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펼치기
        • 수여기관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조선시대 祿牌 연구

        임영현 한국학중앙연구원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50639

        本論文では、朝鮮時代の禄牌制度と禄牌様式、そして頒禄籤紙を通じた禄俸制の 運用実態を通時的に研究した。禄牌は公文書として文武官員の禄俸受領資格を証明 する。また、禄俸を受領するときに証拠文書として活用され、禄俸を受領したとい う禄俸受領處証である頒禄籤紙が添付された複合的な性格の文書である。今日まで 禄牌研究は、禄牌様式を明らかにすることに集中していた。しかしながら禄牌の大 きさについての検討と頒禄籤紙の研究は不十分である。また禄俸制研究者は頒禄籤 紙を参考せずに、文献史料だけで朝鮮時代の禄俸制を検討した結果、朝鮮時代の禄 俸制の運用実態を把握するには限界を見せた。したがって、本研究では、朝鮮時代 禄俸の発給対象と手順の解明と共に頒禄手順を調べた。そして禄牌様式の検討と時 代や役所にしたがって禄科表記·発給官員·印章·外面表記を調べた。あわせて、禄牌 が大きさを異にする基準について究明した。最後に、正3品堂上官以上の正3品堂下 官以下に分けて頒禄籤紙の大きさと作成方法を確認した後、頒禄籤紙の記録と禄俸 制の禄科を比較·検討した。 朝鮮時代の禄牌制度は高麗時代の制度を受け継いだ。禄牌発給先は、禄官に任命 された役人に限定される。発給役所は、三司→司評府→吏曹と変更しており、1466 年(世祖12年)に王の伝教があって以来、吏曹と兵曹が文官と武官の禄牌発給をそれ ぞれ担当した。頒禄手順は、頒禄日に持参する文書の種類に従って『大典通編』施 行前後に分けて考察した。禄官は『大典通編』施行前には敎旨·禄牌·給禄所志を持 参し、『大典通編』施行後は敎旨と禄牌だけで禄俸を受領することができた。 朝鮮初期に発給された禄牌様式は、高麗時代のことを襲用した。『経国大典』で 禄牌式が法制化される以前では、始面と禄科表記、印章で変化を確認することがで きる。そして『経国大典』で禄牌式が法制化された以降に発給された禄牌は、『経 国大典』の禄牌式に遵守した。しかし、禄科表記·印章·発給官員·外面表記で変化が あった。 官職の正3品堂上官以上と正3品堂下官以下の禄牌は大きさを変えて発給された。堂上官以上の禄牌は、縦×横の長さの平均がそれぞれ112.4×79.2cmであり、堂下 官はそれぞれ45.5×14.4cmである。二種の縦×横の平均は50cm以上の差があり、 朝鮮時代を通じて官職の正3品堂上官と堂下官を基準に大きさを変えて発給され た。 堂下官に限り、18世紀後半から木版式禄牌が発給されており、吏曹と兵曹で は版に刻まれている文字が一部異なっていた。 頒禄籤紙も禄牌と同じように官職の正3品堂上官と堂下官でことなった大きさの ものが発給されていた。前期頒禄は監察と宏興倉役人が引き受けていたので、“分 臺之印”が押された。しかしながら18世紀後半から監察が頒禄業務から退いたた め、それ以降は“廣興倉印”が押された。 堂下官禄牌が木版式に変わった後に堂下 官の頒禄記録は手記で該当月だけを表記する方式に変わった。1851年(哲宗2年)に 発給された黃銑の禄牌に始めて頒賜印が押された以降は、この様式が続いた。 頒禄籤紙の頒禄記録を通じて、朝鮮時代の禄俸制の運用実態を把握することがで きる。朝鮮時代の禄俸制は、一年に2回(1·7月)支給する六朔頒禄制、一年に四回(1· 4·7·10月)支給する四孟朔頒禄制(1439)、そして毎月支給する月俸制(1701)に変化 した。六朔頒禄制は考証することができないが、 禄科の基準がなかったというこ とが分かる。しかし、現在まで調査された禄牌の中では1414年(太宗14年)から 1463年(世祖9年)までは品階を基準に支給しており、1467年(世祖13年)からは官職 を基準に支給された。四孟朔頒禄制は、1439年(世宗21年)に初めて実施された。施 行初期には禄科に基づいて禄俸を支給したが、壬辰倭乱を経て、実際の禄科より少 ない量を支給した。四孟朔頒禄制時期には、1647年(仁祖25年)と1670年(顯宗11 年)に頒禄品目と数量を減らす方向に禄科が改正されたが、実際の頒禄量は禄科に及 ばなかった。 四孟朔頒禄制時期に一時的に月俸を支給したが、実質的に月俸制が 施行されたのは1701年(肅宗27年)であった。四孟朔頒禄制時期より頒禄品目と数量 はさらに減ったが、この時期はまた禄科に準ずる頒禄が行われなかった。そして、 1721年(景宗元年)の改正で量はさらに減り、これは『続大典』に掲載された。18世 紀初期まで『続大典』の禄科に基づいて頒禄が行われたが、19世紀後期の頒禄は 『続大典』の禄科に従わない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본 논문은 조선시대 祿牌 제도와 양식, 그리고 頒祿 籤紙를 통한 녹봉제의 운용 실태를 통시적으로 연구하였다. 녹패는 공문서로서 문무관원의 녹봉 수령 자격을 증명하며, 祿官이 녹봉을 수령할 때 證憑 문서로 활용된다. 그리고 녹봉을 수령하였다는 녹봉 수령증인 반록 첨지가 첨부된 복합적인 성격의 문서이다. 현재까지 녹패 연구는 녹패 양식을 밝히는 데 집중하였다. 그렇지만 녹패의 크기에 대한 검토와 반록 첨지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며, 녹봉제 연구자들은 반록 첨지를 참고하지 않고 문헌 사료만으로 조선시대 녹봉제를 검토한 탓에 조선시대 녹봉제의 운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녹패의 발급 대상과 절차에 대한 규명과 더불어 반록 절차를 검토한 후, 녹패 양식 검토와 함께 시대 및 관청에 따라 달라지는 祿科 표기·발급 관원·인 장·외면 표기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녹패가 크기를 달리하는 기준에 대하여 규명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정3품 당하관 이하로 나누어 반록 첨지의 크기와 작성 방식을 검토한 후, 반록 첨지의 기록과 녹봉제의 녹과를 비교·검토하였다. 