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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각성운동이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에 미친 영향 : 초기 한국선교사의 신학과 신앙을 중심으로

        맹종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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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라는 대륙과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한반도는 지극히 멀다. 그러나 너무나도 가까운 나라 중에 하나였다. 그것은 기독교를 통해 가능 하였다. 물론 역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침략주의적 발상이었다고 주장하는 면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논쟁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소모적인 줄다리기 일뿐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작은 한반도의 선진 문화는 물론 기독교의 복음을 전래 받았다. 초기 내한 선교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은 초기 한국교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리 땅이 다르더라도 심기워진 나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감나무를 논에 심든, 밭에 심든, 산에 심든, 길가에 심든 나무와는 관계없다. 나무의 성장과 열매에 조금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감나무에 사과 열매가 맺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땅에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이 담겨진 복음을 심었다는 것은 그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비유가 딱히 정확하게 맞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한국교회의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한국 교회에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한국 개신교가 전래된 지 겨우 20여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히 경이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다. 마치 아장 아장 걷는 어린아이가 논, 밭에 가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대부흥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 당시 세계에 일어나고 있었던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국에도 일어나게 했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모든 선교사가 말 했듯이 한국의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먼저 부흥운동을 경험하여 그 신앙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의 중보 적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웨슬리 부흥운동과 미국 대각성운동을 경험하고 그 신망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은 어떻게든 한국교회에도 이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길 갈망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하디목사를 통해 시작되었고, 다른 선교사들까지 합세하여, 한국인 길선주목사를 통하여 최고조에 다다랐던 것이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에 '각성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부흥운동의 영향은 한국 민의 깊은 침체와 도덕적 타락과 외면에서 깨우는 일을 했다. 충분히 '각성운동'이라는 명제를 붙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1세기 전 우리는 선교사들을 통해 놀라운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체험 했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의 역사에 가장 큰 획을 이 한 반도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이 가능케 하는데 우리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게 되었다. 특히 하디목사의 회심과 존스톤 선교사의 강력한 촉구와 프란손 선교의 사경회등은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가능케 하는데 주요한 요인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선교사들로부터 주어졌던 신앙적 유산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앙적 유산 이 한국인들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계속해서 토착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의 고유적인 신앙의 양식 중심은 시종일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1907년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세기가 지나 100주년을 곧 맞이하게 된다. 이제까지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부흥회를 개최하고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역사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각 교회에서도 1년 한 두 번은 꼭 부흥회를 한다. 그리고 지방과 여러 가지 대외적 부흥회를 합치면 일반 성도가 부흥회의 참석과 들음은 1년 적어도 4, 5번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부흥회에 모든 사람들이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과 견주려 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아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옮은 말일 것이다. 그 와중에 한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사회 문화적 발전은 가히 교회가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저 앞장 서 있다. 한국 초기 모든 선진문화는 기독교를 통해서 들어왔다. 그 주도력은 1970년대까지 지속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도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이제는 기독교를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풍요해진 경제적 요인과 문화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와 기독교의 필요성을 찾지 못한다. 교회가 사회를 깨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악과 부패함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흡사 지금의 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모습은 마치 미국의 2차 대각성이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Again 1907'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각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부흥을 외치고 있다. 1907년 한국 초기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초기 때와 같이 선교사들이 있어 영향을 끼치는 시대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계 기독교의 주도를 한국이 하고 있다. 그 나라 한 가운데서 다시 부흥이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그 가운데 스스로 각성하는 것이다. 마치 유럽의 웨슬리 부흥운동과 미국 1차 대각성운동처럼 그 시대 속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모두 깨달았듯이 지금 한국 교회는 누군가 아무라도 부흥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깊었던 대부흥운동의 체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1세기의 걸친 역사를 지나오면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다. 역사는 순환된다고 했다. 역사는 살아있는 교훈이라고 했다. 그 역사가 지금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재현해야 한다고, 그래서 한국사회의 전반에 걸쳐 변화를 창출해야 함을 1907년의 대부흥운동 역사는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는 아직까지 경건주의 신앙과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체험한 그 신앙의 유산을 어머니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1907년의 역사의 중심이었던 그 신앙의 불꽃이 얼마든지 우리 깊숙한 저 곳에 피어있다. 이제는 참다운 회개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한번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21세기의 이 시대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에 부흥 운동이 전개된 것처럼, 이제는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번져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과 신앙의 양태를 가지고 균형 잡힌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확신한다. 이제 곧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같이 제2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앞으로 올바른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에 그 부흥운동이 퍼지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첫째는 바른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바른 신학의 정립은 마치 집을 짓는데 기초와 같다. 얼마나 바른 신학이 정립되느냐에 그 부흥운동의 파워와 영향과 지속력이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신학이 참으로 다양하다. 마치 19세기 미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팽배한 가운데 복음주의적 보수신앙이 2차 대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바른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말씀운동을 먼저 선행시켜야 한다.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세계 그 어떤 부흥운동보다 다 강력하고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 공부 하는 사경회의 부흥회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의 모든 운동의 정통성은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반면에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복음에 입각한 말씀의 선포라기보다는 하나의 '좋은 강연' 같은 '세미나'에 치중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강력하게 촉구하였던 '회개'의 말씀보다는 '축복'에 관한 말씀에 편중되어 있다. 한국의 기독교 강단의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각 교회에서 다채로운 문화 행사는 많이 하는 반면에 사경회를 통해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습으로는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만들 수 없다. 세 번째는 다시 불붙어야 할 기도운동이다.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에 생긴 좋은 결과를 들라면 단연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에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없어지고 있다. 아니면, 그 이전만큼 많은 성도들이 모이지 않거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은 기도운동과 함께 되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한국교회에 기도운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세대는 대부흥운동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러한 성령체험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깨워야 한다. 한국교회를 깨운다는 것은 세계를 깨우는 것이 될 것이다. 어딘 가에서부터 성령체험을 통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 1세기 전에도 그랬듯이 세계로 번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 神學이 韓國敎會成長에 끼친 影響에 관한 硏究 : 長老敎와 監理敎를 中心으로, 1885-2005

