의 문화 콘텐츠를 담아 인본주의 문화를 이끈다. 선교함에 있어 문화 콘텐츠는 선교 이론적 해석과 성찰, 고찰을 너머 현장에 밀착하여 진리를 전하고자 할 때 유 · 무형의 자산이다. 이 같은 문화 선교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응적 문화로서 바로크음악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 선교의 근거로서의 십자가 신학

        방승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50687

        선교의 위기 시대에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본질, 우리가 새롭게 발견해야 할 기독교 중심은 십자가 신학이다. 필자는 선교의 근거로서의 십자가 신학을 다룸에 있어 먼저 선교의 근거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선교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며 십자가 신학만이 선교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선교의 성서적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두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의 근본 동기가 되어야 하는데 선교의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주장하였다. 십자가 신학은 성경의 시작과 함께 있었으며 창세기에 여인의 후손으로 발꿈치가 상하실 것이라는 예언170)을 비롯한 구약에서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구약에서 예정된 십자가는 신약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신약의 여러 기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증거되고 있다. 먼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여러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복음서 기자들에게 십자가 처형 장면은 광장에서 상연되는 연극과도 같다. 그들은 동일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 네 사람은 높은 위치에서 광장의 각 면에 있는 창문들을 열어 놓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한다. 그들의 보고에는 상당 부분 공통점이 있으나, 각 보고는 자기 나름의 각도에서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기록한다. 마태는 한 쪽 창문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보았고, 마가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았고, 누가는 자비로운 구세주의 모습을 보았으며, 요한은 영광스러운 생명의 수여자의 모습으로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는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증거되는데 히브리서 전체에 걸쳐, 특별히 제사, 제사장직, 언약이라는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들의 중심이 된다. 베드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순종으로 이끄는 언약 수립자,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대속물 제공자, 우리를 죄사함으로 이끄는 우리 죄를 지신 분, 우리를 참음으로 이끄는 최고의 본, 그리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는 높임받은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그의 기록한 서신서들171) 속에 상당히 많이 설명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과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을 위한 구원활동 즉 대속의 차원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했으며 그 근거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으로 삼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의 신학의 중심성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복음을 “십자가의 도”로 정의하고 자기의 사역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정의하였다. ‘십자가’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기초요 내용이고 절정이었고 유일한 자랑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신학이 곧 십자가의 신학인 것이다. 바울의 십자가의 도는 전승되어 장차 종교개혁을 이끌 젊은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루터는 “십자가 신학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외치면서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개혁하는 사상적인 원리가 십자가 신학으로 말미암아 산출되어진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통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고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복음의 재발견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현대 신학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중심점으로 삼고자 하며 그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하여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킨다. 몰트만은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개인적 영적 구원과 그 결과 행해져야 할 기독교인의 교회의 복음전도와 이웃사랑의 순수한 실천의 차원을 강조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고 지향하는 정치신학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현대 신학자 중 또 한 사람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의해 십자가 신학은 계승발전하게 된다. 맥그라스는 기독교의 기초는 십자가이며 기독교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십자가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을 위한 참조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며 그것에 의해 판단된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요 기준이다. 맥그라스는 계속해서 16세기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자들의 동일한 절규였던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핵심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있으며 기독교적 실존에 대한 십자가의 함의를 드러내는 것이 기독교 신학과 윤리와 영성의 주된 기능이며, 사고와 행위 모두는 십자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신학을 오늘의 현대 선교에 적용시키면서 4가지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통전적 선교란 ‘모든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통전적 선교를 요구하는 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못자국의 흔적을 지닌 교회이어야 한다. ‘Missio Dei’의 개념은 하르텐슈타인, 피체돔, 후켄다이크, WCC를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선교는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넘어서서 샬롬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역자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 세계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 견지에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이해하면서 그 변화를 위한 일과 투쟁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바른 하나님의 선교는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상황화란 특정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인 기독교 진리의 빛 안에서 그 자신의 삶을 역동적으로 반성하고 숙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화는 토착화를 배경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바람직한 상황화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되 사회변혁의 기본적인 단계인 자립 교회 설립을 위한 방안도 함께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십자가 신학만이 바람직한 선교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화에 적합한 신학이며 이 신학을 통해서만이 복음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강조될 수 있다. 인류는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명 살림’일 것이다. 생명이라 함은 이 세상의 생명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포함한다. WCC도 JPIC 즉 정의(Justice)평화(Peace)와 더불어 창조질서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을 주된 사역으로 제시하면서 생명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생명 살림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만이 영적인 생명 살림과 더불어 세상에서의 생명 살림을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통전적인 생명살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 신학의 역사는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요한 관심사요 그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은 인류역사 속에서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는 계시의 지식으로만 사유할 수 있기에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