조선시대 녹패 발급 대상은 祿官에 임명된 관원으로 한정되며, 발급 기관은 三 司→司評府→吏曹로 변경되었는데 1466년(世祖 12) 전교 이후 吏曹와 兵曹에서 文官과 武官의 녹패 발급을 각각 담당하였다. 반록 절차는 반록 시 지참해야하는 문서에 따라 『大典通編』 시행 전후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大典通編』 시행 이전에 祿官이 녹봉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敎旨·祿牌·給祿所志를 지참했으며, 『大典通編』 시행 이후에는 교지와 녹패만으로 녹봉을 수령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발급된 녹패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을 따랐는데, 『經國大典』에서 녹패식이 법제화되기 이전까지 始面·녹과 표기·인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經國大典』에서 녹패식이 법제화된 이후 조선시대 녹패는 『經國大典』 녹패식을 준행하였으며, 법제화된 이후 녹과 표기·인장·발급 관원·外面 表記에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관직의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녹패는 크기를 달리하여 발급되었다. 당상관 녹패는 세로×가로의 평균 길이가 112.4×79.2cm이며, 당하관 녹패는 45.5×14.4cm로, 세로×가로의 평균이 50cm 이상씩 차이가 났다. 그리고 종친을 제외하고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관직의 정3품 당상관과 당하관을 기준으로 크기를 달리하여 발급된 것을 알 수 있다. 당하관 녹패에 한하여 18세기 후반부터 木版式 녹패가 등장하였으며, 이조와 병조는 版에 새기는 부분이 달랐다. 반록 첨지도 녹패와 마찬가지로 관직의 정3품 당상관과 당하관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조선 전기 반록에는 監察과 廣興倉 관원이 참여하였으며, 인장은 “分臺 之印”이 답인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감찰이 반록 업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廣興倉印”이 답인되었다. 당하관 녹패가 목판식으로 바뀐 이후, 당하관의 반록 기록은 해당 월만 手記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변한 뒤, 조사된 녹패 가운데 1851년(哲宗 2) 黃銑 녹패부터 頒賜印으로 반록 기록을 표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녹봉제는 일 년에 두 차례(1·7월) 지급하는 六朔頒祿制, 일 년에 네차례(1·4·7·10월) 지급하는 四孟朔頒祿制(1439), 그리고 매월 지급하는 月俸制 (1701)로 변화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녹패에 첨부된 반록 첨지의 반록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녹봉제의 운용 실태 고찰해 보았다. 육삭반록제 시기에는 녹과에 일정한 기준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 초기 녹패를 통해 1414년(太宗 14)부터 1463년(世祖 9)까지는 품계를 기준으로 반록하였고, 1467 년(世祖 13)부터는 관직을 기준으로 반록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39년(世宗 21)에 처음 시행된 사맹삭반록제는 시행 초기에는 녹과에 준하여 녹봉을 지급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제 녹과보다 적은 수량을 지급하였다.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1647년(仁祖 25)과 1670년(顯宗 11)에는 반록 품목과 수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녹과를 개정하였지만, 실제 반록 수량은 녹과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시로 월봉을 지급하고, 반록 수량을 감하는 등의 조처를 하였다. 임시로 시행했던 월봉 지급은 1701년(肅宗 27)에 제도화되었다. 사맹삭반록제 시행 초기와 비교하면 반록 품목과 수량이 상당히 줄었고, 녹과에 준하는 반록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1721년(景宗 元年) 수량을 더 줄여 녹과를 개정하였고, 이는 『續大典』에 실렸다. 18세기 초반까지 『 續大典』 녹과가 준행된 것을 반록 첨지와 문헌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 반록은 『續大典』 녹과에 준하는 수량을 반록하지 못하였다.