        정정일 칼빈大學校 2007 국내박사

        RANK : 234383

        This study is about the influence of the Presbyterian Church's conservative theology and the Methodist Church's liberal theology upon the growth of Korean church from 1885 introduction of christionity to Korea, to 2005. Korean church is well known as it menifested unprecedent and fastest growth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The writes in this study pointed out that this startling growth of church was influenced mainly by the conservative theology. Especially in this study, the writer pursued theological influence in each period upon the church growth of church based on important events in the history of Korean church. First, concerning the theology and church growth in the period of the reception and acceptance of Christianity(1885-1910), this study examined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 Korea, and background theology in the beginning of Christianity in Korea and introduced two schools established in this period; the Pyeongyang Semi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and Hyupsung Seminary of the Methodist Church. It also examined the reasons for the enormous growth of Korean church within the shortest time from the beginning of the missionary work through the mission strategy and the spiritual and theological elements. Second, concerning the theology and church growth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ule (1911-1930), this study discussed the challenge of the liberal theology and the defense of the conservative theology by introducing the theology of missionaries then, the theology of the seminaries, the theology of pastors, confessions, and the theology expressed in the theological Journals(Chapter 4). Third, concerning the emergence of liberal theology and church growth(1931-1960), this study examined how different theologies influenced the church growth by introducing the conservative theolog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PCK), the theolog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PCORK), and the liberal theology of the Methodist Church by the attitude and method in each theologies, view of bible, 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theology. This study also examined how churches defended themselves against the challenge of the liberal theology and how they denounced it (Chapter 5). Fourth, concerning the polarization of the theological ideas and church growth (1961-1990), this study examined various interpretations of the conservative theology of the PCK based on its background and characteristics, introduced the formation and concept of the Minjung theology of the PCROK along with the interpretation of the Minjung theology by Seo Nam-dong, Ahn Byeong-mu, and Hyeon Yeong-hak, and analyzed the current status of Minjung theology oriented churches along with the criticism of Minjung theology. For the indigenization theology of the Methodist Church and discussed the result of the indigenization theology, This study also introduced the theology of Yun Sung-beom and the theology of Mission and discussed the result of indigenization theology (Chapter 6). Fifth, concerning the theology and church growth from 1991 (1991-2005), this study introduced the turn of the conservative theology of the PCK to the evangelicalism and the changes of the progressive theology of the PCROK and the liberal theology of the Methodist Church toward the evangelical theology, pointed out what caused the changes toward the evangelical theology, and proved that the biggest reason for the slowdown of church's growth today is the deterioration due to the prosperous theology of the evangelical theology and the theology of church growth (Chapter 7). In conclusion, this study made it clear that the conservative theology has led the church growth since the Christian religion was introduced in Korea in 1885 through statistical data of each period. On the other hand, this study also pointed out that even the advocacy of conservative theology can slowdown the church growth and lead the reverse growth without giving any influence on the church growth if it deviates the true nature of the gospel. 본 논문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1885년부터 2005년까지 장로교의 보수주의 신학과 감리교의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교회성장에 끼친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속한 성장을 이룬 교회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교회성장의 배후에는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있음을 본 논문에서는 지적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한국교회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를 깃점으로 그 시대 시대마다의 신학의 흐름이 교회성장에 어떤 성장을 끼쳤는지 통계를 통해 증명하였다. 첫째, 기독교 전래 및 수용기의 신학과 교회성장(1885-1910)에서 한국의 기독교 전래와 한국기독교 초기의 신학에 대해 살펴본 후 이 당시에 세워진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가 선교 초기부터 단시간에 교회 성장을 이룬 요인에 대해 선교 전략적 요인, 영적 요인 그리고 신학적 요인을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하였다. 둘째, 일제치하의 신학과 교회성장(1911-1930)을 당시의 선교사들의 신학, 신학교의 신학, 한국 목회자들의 신학, 신조에 나타난 신학 그리고 신학지에 나타난 신학을 소개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와 보수주의 신학의 방어에 대해 논하였다(4장). 셋째,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대두와 교회성장(1931-1960)을 예수교 장로회의 보수주의 신학,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 그리고 감리교의 자유주의 신학을 신학의 자세와 방법, 성경관 그리고 각 신학의 특성을 소개하면서 그런 신학이 교회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리고 역시 그 당시의 한국교회에 침투되어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을 어떻게 방어하면서 배격하였는지를 연구하였다(5장). 넷째, 신학사상의 양극화와 교회성장(1961-1990)을 예수교 장로회의 보수주의 신학을 그 배경과 특징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았고, 기독교 장로회의 민중신학을 그 형성과 개념을 소개한 후에 서남동, 안병무 그리고 현영학의 민중신학의 모습을 소개한 후 민중신학의 비판과 더불어 오늘날의 민중신학 교회의 현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의 토착화신학에 대해서는 윤성범의 성의신학, 변선환의 선교신학에 대해 소개한 후 토착화신학의 결과에 대해 논하였다(6장). 다섯째, 1991년 이후의 신학과 교회성장(1991-2005)을 예수교 장로회의 보수신학의 복음주의 신학으로의 선회와 기독교 장로회의 진보주의 신학과 감리교의 자유주의신학의 복음주의 신학으로의 변화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렇게 복음주의 신학으로의 변화 요인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둔화의 원인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번영신학과 교회성장신학으로 인한 변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7장).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1885년 기독교가 한국에 도래 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 신학이 주도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을 이끌어 왔음을 각 시대마다의 통계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주의 신학을 표방하더라도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변질되어질 경우에는 교회성장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성장의 둔화와 역성장의 요인이 됨을 지적하였다.

      • 아리우스 논쟁에 관한 역사신학적 고찰 : 니케아 공회(1차)로부터 콘스탄티노플 공회(2차)까지

        구화평 총신대학교 2009 국내석사

        RANK : 234383

        무엇이 기독교 정통이며 무엇이 기독교 이단인가? 기독교 신자라면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과거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사를 통해서 드러난 이단과 정통에 대하여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서, 무엇이 기독교 이단이며, 무엇이 기독교 정통인가룰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호모우시오스’(o'μοοu'σιοo', 동일본질)라고 주장하는 정통 신앙, 즉 알렉산더와 아다나시우스의 신학에 도전하여, ‘예수’는 성부 하나님에 가장 가까운 유사한 본질을 가진 ‘호모이우시오스’(o'μοοu'σιοo', 유사본질)라고 이단 사상을 주장한 아리우스와 아리우스파가 일으킨 삼위일체 논쟁에 대하여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즉 제1차 세계 교회 회의인 니케아 공회로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 교회 회의인 콘스탄티노플 공회까지 일어난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의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신학 및 아리우스파가 갖고 있는 이단 신학과, 이에 대응하여 일어나 정통 신학의 체계를 세운 알렉산더, 아다나시오스,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 신학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고찰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본론에 들어가서 본 논문의 내용 전개는, 제 1장에서는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아리우스 논쟁의 배경과 출발점이 된 오리겐의 신학과, 그의 신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나타난 동방 교회의 좌파 오리겐주의 신학과 우파 오리겐주의 신학의 갈등 관계, 즉 우파 알렉산더 감독의 주장에 대한 좌파 아리우스 장로의 신학적 도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 2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고자 소집한 니케아 공회를 통해서 확정하게 된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제 3장에서는 니케아 공회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비호 아래서 세력을 얻은 아리우스파가 정통 니케아 공회의 신학을 뒤집는 극적인 상황과, 이에 대응하여 니케아 신학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아다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신학을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 제 4장에서는 콘스탄티우스의 친아리우스 정책 아래서 아리우스파가 수차례의 교회 회의를 통해서 내놓은 ‘시르미움 참람’(Blasphemy of Sirmium)이라는 참람된 신조공식과,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친아리우스파 소속의 보수적 아리우스파가 니케아 신학으로 회귀하면서 제출한 신학과, 그러한 반전의 역사 속에 나타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을 완성시킨 위대한 캅파도기아의 삼인의 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 5장에서는 데오도시오스 황제의 극적인 등장과 더불어 반전된 친니케아파의 정통신학의 승리와, 정통 신학을 확정한 제 2차 세계 교회 대회인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확정한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끝으로 결론부에서는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서 형성된 기독교의 정통 신앙과 정통 신학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의의를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즉 무엇이 기독교 이단이며, 무엇이 기독교 정통인가를 규명함으로서, 기독교회는 무엇을 정통 신앙으로 알며,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역사와 신학이 말해주는 교훈을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 곤잘레스의 역사서술에 관한 분석