      • 조선에 전래된 武英殿聚珍版書의 서지적 분석

        苗凱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8 국내박사

        RANK : 234303

        武英殿建於明朝樂年間(1403-1424),曾為政治權利的中心地。清朝康熙年間 (1662-1722)設立武英殿書局。康熙四十年(1701)以後,武英殿開始大量發行書籍。1772年將《永樂大典》的佚書,各省的採集本,武英殿刊本,匯為《四庫全書》。由於工程 量浩大久費時日,便從較為稀缺的宋元版本和《永樂大典》的佚書開始撰修。1773~1803 年共刊印了138種書籍,其中木版本4種,木活字本134種。這138種書稱為《武英殿聚珍 版書》。《武英殿聚珍版書》是清內府規模最大的一次木活字印刷活動。在中國木活字印 刷史和典籍史上具有重要意義。武英殿聚珍版書刊印完成後被發往東南五省并允許地方 翻刻,翻刻本為木版本。翻刻本與殿本在樣式上非常相似,也稱為《武英殿聚珍版書》。 由於時代的動蕩與變遷,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多為散本。國內足本該叢書有多少 部,並沒有具體的統計。此外,韓國,日本,美國等國家也有不同數量的相關書本。 本論文的主要研究對象為韓國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研究目的在於調查韓國現 存該叢書的數量及內容,分析相關目錄,了解叢書的購買時期和東傳的過程,以及明確該叢書對韓國產生的影響和意義。 韓國該叢書的收藏機構主要集中在韓國學中央研究院藏書閣,首爾大學奎章閣韓國 學研究院,韓國國立中央圖書館,東亞大學圖書館,全南大學圖書館,高麗大學圖書 館。韓國的現存本按版本分為聚珍版和翻刻木版本,其中以木版本居多,聚珍本主要藏於首爾大學奎章閣韓國學研究院。從內容來看,集部書比經史子各部的書數量上略少,並且現存本多為頁數相對較少的著作,袖珍本也較多。這主要受印刷效率,製作成本, 便攜性等方面的影響。此外,韓國還藏有兩本相關目錄,用途分別為購書清單和點檢用。 韓國現存本的購入時間上限為1774~1781之間。18世紀的朝鮮重視文化,這無疑 是該叢書購入過程中的的催化劑。1773年朝鮮使臣嚴璹與中國文人關於《四庫全書》筆 談記錄可視為《武英殿聚珍版書》話題的開始。朝鮮對《四庫全書》一直具有濃厚的興趣, 正祖曾下令購買《四庫全書》,此後林濟遠, 李鼎運, 沈能翼等人不斷向朝鮮報告《四庫全書》的消息。此外,李德懋也向中國文人潘庭筠尋求過《武英殿聚珍版書》的目錄。 《武英殿聚珍版書》流傳到朝鮮后產生了重要影響。正祖下曾令按《武英殿聚珍版程 式》中的木活字製作方法製作生生字和整理字。此外,還有私人製作的金陵聚珍字等。與此同時韓國現存的兩本目錄也具有重要的意義,並且得益于該叢書的朝鮮東傳韓國的 藏書也更加豐富。 武英殿은 明代 永樂年間(1403-1424)에 설립되어 한 때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기관이다. 清代 康熙年間(1662-1722)에 武英殿書局이 설립되어 문헌 간행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康熙四十年(1701)이후, 무영전에서 대량의 도서를 간인하기 시작 하였다. 乾隆三十七年(1772)에 『永樂大典』의 佚書, 각 省의 採集本, 무영전 간본을 수집하여 『四庫全書』를 편찬했다. 『사고전서』는 양이 방대해서 모두 撰修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판본이 드문 판본과 『영락대전』의 일서부터 먼저 간인하였다. 간인 작업은 乾隆三十八年(1773)에 시작하여 嘉慶八年(1803)까지 138종의 책(목판본 4종, 목활자본 134종)을 인출하게 되었다. 이 138종 책을 『무영전취진판서』라고 한다. 『무영전취진판서』는 淸內府에서 시행한 목활자 인쇄 중 규모가 제일 큰 인쇄활동의 결과물이다. 중국 목활자 인쇄사와 典籍 보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중국 일부 지방의 출판사에서도 번각하였으며, 모두 목판으로 인쇄했다. 번각본 총서와 무영전본 총서의 양식이 많이 닮아서 내부의 인쇄분이 內聚珍本, 번각인쇄본은 外聚珍本이라고 한다. 하지만 淸代의 멸망과 사회의 변동 때문에 『무영전취진판서』가 많이 흩어졌다. 지금까지 완질의 총서가 얼마나 현존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무영전취진판서』는 중국 외에도 한국, 미국, 일본 등 몇 몇 나라에서 확인된다. 본 연구는 한국에 현존하는 『무영전취진판서』를 대상으로 삼았다. 現存本의 내용과 수량 및 판본을 조사하고,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의 역할과 총서의 구입 시기 및 전래 경로를 규명하며, 이 총서가 한국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국에 『무영전취진판서』의 주요 소장처로 확인된 곳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동아대학교 한림도서관,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이다. 현존본을 판본으로 분류하면 취진본과 목판본으로 나뉜다. 또 취진본은 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經·史·子·集部의 책은 다 있고, 集部 책의 수량은 經·史· 子 각 部의 책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또 現存本은 모두 冊數가 상대적으로 적은 책이고, 奎璧本도 많이 있다. 이유는 인쇄의 효율성, 제작비용, 편의성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이 두 종 있다는 것을 확인되었다. 두 서목의 역할은 각각 購書單子와 點檢用이다.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무영전취진판서』의 구입 시기 상한은 1774~1781 사이이 다. 18세기, 문화를 중시하는 사회배경은 『무영전취진판서』 구입하는 데의 촉매 역할을 했다. 1773년, 조선 사신 嚴璹가 중국문인과 한 『사고전서』 관련 筆談 기록은 조선 『무영전취진판서』 얘기의 시작으로 이후에도 조선은 『사고전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정조는 명을 내려 『사고전서』를 사게 했고, 林濟遠, 李鼎運, 沈能翼 등이 계속 『사고전서』의 편찬 소식을 전했다. 李德懋도 중국 문인 潘庭筠에게 해당 서목을 구한 적이 있었다. 『무영전취진판서』의 조선 전래 후에 『武英殿聚珍版程式』의 활자제작방식이 生生 字와 整理字의 제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개인이 활자를 제작할때 취진이라는 용어가 수용되기도 하였다. 또 장서각에 소장된 서목은 구서단자로써그 당시에 수입책의 가격을 파악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규장각 장본은 총서본의 판본, 완질인지 낙장본이지 확인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영전취진판서』 의구입으로 인해 한국의 중국저술의 장서가 풍부하게 되었다.

      •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데이터 아카이브 운용 사례 연구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바로알리기'사업을 중심으로

        하소라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3 국내석사

        RANK : 234303

        최근 디지털 환경을 토대로 하는 공공외교, 즉 ‘디지털 공공외교’가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공공외교의 디지털화와 디지털 전환이 엄밀히 구분되지 못하고 있고,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에 있어 공공기관의 역할에 주목한 사례연구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바로알리기’사업을 중심으로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요건과 공공기관의 역할을 고찰했다. 서론인 제1장에서는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현상을 고찰한 연구들을 검토하였다. 제2장은 ‘공공외교’에 대한 정의와, 공공외교 활동이 온라인에서 시스템화 되어 이뤄지는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개념을 검토했다. 제3장에서는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여러 공공기관 중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디지털 전환 사례를 살핀다.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디지털 전환은 온톨로지 설계, 데이터 아카이빙 두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온톨로지와 아카이빙 데이터를 분석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이 아카이브의 확장과 공유를 촉진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제4장에서는 이 사례의 시사점을 토대로 공공기관이 디지털 아카이빙을 병행하는 업무 수행을 통해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면서 고객과 공중의 참여를 촉진하여 공공외교의 주체와 활동을 다양화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In “public diplomacy,” one of the three elements of the Republic of Korea's diplomacy, “digital public diplomacy," which is based on the recent digital environment, has been attracting attention. Nonetheless, the digitalization and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are not strictly distinguished, and there are hardly any case studies focusing on the role of public institutions in the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This paper examined the current status and directions of digital public diplomacy, by analyzing the Understanding Korea Project carried out by the CEFIA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Chapter 1, which constitutes the introduction, reviewed research studies examining the digital transformation phenomenon of public diplomacy, and showed that there have been attempts to empirically analyze whether digital transformation contributes to a nation's innovation growth, as well as attempts to conceptualize such a phenomenon. Chapter 2 looked at the definition of “public diplomacy” proposed by the Edward Murrow Center for Public Diplomacy, and the concept of digital transformation in which activities of public diplomacy are systematized and conducted online. After dealing with the roles of many different public institutions responsible for public diplomacy, Chapter 3 analyzed the ontology of the Understanding Korea Project conducted by the CEFIA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from the perspective of digital transformation and then explored the possibility of public diplomacy on metaverse through Mozilla Hub, which emerged recently. On the basis of such analyses, Chapter 4 suggested that public institutions can improve the transparency and efficiency of information on diplomacy, simultaneously providing various content and diversifying the agents and aspects of public diplomacy. This study is theoretically significant in that it proposes a kind of 'road map' for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with public institutions assumed as its practitioners, and at the same time, it has limitations in that this study just points out the necessity of detailed studies of digital transformation of the sub-elements of public diplomacy, namely cultural public diplomacy, knowledge diplomacy, and policy public diplomacy. However, this study is evaluated to be of significance in that it examines the specific roles of public institutions in the process of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in the information society.

      • 조선후기 중앙군영의 착호(捉虎) 활동과 의의

        배성열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2 국내석사

        RANK : 234287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tiger hunting activities by the central military camp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In the past, disasters by tigers and leopards happened often in the Korean Peninsula. In Joseon, the government put in efforts to reduce such disasters upon the foundation of the state and continued these efforts into the latter part of Joseon, when tiger hunting activities were based on Chakhojeolmok. The number of tigers was reduced by the joint operation of the royal forces and local residents in local areas. In the capital city and its surrounding areas, the central military camp had the job of hunting tigers. The central military camp started its full-blown tiger hunting activities based on Chakhojeolmok, published in 1699 (25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According to the book, the central military camp had to deal with disasters around the Gyeonggi Province, but real issues restricted the principal scope of Samgunmun's activities to the capital city of Hanyang and the sites of royal tombs. In these areas, the central military camp reduced the number of harmful tigers through organized hunting by mobilizing dozens of hunters and by a few outstanding hunters over two centuries or so. Over 65% of the tiger hunting activities of the central military camp took place at royal tombs because the densely wooded sites of royal tombs became tiger habitats amid nationwide deforestation. With royal tombs as their base, tigers threatened human life and property across vast areas. Royal tombs became the origin of disasters by tigers in the capital city and Gyeonggi Province. During this period, kings made visits to the royal tombs frequently, which made it more important to accompany the kings during the management of royal mausoleums and their visits to royal tombs than in the previous period. Catching a tiger in these areas was an important activity to protect the people in Seoul and Gyeonggi, manage the royal mausoleums, and safeguard the kings. 본 논문은 조선후기 중앙군영에 수행된 착호(捉虎, 호랑이사냥) 활동에 관하여 다루고자한다.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표범에 의한 호환(虎患)은 흔하게 일어나는 재해 중 하나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이러한 호환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조선후기에도 지속되었다. 조선후기 착호활동은 「착호절목(捉虎節目)」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지방에서는 관군과 지역민들의 협력 하에 호랑이를 줄여나갔으나 나라의 중심인 도성과 그 주변부에서는 중앙군영에 의하여 호랑이 사냥이 이루어졌다. 중앙군영의 착호활동은 1699년(숙종 25) 제정된 「착호절목」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중앙군영은 경기도 전역에서 발생하는 호환에 대처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삼군문의 주요 활동지역은 사실상 한양 도성과 왕릉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제한되었다. 해당 지역에서 중앙군영은 수십명의 포수들을 동원한 조직적 사냥이나 몇몇 우수한 소수의 포수들에 의한 사냥을 통하여 약 2세기 동안 해로운 호랑이(惡虎)들을 줄여왔다. 이러한 중앙군영의 착호활동은 65% 이상이 왕릉에서 행해졌다. 이는 전국적으로 산림이 황폐화되는 가운데, 수목(樹木)이 우거진 왕릉의 소재지는 호랑이들의 서식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들은 왕릉을 거점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인간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다. 따라서 이곳은 도성과 경기지역에서 발생하는 호환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왕들의 능행(陵幸)이 잦은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전시기와 비교할 때, 능소의 관리와 능행 시 왕의 수행 업무가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잡는 것은 서울과 경기의 민인(民人)들을 지키고 동시에 능소의 관리와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활동이었다.