        고철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2005 국내석사

        RANK : 234383

        교회사 서술이란 신학의 한 분과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사 서술 방식은 인간중심의 보이는 역사만을 서술하거나 모든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역사의 개입을 더욱 중요하게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사는 역사신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즉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역사철학이라기보다는 역사신앙에 더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학문이 가지는 객관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역사와 그 흐름에 관하여서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자세로 요구된다. 특히 역사이해 역시 신학적 입장이라고 할 때에 개혁주의적인 안목을 가진다고 하는 표현은 성경이 강조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안목 속에서는 단지 성경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사상과 가르침을 인정하면서 교회사를 서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교회사에 관한 많고 다양한 서술들을 보면 객관적인 자료들은 풍성하게 제시하였으나, 성경이나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교회의 흐름이나 활동을 정리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술을 어떻게 보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 대표적으로 한국교회와 신학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곤잘레스의 교회사 기록방법에 대한 분석과 그 신학적 전제 그리고 그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특히 곤잘레스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분류인 A, B, C 유형과 그 역사관을 분석함으로 그가 왜 유형 C를 현대적 대안의 신학으로 제시하게 되는가를 살피게 될 것이다. 즉 곤잘레스의 역사서술 방법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전제에 입각한 실용주의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개혁주의적인 사고와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술은 대중적인 교회사 서술이기에 신학적인 고민을 담아보았다.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contains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which is a part of theology. The method of the description is not confined to man-oriented, visible history. It is also to examine seriously the work of God in the process of history. This is the reason why Church history is regarded as a part of theology, and called as the theology of history. In Christianity,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is closer to the faith of history than the philosophy of history. We should, however, not underestimate academic objectivity as well as invisible history and its process.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is the subject of theology. To have Reformed insight means to emphasize Biblical teaching. But it does not mean to simply quote passages from the Bible. What the Reformed insight require is to write Church history with the recognition of the Biblical ideas and teaching. Many studies on Church history have presented plenty of objective historical resources. But most of them have only explained the process of Church history and activities of Church without the recognition of the Biblical ideas and teachi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as to how to see and estimate this kind of the description of history. Gonzalez and his historical description which is familiar to Korean Church and Seminaries, are the main thesis in this study. This study analyses the method that he took for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and estimates his theology and it's basis. Especially his historical view and his unique theological classification system which contains type A, type B, and type C, are analysed in this study. Through this analysis, the reason why he presented type C as an alternative theology, could be explained. In conclusion, his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depends on pragmatic interpretation, rather than biblical interpretation. In fact, his historical description is not based on Reformed theology. However, because of the popularity of his description, the method that he took for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has been discussed in this study.