      • 조선 후기 외교문서의 작성에 관한 연구 : 장서각 왕실 고문서를 중심으로

        정태란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2 국내석사

        RANK : 234287

        본 논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외교문서 49건을 대상으로 외교문서의 작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이 문서가 조선시대 대청 사대문서를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생성되었는지를 구명한 연구이다. 조선은 명과 청에 事大하는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사행을 통해 외교적 사안을 논의하고 해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바로 사대문서였다. 사대문서는 사행의 성격에 따라 문서의 유형과 명칭이 구분되었고, 그 작성과 과정은 매우 엄정하게 진행되었다. 사대문서는 제술관의 제진, 임금의 계하, 승문원의 선사 및 정서, 초본과의 사대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작성되었고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거듭 대조 및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처럼 그 문서가 지닌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1882년에 일괄 작성된 사대문서의 초본은 당시청으로 보낸 사행의 면모와 외교문서의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이 문서는 초본 단계의 문서이므로, 사대문서의 작성 과정을 학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장서각 소장 외교문서에 나타난 기초적 특성을 분석하고, 사대문서의 작성 과정을 살펴보면서 장서각 소장 외교문서가 과연 어느 단계에 생성되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조명하였다. This thesis analyzes 49 documents that are envoy dispatch documents stored in the Jangseogak Archives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nd examines the process of writing diplomatic documents in relation to them, as the study to find out which stage in the series of process of writing diplomatic documents the relevant documents are in. While establishing toadysm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Joseon discussed and resolved diplomatic issues with China through envoy dispatch. It can be said that the toadysm document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is process. The toadysm documents stipulated the names of the envoy dispatch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names, and classifications of the documents, and accordingly, careful work was carried out in the preparation and system of the documents. The toadysm documents were written several times through the document examination of writing officer, the king’s proclamation, drafting and official re-writing of the Diplomatic Documents Office, and toadysm with drafts, and they were collated and reviewed several times before arriving in Beijing. However, despite the importance of the toadysm documents, presently few physical documents have been passed on due to their specificity. Among these, the abstract of the toadysm documents written in 1882, stored i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re the materials that can show what important diplomatic issues were at the time at a glance. However, since this document is in the draft stage, there is enough room for discussion as to which part it belongs to in the process of writing the toadysm documents. Accordingly, this study analyzed the stylistic characteristics and unique characteristics of the original toadysm documents in the collection of the Jangseogak Archives and tried to estimate the stage at which the actual documents were located by looking back at the process of writing the toadysm documents from the original sources and so on.

      • 조선시대 傳令 文書 연구

        박경수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6 국내석사

        RANK : 234287

        This study evaluated the Jeonryeong(傳令) issued as a document in Chosun Dynasty from paleographical aspect. The order was closely related to a military camp. Therefore, it had various issuers, including a king, provincial governors, and mayors. Moreover, local governors used it as an administrative document. They issued it and send it to Imjang(任掌) at local towns in the form of direction, appointment, or notification. Imjang delivered the order to local citizens. When a governor announced to citizens, the notice followed the form of order or Bang(榜). Bang resembled the one, published at Chu Hsi(朱熹)’s Namkang(南康) during Song Dynasty. A governor composed a Chasabaeja(差使牌子) to send Chasa(差使) to chase and arrest criminals. When a governor appointed officers, he issued a baeja(牌子), a chajup(差帖), and an order to appoint a government officer, local officer, and a military personnel, respectively. Common administrative orders were mainly related to tax collection, lawsuits about locating tombs to others’ land, digging corpse out, and keeping people out, and chasing and arresting criminals. Therefore, an order could be considered as one of documents to realize the administrative, judicial, and military rights of governors. Currently, there are about actual 800 orders. Seoul National University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nd Academy of Korean Studies Library store most of them. In addition to actual orders, there are many others in the form of registration with containing only their contents. This study was valuable because it investigated the nature and contents of order documents, which had not been fully understood, in earnest. 본 논문은 조선시대에 문서로 발급한 傳令을 문서학적으로 측면에서 연구하였다. 전령은 軍營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발급자가 군권을 가진 국왕, 관찰사, 수령까지 다양하였다. 그리고 외방의 수령은 행정문서로 사용하여, 面里의 任掌에게 지시, 임명, 고시라는 형태로 발급하여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였다. 수령이 백성들을 曉諭하는 것은 송나라 시대 朱熹의 南康에서 발급한 榜을 본따서 전령이나 방의 형태로 하였다. 수령이 민인을 추착하기 위해 차사를 보내는 것은 差使牌子로 작성하였다. 수령이 관하의 직원을 임명하는 것에 관아의 관속은 牌子로 하고, 향촌의 임장은 差帖으로 하고, 군직과 관련해서는 전령으로 발급하였다. 일반적인 행정지시의 전령은 세금을 督捧하는 것과 산송과 관련하여 偸塚 督掘과 勿侵 지시, 民人 推捉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령은 수령의 행정, 사법, 군사권를 실현하는 문서 중에 하나로 볼 수 있겠다. 하달하는 행정문서는 關, 帖, 甘結, 전령, 牌子가 있다. 이들은 행정문서로서 그 내용이 유사하여 아직까지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였다. 여러 사료들을 살펴보면, 관과 첩은 정부의 공식적인 행정절차를 밝는 문서로 보인다. 반면 감결은 중앙정부에서는 낭청이 발급하고, 외방에서는 주로 관찰사가 고을수령에게 보내는 문서이다. 간혹 수령이 전령처럼 고을 임장에게 발급하기도 한다. 이는 속사에 보내는 문서로서, 간소한 행정절차속에 빠른 집행을 할 수 있다는 특색을 가진다. 배자는 尊者가 賤者에게 보내는 문서로서, 중앙정부의 당상이 하속의 천한 사람에게 발급하거나, 수령이 관속들에게 주거나, 일반 양반이 노비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관과 첩을 제외한 감결, 배자, 전령은 공식적인 행정절차가 아닌 편의적으로 발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체는 임명, 지시, 標信이라는 측면에서 전령과 용도가 유사하다. 이 둘간에 분명한 구분이 아직까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단지 뚜렷한 점은 우선 수취인이 幼學의 신분이냐 아니냐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수령이 신분이나, 문서의 편의적인 사용이라는 측면도 감안해서 더 살펴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 현존하는 전령의 실물문서는 800여건 정도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많은 수를 관장하고 있다. 실물전령 외에 그 내용만 기록한 등록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많이 있다. 본 논문은 그 동안 규명하지 못하고 있던 전령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시도한 연구물이라는 점에 의의를 두겠다.

      • 조선전기 中央軍 軍職의 변천과 그 성격

        김병륜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7 국내석사

        RANK : 234287

        본 논문은 조선전기 中央軍 軍職의 변천 과정과 그 성격을 규명한 논문이다. 조선전기의 中央軍 軍職은 中央軍의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전투를 수행할 수도 있는 직책이었다. 軍職을 일종의 ‘계급’으로 인식하는 견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원래부터 직무가 없었던 직책이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조선전기 中央軍 軍職은 太祖朝의 10衛부터 世祖 이후의 五衛에 이르기까지 中 央軍에 소속된 각급 부대 혹은 그와 연관된 군사조직에 설치된 ‘西班 京官職 중에서 上護軍, 大護軍, 護軍, 司正, 副司正, 司果, 副司果, 司猛, 副司猛, 司勇, 副司勇 내지그 前身 및 그에서 分化된 衛將·部將·旅帥 등의 직책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같은 軍職은 원래 ‘외침을 막는 禦外와 임금을 지키는 禁衛를 담당하고, 이를 위해 필요할 경우 중앙군에 소속된 각급 부대 및 유사시 동원된 卒伍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내지 將兵之任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이 같은 軍職이 조선전기에 변화해 간 양상에 따라 高麗末과 연속성이 있는 朝鮮 太祖朝, 甲士에 대한 軍職 수여로 軍職의 遞兒職化와 軍職의 지휘관 기능 약화 현상이 나타나는 太宗~端宗朝, 五衛體制의 출현이후 衛將·部將·旅帥 등 새로운 성격의 軍職이 나타나는 世祖朝 이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은 1392년(태조 1년) 7월 中央軍을 10衛50領으로 재편하고, 上將軍부터 正에 이르는 4,000여 職의 軍職을 설치했다. 일부 명칭 변경은 있었으나 기본적인 구성과 역할은 『高麗史』 百官志나 兵志에 나오는 2軍6衛 西班-武班職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건국 직후 鄭道傳 등은 직무를 수행할만한 경력·능력이 없는 사람이 軍職을 차지하고 있는 軍職의 虛職化를 개선하려 했다. 이를 위해 選兵制를 도입하려했지만 4,000여 職에 달하는 軍職에 적합한 사람을 단기간에 충원하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은 1400년(태종 즉위년) 이처럼 李成桂와 李芳遠의 親兵·私兵적인 성격을 지닌 甲士들에게 軍職을 수여하고, 1,000명 단위로 교대로 근무하면서 輪番受祿할 수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軍職 중 상당수가 遞兒職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지휘관이란 軍職의 본질적 성격을 생각하면, 그 직책을 교대로 근무하게 하는 것은 軍職의 임무 수행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실제로 戶曹判書 李膺 등은 太宗10년(1410)에 “어찌 祿을 받는 자로 하여금 교대로 上下番이 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비판했다.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甲士들이 교대로 軍職을 가지게 하는 조치는 계속 시행되었다. 軍職의 虛職化를 부분적으로 개선하여 당장 侍衛·入直에 쓸 수 있는 정예 兵種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軍職이 유사시에 지휘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甲士들이 교대로 軍職을 맡게 되는 이상 지휘관 역할을 맡아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兵書 강습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兵曹는 太宗 11년(1411) 甲士들에게 兵書 강습을 시키자고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太宗은 “병서를 가르치는 것은 장수를 구하는 바인데, 무엇 때문에 모조리 軍士들에게 다 그 법을 배우게 하느냐.” 고 반대하였다. 이 같은 여러 조치들은 軍職의 지휘관적인 성격을 약화시키고 정예 군병·군졸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처럼 각급 軍職이 지휘관이 아니라 하나의 정예 전투원, 일종의 특수 兵種으로 파악됨에 따라 軍職 편성기준도 변화했다. 太祖朝까지의 軍職 편성에 비해 世宗 이후 軍職 편성에 불규칙성이 심화되는 것은 그 같은 배경 속에 나타난 현상이다. 文 宗朝의 中央軍制 개편인 ‘衛領改制’에서 軍職을 기준으로 領을 편성하는 것이 아니라 甲士·銃筒衛 등 兵種별로 領을 편성한 것도 지휘관 성격의 약화가 초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甲士에 대한 軍職 제수와 그에 따른 軍職의 遞兒職化 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지휘관 성격 약화는 ‘한정된 財政 기반 위에서 당장 활용할 정예 병사를 얻기 위해 지휘관 정원 유지에 필요한 財源을 轉用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甲士의 우수성은 군사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경제적 보상에서 출발하는 것임에도, 추가적 財政 투입 없이 단순히 甲士의 정원 확대만으로 정예자원을 추가 확보 하려 한 결과, 오히려 甲士의 질 저하, 그리고 그와 직결된 軍職의 질 저하를 가져왔다. 조정에서도 공공연히 “더 이상 甲士는 정예가 아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런 수준의 甲士라면 전투원은 물론 지휘관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려워지게 되었다. 軍과 전혀 관련 없는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도 軍職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非軍務 軍職 遞兒職이다. 여말선초 軍職의 虛職化를 우려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世宗 朝이후 非軍務 軍職 遞兒職을 공공연히 제도화하게 된 것은, 결국 甲士에 대한 軍 職 제수 이후 軍務 軍職 遞兒職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軍職의 지휘관 기능이 약해지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때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世祖(재위 1455~1468)는 1457년에 中央軍을 5衛25部로 개편했다. 이때 개편되고 成宗朝에 『經國大典』에 반영되면서 최종적으로 법제화된 군제를 흔히 五衛體制라 부른다. 五衛體制를 軍職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五衛體制에서 衛將과 部將이란 새로운 軍職을 신설한 것은 『新陣法』, 『陣法』 같은 兵法書에 맞추어 中央軍을 개편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軍職의 遞兒職 전환으로 기존의 軍職이 더 이상 지휘관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지휘관 성격임을 분명히 하는 새로운 軍職인 衛將과 部將을 만들었다는 측면이 더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五衛體制에서는 여말선초 이래 연속성을 지니는 上護軍~副司猛 등의 전통적인 軍職과 새롭게 신설한 衛將·部將 등 계통을 달리하는 軍職이 공존했다. 새롭게 신설된 상설직으로서의 部將은 품계가 너무 낮아, 대규모 병력 동원과 그 대규모 동원된 병력을 지휘하기 위한 다양한 품계의 다수 軍職이 필요한 대규모 전쟁에 대응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旅帥 등은 『陣法』에 따르면 125명을 지휘할 수 있는 자였으므로, 軍職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성격의 직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經國大典』 兵典 의 五衛의 軍職으로 정식으로 편제되지 못했다. 둘째, 軍務 軍職 遞兒職, 즉 遞兒職 형태로 軍職을 제수 받은 兵種들의 비율도 계속 높아졌다. 최종적으로 『經國大典』 기준으로 甲士의 총 정원은 1만 4,800職, 그중 遞兒職을 받는 자도 2,000職으로 정해졌다. 