      • 제네바 목사회(1536-1564)에 따른 칼뱅의 활동과 신학에 관한 고찰

        임종구 총신대학교 2015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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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s Calvin and the Reformation has received attention in the theological world in recent years and there has been meaningful progress in this area. In particular, new change is being tried in the research on Calvin, which is called 'Modern Calvin Research' at this moment which shows that 130 years has been passed since Korean mission started. Over the past years, Calvin research in Korea mostly has taken doctrinal approach dealing with main books of the reformer. If historical criticism, textual criticism and doctrinal criticism are been considered as the main platform in the theory of theological research methods, Calvin research seems to have some limit. In other words, it seems not to show other aspects of the reformer since it generally has taken care of only doctrinal criticism. However, there were more opportunities to study on Calvin's theology and his existence as opportunities to deal with letter writings, sermons, footnotes, research essays and different kinds of minutes were provided. This research is to analyze Calvin's image, identity, theology and practice which were seen in the progress of his struggle for the church construction, focusing on Geneva and tracking down on how Calvin's theology was applied in there. Calvin was born in 1507 and died in 1564. He spent the first half of his life, 28 years, getting himself ready for Geneva and spent the second half of his life, 28 years, getting involved in the church construction. His first stay in Geneva in 1536 like an emergency landing was filled with ups and downs such as his deportation, return, struggle and construction. However, Calvin, the French exile, considered Renaissance as a fulcrum and contributed himself to a facilitator opening the gate of the modern society. The reformer was brought up without his mother in his childhood, but he could be fed and grown by humanism while studying in Paris. Besides, he grew up to be a humanist and theologian, and overcame the fear of death given by the huge religious authority in the battlefield of the church construction. He was also dedicated to establishing the most ideal christian city. Nevertheless, Calvin's theology and works are estimated in different points of view. For examples, he is considered as a frontier opening the modern era while he is regarded as a dictator in Geneva. He is not only highly admired but also severely underestimated. Calvin was a policy maker and minister. Calvin's ideal and Geneva's reality in the church and the state, freedom and tolerance and theology and ethics reveals that he was in the dilemma of his church construction. If so, what is the just estimation about Calvin? What messages are conveyed in his theology and thoughts toward present societies and churches? As Calvinism adheres to Scholasticism and Sorbonneism in Korean churches, the research on RCPG of CPG is an alternative to reach reformism more widely and it is also inevitable demand for a well-balanced study. The RCPG plainly reveals Geneva's Reformation and its struggle just like a morning newspaper. Unexpected events, urgent prosecution letters as well as the tension in the scene different from the description of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he public written question make a bit embarrassed those who get used to Calvin texts. Supposing that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s the theology of Geneva, RCPG is the scene of Geneva. Focusing on Calvin's life and his ministry, this research is divided into four parts. The first part introduces the aim and the structure of this research. Especially, researchers and researches' status in this area are introduced along with the chronological tables of Calvin and Geneva, different kinds of terms and names for the research. The second part, as a preceding research, addresses five items related to this dissertation and traces the background. Firstly, in Calvin, his life, books, theology and estimation are handled briefly. Especially, his life is unfolded through the metaphor of 'death'. Secondly, focusing on cities not peoples, the study deals with how each city accepted the Reformation and it was developed in Europe in the 16th century. Geneva and four organizations of Geneva are addressed respectively thirdly and fourthly. Lastly, politics, economy, the society and the religion in Geneva are outlined in Calvin and Geneva. The third part as a main topic of this research deals with Text of Compagnye, Context of Compagnye and Theory of Compaguye. Not only the essence and but also the conclusion of this research, this part divides Calvin's theology and locale into five items for analysis, comparing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he