겸직인 衛將 12職을 제외한 전체 軍職이 3,236職임을 감안하면 軍職 중 적어도 2/3가 甲士에게 할당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조선전기 武科 방목에서 甲士 출신 무과 합격자의 비율은 두드러지게 낮았고, 이런 甲士의 質的인 劣化는 軍職의 劣化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文宗朝의 衛領改制 단계만하더라도 軍職을 가진 甲士들은 각 衛에 분산되었지, 특정 衛에 통합되지 않았다. 五衛體制에서 甲士를 義興衛로 모두 집결시킨 것은 衛將·部將 외에 기존 軍職者들에게 지휘관 기능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하나의 정예병종으로서 역할을 기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軍職을 실제 군사 업무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非軍務 軍職 遞兒職은 五衛體制 성립이후 『經國大典』 같은 법전에 명문화되어 91職이 있었지만, 법전에 명시되지 않은 非軍務 軍職 遞兒職도 존재했다. 이처럼 五衛體制가 한계점을 가지게 된 이유는 將兵之任, 즉 지휘관 역할을 맡은 직책이라는 軍職의 원래 기능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당장의 侍衛·入直 등에 충당하는데 만족하는 부분적이고 임기응변식 개혁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is aimed to examine the transition process of Central Army(中 央軍) in the early Joseon(朝鮮) period based on Gun-jik(軍職). Joseon has reorganized its Central Army into Sip-Wi-Osip-ryeong(十衛五十領) in July 1392, and established more than 4,000 Gun-jik newly from Sangjanggun(上將軍) to Jeong(正). Gun-jik of the early Joseon period was the position that performed the role of Commanding officer of Central Army and took part in actual fighting. During peace time, it was in charge of si-wi(侍衛) and ip-jik(入直) for the King, but during a war when military force was mobilized it assumed the role of defending the capital and repelling the enemy. Jeong Dojeon(鄭道傳) and his colleagues made an attempt to improve Gun-Jik of early Joseon period that was filled with personnel who had no relation with the military or were not capable of carrying out military duties properly by introducing seonbyeongje(選兵制) or selective recruitment system, but to recruit more than 4,000 qualified Gun-jik in a short period of time was not easy. In 1400, King Taejong(太宗) awarded Gun-jik to 1,000 gapsa(甲士), and made them serve in shifts with a stipulation that they will be paid Nok-bong(祿俸) only when they serve in Gun-jik. Obviously, this system had positive aspects in a situation where non-qualified personnel occupied the positions of Gun-Jik. However, as the cycle of shift service was too long, it had a defect of lowering military preparedness among others. The reason this measure was adopted was that, despite shortcomings, it was able to secure required elite soldiers in a large scale who can be used in short notice for si-wi and ip-jik duties. It seems that, in this, the fact that Gun-Jik could assume the position of Commanding officers during an emergency was not taken into consideration seriously. Since then, as the maximum number of gapsa was increased, the tendency of Gun-jik being replaced by Che-A-Jik(遞兒職) was accelerated. And along with this, organizational standard of Gun-Jik also underwent a change. The fact that irregularity is increasingly notic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世宗) and thereafter is not unrelated with this phenomenon. King Sejo(世祖) reorganized Central Army into Owi(五衛). With the introduction of this Owi system(五衛體制), a dualization phenomenon began to appear in which the traditional Gun-jik since the period of Koryeo was employed together with 『Sinjinbeop(新陣法)』, which was introduced by King Munjong(文宗) and modified by King Sejo, with an addition of newly established wijang(衛將) and bujang(部將) to match with the newly designed military strategy. But the official rank of bujang that was newly established was too low and the number of new bujang appointed was too small to carry out a large-scale warfare. Under Owi system, all gapsa were placed under the command of Uiheungwi(義興衛). This shows that, instead of expecting them to serve as Commanding officers, these gapsa were expected to serve as simple elite soldiers. Furthermore, newly established lower Gun-Jik such as yeosu(旅帥) was too lowly to perform the role of a Commanding officer adequately. This kind of Gun-Jik was institutionalized with the compilation and implementation of 『Gyeongguk daejeon(經國大典)』. In 『Gyeongguk daejeon』, the maximum number of Gun-Jik was 3,236, of which 3,005 Gun-jik was Che-A-Jik, an extremely high ratio. Of these, 2,000 Gun-jik was allocated to gapsa to perform the duty of actual command officers, an obvious limitation for the job. Furthermore, examples of non-military personnel who were appointed to high ranks of Gun-jik as sanghogun was not infrequent. The reason why this Owi system had such a limitation was that the original role of Gun-jik to serve as Commanding officer was not fully recovered since the measures of innovation remained as a partial innovation, as evidenced by commissioning of Gun-jik to the duties of si-wi and ip-jik.

      • 門中古文書 디지털 아카이브 구현 연구

        김하영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5 국내석사

        RANK : 234287

        This study looked at the historical document and knowledge information approaches and utilization plans in order to enhance the use of digitalized historical document materials and accelerate the expansion of knowledge through association of various konwledge elements. The ‘historical document,’ objects of this study, are the data investigated and collected from the families scattered around the country for about thirty years by Jangseogak (藏書閣) Archiv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s the lives of kinsfolk are recorded in these documents, members of the kinsfolk are the subject in producing the documents and also has status as the object. In the first place, I analyzed the composition of ‘Korean Historical Document Center(韓國學資料센터)’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which is our representative digital archive of historical documents, in order to present new approaches to historical document studies that might be used to reach the truth of the life of kinsfolk by unfolding the contents of historical document more clearly. Based on this, this study set individual kinsfolk as unit of service model for presenting the correlation between members of kinsfolk and historical document data. For the purpose of studey, I chose ‘Bunjaegi(Property Records or Records of Property Inheritance)’ document which is very closely associated with personal information of pedigree among various genres of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the kinsfolk as primary data of this study. And more specifically, this study set the historical document from the 'Ocheon family'(烏川家) of ‘Gwangsan Kim Clan'(光山金氏) which occupied the most in Bunjaegi documents. I made an intensive analysis of 27 documents from Kim Mu(金務) to Kim Gwanggye(金光繼), grandson of Kim Hyoro(金孝盧) - eight generations - and drew database design plans for linking the information of members of kinsfolk with historical documents. As a result, the ontology consisted of six classes such as person, official institutes, historical document, inheritance, slave, and land -content factors appearing in historical document. And as semantic elements that are the connecting nodes of semantic relation network, five node data - person, official institutes, historical document, inheritance, and slave, - were set and the connection relation between individual nodes, for example, between persons, between documents, and between slaves was expressed with previously defined relation. Furthermore, the relations between document-person, between person-inheritance, between inheritance-document, between slave-inheritance, and between slave-person were also defined depending on the rule and systematically organized into appropriate database for implementing semantic web. And then, in order to verify the contents, relation network database was implemented using the graph database management software (Neo4j). The visualization data presented as a result of a series of the database compilation suggests that the knowledge information from various resources can be linked and expanded, revealing new meaning in the data relation network without limiting to media in which it was originally contained. 이 연구는 문중 소장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발전적인 모델을 보이기기 위한 것이다. 종래의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는 고문서의 디지털 사본을 온라인 상에서 제공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고문서의 외형을 보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분석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 정보 아카이브의 실험적인 모델이다. 연구의 대상자료인 ‘고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이 30여 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門中으로부터 조사·수집해 온 자료들로, 고문서 안에 문중의 삶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문중 구성원들은 고문서 생산의 주체이자 객체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본 연구에서는 고문서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문중의 삶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는 고문서 연구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먼저 대표적인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고문서자료관’의 구성을 분석하였다. 대상자료로는 다양한 장르의 문중 고문서 중에서도 가장 밀도 있게 가계(家系)의 인적 정보와 결부되어 있는 문서인 ‘분재기류’를 선정였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문중 고문서 가운데 분재기류의 비중이 큰 ‘광산 김씨 오천가’의 고문서와 그 문중 가계 정보의 기록인 ‘光山金氏族譜’를 연구 대상으로 하되, 분재기류 문서 중 김무(金務)로부터 김효로의 손자 김광계(金光繼)대까지 8대에 걸친 27편의 문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문중 구성원의 가계 정보와 고문서의 연계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설계안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인물, 관부, 문서, 재산, 노비, 토지로 구분된 6개의 클래스(Class)와 그 클래스에 속하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할 수 있는 관계(Relation) 서술어, 개별 개체의 성격을 보이기 위한 데이터 속성(Attribute), 관계성의 성격을 보충해서 설명하는 데 필요한 관계 속성(Relation Attribute) 등을 설계하였다. 이와 같이 설계된 문중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온톨로지에 따라 광산 김씨 오천가 고문서와 족보의 내용을 디지털 지식 정보 데이터로 편찬하고, 이를 통해 이 데이터 모델의 실효성을 검증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제시한 문중 고문서 온톨로지는 광산 김씨 오천가 문중 고문서뿐 아니라 유사한 성격의 문중 고문서를 정보화 할 때에도 데이터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된 데이터는 시각화 기능을 지원하는 소트웨어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그래프로 전환될 수 있고, 그러한 방법으로 데이터 관계망 속에 담긴 의미를 더욱 용이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고문서를 중심으로 전통시대 문화 연구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