final edition in 1599) and RCPG. First, Geneva's theology was the policy and diplomacy of the city. Calvin considered a city as a base of theology. In this view, city's theology links to the city's interest and identity. Second, as analysis on 'the theory of the State', analyzed is the progress in which Calvin accepted the physical force of the state for churches' order and good triumphing over the evil. In especial, the characteristic of CPG is unfolded as a religious organization belonging to the state. Third, the use of the key of good triumphing over the evil is a kind of 'the theory of church.' Introduced is the struggle to protect the right of dismissal, a church's last authority, and to take the right of autonomy. Fourth, the bondage and freedom in individual faith is a kind of 'the theory of freedom'. Disputes with Castellion, Bolsec and Servetus are addressed with the point of view of the matter of individual faith, not the matter of theology and doctrine. By extension, addressed are the bondage and liberty in the 16th century Reformed city. Fifth, the relation between the theology and the ethnics in the Reformed city is addressed, focusing on insisting that main events in Geneva, on the surface, seem to happen due to theological and doctrina 국문초록 최근 몇 년 동안 신학계에서 칼뱅과 종교개혁이 주목을 받았고 이 분야의 연구에 의미 있는 진전들이 있었다. 특히 한국선교 130년을 기점으로 칼뱅연구에도 새로운 변화가 시도되고 있는데 이른바 ‘근대적 칼뱅연구’라 할 것이다. 그 동안 한국에서의 칼뱅연구는 개혁자의 주저를 중심으로 한 교리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신학연구방법론에서 역사적 비평, 본문 비평, 교리적 비평을 메인 플랫폼(main platform)으로 상정할 때 그 동안의 칼뱅연구는 오히려 교리적 비평만이 선행되고 고착됨으로서 개혁자가 지닌 다면적 성향을 드러내는데 한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서간문과 설교, 주석, 소논문들과 제네바의 각종 회의록과 같은 자료들에 접근이 제공됨으로써 그의 신학과 실제를 비교할 수 있는 연구의 기회가 늘어났다. 본 연구는 이러한 지금까지의 칼뱅연구의 경향에서 그 보폭을 제네바의 현장에 두고 칼뱅의 신학이 제네바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추적하면서 개혁자의 교회건설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표출되어지는 그의 이미지와 정체성, 신학과 실천을 분석하려고 한다. 1509년에 출생해서 1564년에 죽기까지 칼뱅은 생애의 전반부 28년을 제네바를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 나머지 생애의 후반부 28년을 제네바에서의 교회건설에 투신하였다. 불시착과도 같았던 1536년의 첫 체류는 추방, 복귀, 투쟁, 건설이라는 굴곡진 연대기를 형성하지만, 이 프랑스 망명 지식인의 분투는 르네상스를 펄크럼(fulcrum) 삼아 근대사회를 여는 ‘촉진자(Facilitator)’가 되었다. 개혁자는 유년시절 모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유학생활을 통해 인문주의의 모유를 먹고 성장했으며,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로 교회건설의 전장(戰場)에서 거대한 종교권력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도시의 건설을 위한 용기 있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개혁자의 신학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근대를 열었던 개척자로 평가되는가 하면 제네바의 독재자라는 일방적인 시선으로 조명되기도 한다. 그는 지나치게 숭상되기도 하고 때로 가혹하게 폄하되기도 했다. 이 제네바의 사람은 책사이자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자유와 관용, 신학과 윤리에서 개혁자의 이상과 제네바의 현실은 그의 고단했던 교회건설의 딜레마를 보게 한다. 그렇다면 개혁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무엇인가? 그의 신학과 사상은 오늘 현대사회와 교회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소위 ‘칼뱅주의’가 한국교회에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으로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 넓은 개혁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안이자 균형 잡힌 연구로서 제네바 목사회(CPG)의 회의록(RCPG)연구는 필연적 요청이었다.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은 급박했던 이 도시의 개혁과 투쟁을 조간신문처럼 적나라하게 보도하고 있다.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사건들과 긴박했던 기소문과 공개 질의서에서 기독교강요에서와는 다른 현장의 긴박감과 칼뱅텍스트에만 길들여졌던 이들에게는 다소 당혹스런 현실들이 전개되어진다. 「기독교강요」가 제네바의 신학이라면 목사회 회의록은 제네바의 현장이라고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칼뱅의 생애와 사역을 여정이라는 관점으로부터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된다. 제1부, 서론: 수원지(水源池)에서는 본 연구에 대한 의도와 구도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칼뱅과 제네바의 연표, 연구를 위한 각종 용어와 명칭에 대한 정리와 함께 이 분야의 연구학자들과 연구현황을 제시하고 있다. 제2부, 선행연구: 체류지(滯留地)는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기 전에 논문과 관련된 항목들을 심층 연구하고 그 배경을 추적하였다. 1.칼뱅에서는 그의 생애와 저서, 신학과 평가를 간략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그의 생애를 ‘죽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전개하였다. 2.제네바와 개혁도시들에서는 신앙 속지주의에 따라 각 도시들이 어떻게 개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인물중심이 아닌 도시중심으로 전개하였다. 3.제네바, 4.제네바의 4대 기구, 5. 칼뱅과 제네바에서는 개혁자의 무대였던 제네바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에 대한 일반적 개요를 다루었다. 제3부, 제네바 목사회: 정착지(定着地)에서는 본 연구의 중심 주제로서 1.목사회의 개요(Text of Compagnye), 2.목사회의 실천(Context of Compagnye), 3.목사회의 신학(Theology of Compagnye)으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본 연구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본장은 칼뱅의 「기독교강요」(1559년 최종판)와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을 상호 비교하면서 그의 신학과 현장을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분석하였다. 첫째, 도시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개혁파도시들의 개혁에 대한 성찰의 결론으로 제네바에서의 신학은 곧 도시의 정책이자, 외교였으며 이것은 칼뱅이 도시를 신학의 터전으로 바라본 긍정적 시각으로써 도시의 신학은 곧 도시의 이익과 함께 도시의 정체성과 관련되어졌다. 이런 시각에서 목사회의 신학은 도시를 위해 봉사되어졌다. 둘째, 칼뱅의 국가론에서 언급되는 이중의

      • 경건주의와 오순절주의의 관계성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김재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2016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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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dissertation is suggested that it could become a proper powerful capability for revival of present Church to the merits of Pentecostalism which extract from the fact, through researching the corelation between Pentecostalism and Pietism, on which Pentecostalism is a fruit drawn from Pietism. In both, there is a movement sharing a common ethos and having a smellier theological characteristics. Also up to historical trace, it makes known that Pentecostalism which is a part of "the parental inheritance" or "ancestral line" of Pentecostalism by genealogical research, and at least related to a descendant of Pietism. Pietism is an important ingredient in that network of movements that prepared the way for the emergence of Pentecostalism. Each of Pietism and Pentecostalism is, as is called "Second Reformation" or "third Reformation" as a reformed movement to seek the vividness of Christian, being a historical movement which shares a very unique ethos. They had convinced of the essence of Christian as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Christ rather than doctrines or offices, so that they were to represent a vivid organic relationship with Christ. It was a empirical-forcing belief to desire to meet Christ directly, empathizing experience of conversion and sanctification by making a pursuit of a proper relation with God, and as a result, there were many fruits of social service and mission. It was the core of Pietism not only to place inner piety and the establishment of virtue but also to underline the dynamic relation between belief and life as common value of Pentecostalism so that it was important to ethic practice and life.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share pros and cons of theological characteristics except the doctrine of the baptism of the Spirit.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therefore, to provide to present Church with meaningful insights of which pertain the theological merits from comparing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and supplement doctrinal elements as the other respect of Evangelicalism, which are weaken in relative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This is what I intend for Churches to be revived through recovered piety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s the revival of German Pietism led by Philipp Jakob Spener who was influenced by Johann Arndt and August Hermann Franke as a successor of Spener from the end of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years of 18th century and Pentecostalism in 20th century. The range of this dissertation is restricted that in Modern Pentecostalism, it deals with the theology of Charles Parham and Classical Pentecostal Movement, which do not deals with Charismatic Movement and Neochaismatic Movement. For this purpose, this dissertation explores following. In Ⅰ chapter, it represent the purpose of research, the history of research, theses and the method and range of research. In Ⅱ chapter, the historical, theological and thoughtful relation between Pietism and Pentecostalism. By doing so, it makes known a very unique ethos which shares by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through comparing study on genealogical trace of Pentecostalism as its root along to Pietism. In Ⅲ chapter, it will explore what the foundation and background of Pietism are until the Second World War, Pietism had been underestimated to compared with its contributions. It will quest the theology of Spener as a founder of Pietism and the contributions of Johann Blumhardt who worked a role of the bridge of between Pietism and Pentecostalism so that to represent the influence of Pietism on theology and Church. In Ⅳ chapter, it will explore what the foundation of Pentecostalism is. the foundation of Pentecostalism consisted in Pentecostalism in 17th and 18th century, the Holiness Movement influenced by John Wesley in 19th century, especially the movement of the higher life and Keswick convention which were direct roots, and the theology of Charles Parham who was a founder of Modern Pentecostalism and these influence. In Ⅴ chapter, based all research until, it will explore what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of Pietism are, and demonstrates that Pentecostalism come from Pietism, which succeed in good theology and belief. In Ⅵ chapter as a conclusion, it summarizes up to concerned. According to argument, It is the theological merits of Pietism and Pentecostalism to be precious inheritances which can be a energy to make a divergence at present Christian again.

      • 한국교회 오순절운동의 역사 : 최자실 목사와 조용기 목사 사역을 중심으로

        박원종 호서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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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성령강림시기를 거쳐 오순절운동의 잠복시대, 말씀회복시대, 오순절회복의 전조시대 그리고 현대 오순절운동시대까지 세계 오순절의 역사와 살펴보면서, 이러한 오순절운동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한국교회 오순절 운동의 탄생과 성장과 부흥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보면서 그들을 신학과 목회를 조명하고 이들의 좋은 영적 유산을 잘 계승하여 미래 한국 오순절운동에 전망과 과제를 제시해 보는 것이다. 먼저, 오순절운동이 지류(branch)운동 아닌 뿌리(root)운동임을 확인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시기(30?-451)에는 오순절의 연원과 오순절의 역사적 성경적 의미들을 정리했으며 초대시대의 교부들의 오순절적인 영성들을 살펴보았다. 성령운동의 침체기인 중세 오순절 잠복시대(451-1517)에는 간헐적으로 수도원중심으로 오순절의 영성과 운동이 이어져 오는 것을 살펴보았다. 말씀회복시기(1517-1648)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오순절적인 영성과 그들의 입장을 들여다보았고, 오순절운동 전조시기(1648-1900)의 독일의 경건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의 영향으로 찰스 팔함과 윌리엄 시무를 통해 현대 오순절운동(1901-현대)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기초위에 한국 오순절의 역사는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어 갔는지를 시대적 외부상황과 사회적 배경과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이 논문의 주된 인물은 한국 오순절 신앙을 전해준 미국의 럼지 선교사와 오순절교회의 첫 성도요 목회자였던 허홍에 대한 연구, 그리고 한국 오순절교회의 실질적 부흥과 성장에 기여한 최자실과 영산 조용기 목사의 목회와 신학과 영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해결책은 최자실과 영산이 소유했던 오순절적 영성을 통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Ad fotest)와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능으로 회복가자(aAd fontes)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주의 신학에 함몰된 신학의 갱신을 위해 초대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아드 폰테스(Ad Fontes)운동’과 오순절의 권능을 회복하는 오순절 ‘아드 폰테스(Ad Fontes)운동’이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말씀이 지금 살아서 역사하도록 강력한 성령운동을 회복하는 것이다. 본 논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Ⅱ장에서 먼저, 오순절 운동의 의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오순절의 성령체험이 시대를 초월한 모든 신자들에게 설명하고 믿는 기독교 종파들의 운동이다. 오순절의 성령체험이 사도시대에 국한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가증한 동시대성을 강조하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생명력과 능력을 회복하는 회복운동이라고 정의한다. 둘째로, 구약의 오순절의 의미가 유월절을 기점으로 50일째 되는 날로서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은 날과 추수 만료기에 추수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함께 띄고 있는 유대교의 절기라고 한다면, 신약시대의 오순절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처음 익은 열매인 교회가 시작되는 기독교의 절기로 전환되었다. 셋째로, 오순절운동 시대구분을 오순절 역사신학적 관점으로 하여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초대 오순절강림시기(A.D. 30?-451)는 성령강림 이후 이단과 투쟁, 삼위일체 교리 확립, ‘칼케톤 회의’의 기독론의 정립시기로서 교부들의 영성을 보았다. 중세의 오순절 잠복기(451-1517)는 종교개혁자들의 말씀회복운동까지의 시점으로 보았으며 12세기 시스터시안 수도원의 수도사 버나드(Bernad)와 베네딕트 수도원장 힐데가드(Hildegart)와 같은 수도원 중심의 오순절운동을 살펴보았고, 말씀회복운동시기(1517-1648)는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신‧구교간의 전쟁과 갈등이 평화조약(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으로 하여 루터와 츠빙글리, 재침례파, 장 깔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오순절운동에 대한 긍정인 입장과 견해를 살펴보았다. 오순절운동의 전조시기(1648-1900)는 유럽의 모라비안 교도들과 존 웨슬리의 성결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 등이 일어났던 17‧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시기로 구분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는 독일의 경건주의, 모라비안 교도와 이에 영향을 받은 웨슬리와 생애와 영성, 미국의 부흥운동과 찰스 피니를 위시한 19세기 부흥운동을 통해 현대 오순절운동의 영적 분위기를 형성한 점을 고찰하였다. 찰스 팔함과 윌리엄 시무어가 주도하여 오순절운동을 일으킨 현대 오순절운동시기(1900-현재)는 방언이 성령침례의 표징이라는 정통 오순절운동이 시작된 시기로서 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미국 하나님의 성회를 설립한 윌리엄 더함의 오순절 운동을 살펴보고 다양한 오순절운동의 양상들을 오순절운동을 특징별으로 정리하였다. 제 Ⅲ장에서는 한국 오순절운동의 기원이 되는 원산부흥운동(1903)과 평양 대부흥운동(1907)을 오순절운동의 관점에서 기술하였고, 한국교회의 초기 오순절 운동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토착적 한국 오순절운동을 주도한 이용도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같은 시대 오순절 신앙을 한국에 전파한 미국의 매리 럼지 선교사의 교회사적 공헌을 살펴보았다. 한국 오순절교회의 첫 성도이면서 첫 목회자였던 허홍의 생애와 그의 영성을 그의 제자들과 그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 오순절교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재건과 한국 오순절교회의 재건사업을 살펴보았고, 더불어 6.25전쟁 이후에 한국에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헌신한 해외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제 Ⅳ장에서 최자실이 한국성결교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와의 만남과 그를 통해 오순절신학교를 선택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기술하였다. 최자실의 방언운동과 금식기도운동이 교회사적으로 어떤 의가 있는지를 각 시대별로 나누어 금식기도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기독교 금식의 의미와 일반 종교의 금식의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을 이 장에서 거론하였다. 오순절 잠복기(451-1517)에 와서는 금식의 영성이 종교적 규율화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다. 말씀회복시대(1517-1648)의 종교개혁자들은 과거 종교적 규율화된 금식규정을 미신적 금식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식에 대한 새로운 예수께서 가르치신 성경적 금식과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주장했다. 최자실의 금식기도운동은 종교적 규율이 아닌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 금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금식에 대한 가르침은 「금식기도의 능력」에 나와 있는데, 그의 금식의 영성은 종교개혁자들의 금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한편, 최자실의 신유운동은 영산과 최자실의 신유운동은 따로 분리하여 살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영산과 함께 한 최자실의 신유운동으로 함께 비교하며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최자실의 전도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전도부인’의 맥을 이어받아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선교의 여정과 의미를 기술하였고, 더불어 이 장에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방언운동과 금식기도운동에 대한 몇 가지 우려할 수 있는 점들을 기술하였다. 마찬가지로, 신유운동은 ‘신유’ 자체를 목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리스도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중요한 것을 서술했다. 제 Ⅴ장에서는 전 세계적인 오순절운동에 불을 지핀 영산 조용기의 외부적인 동기와 배경들을 생애와 회심과 체험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영산이 대조동 천막교회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은퇴시점까지 걸어온 목회여정을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1958. 5.18 - 1961. 10.14일)은 영산이 영혼구원의 관점에서 전인구원의 구원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지게 된다. 이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질병과 절망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체험에서 인식의 전환이다. 그러한 체험을 구체적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시절(1961. 10.15-1973. 8.18일)은 영산이 권능차원의 성령에서 인격적 하나님이신 성령에 대한 인식 전환의 배경을 서술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모든 생활과 사역에 평생을 성령께 묻고 의지하고 사역하였다는 것을 기술하였고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말씀이 열리고 사역의 지혜가 열리는 목회적 체험을 서술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시절(1973. 8.19-2008. 5.18일), 영산이 은퇴시점까지 세계선교와 사회구원에 매진하는 과정과 그 열매들을 기술하였다. 영산 신학의 핵심은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산의 목회 철학과 신학은 50년 사역에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목회적 체험의 영성이요 성령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 깨달음에 기인된 것이라는 것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영산의 교회사적인 공헌으로 한국 오순절뿐 아니라 세계 오순절운동에 불을 지펴 견인한 점과 신유를 통한 전인구원의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해방 이전이 한국교회 강단을 쇄신시켰다는 점을 기술하였다. 또한 국내외적인 선교사적인 열매들을 기술하였다. 제 Ⅵ장에서는 1980년 이후 한국 오순절교회의 전국적 확산과 부흥을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분열과 통합, 아픔과 시련 속에서 성장과 성숙을 향해가는 한국 오순절교회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작금의 한국 교회의 부흥의 정체기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영산의 오순절운동과 같은 말씀과 성령의 두 축으로 나아가는 말씀회복과 오순절 권능의 회복으로 나아가 교회의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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