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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ul Tillich의 文化神學에 관한 硏究 : 方法論을 中心으로

        채광수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7631

        The work that this thesis chiefly handles is on what theology of culture is. So I investigate its data and its method. The first chapter deals with its purpose. Its contents are how to approach and how to answer we the theological questions in relation to the various and changeful culture of the 21th century. The second chapter treats theology of culture after the Enlightenment that retorts to the theological questions. I describe with regard to what the origin of theology of culture is and as regards how to define many theologians the cultural theology. The third chapter handles the method of theology of culture of Paul Tillich. I make an careful examination of how to develop he his theology of culture and on what basis of he evaluates the liberal theology and the fundamental theology. I scrutinize how far his pivotal theological theme, the role of the spiritual presence influences. The fourth chapter treats how to survey Paul Tillich the structure and the system of his theology of culture. It is concerning his philosophical, epochal, conceptual, theological background and his pivotal thought. Culture is the form of the life of the human race. The right appreciation of a human being is able to make people reply to the continual and theological query regarding culture. So the important line of theology of culture of Paul Tillich is to systematize and to theologize it. So far, the traditional theology such as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the systematical theology, the historical theology, the practical theology makes out a human being created by God through various methods. The theology of today like the theology of mission, the Christian education, the Christian ethics, the pastoral counseling etc. answers the questions of theology in the educational environment. In order to correctly and theologically appreciate a human being, however, all these learning depends on the different ways. The methods of their study are somewhat distinct but their aims are identical with the comprehension of a human being. These questions are thus : who a human being made by God is ; how to estimate justly we our good points and bad points ; are our clothes of culture really good? ; our garments of culture is evil in themselves and do they pretend to be good? ; do build they the Tower of Babel against the word of God? ; or are they the channel of the blessing of God? Nevertheless, we can give an suitable and theological response to modern people in conflict and huge bewilderment by means of the systematization of theology of culture.

      • 조선시대 善政碑 건립 과정과 시기별 추이 :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채광수 嶺南大學校 2010 국내석사

        RANK : 247631

        이 논문은 고문서와 문화유적분포지도 및 비석 단행본을 주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요예(要譽) 문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선정비에 대한 연구다. 선정비는 주로 수령의 선정 사실을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 왕조가 붕괴할 때까지 건립이 계속된 선정비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조선시대 유물 가운데 하나다. 경북지역 선정비는 총 1,108기이다. 상주가 66기로 가장 많고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가 상주보다 1기 적은 65기 분포하고 있다. 반면 안동이 3기로 가장 적은 수량이 조사되었다 경북지역 선정비의 두드러진 특징은 선조 이전에 조성된 선정비가 6기에 불과하여 조선전기 비석은 정말 드물다. 그래서 경북지역 선정비는 조선후기 비석으로 보아도 괜찮다. 조선후기 선정비는 이‧향임과 수령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였다. 선정비 건립이 결정되면 사림(士林)과 각면(各面) 약정(約正) 회의를 통해 감관(監官)‧도정(都監) 선정, 경비 확보, 석수‧각수 고용, 비문 내용 및 撰者 지정, 제막식 등 제반 절차를 논의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입비전(立碑錢) 마련과 석재 운반은 각면에 분정하여 확보 추진하였다. 선정비 건립 비용에서 그 비중이 제일 높은 것은 석각에 드는 비용이다. 선정비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제작 소요일은 길지 않았다. 조선시대 선정비의 건립 추이는 조선전기에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전기에는 일찍이 선정비 금지 조처가 내려졌기 때문에 금지령이 해지되기 이전까지는 공식적인 건립은 없었다. 금지령을 해지 한 중종 대까지도 어느 정도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정비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임란 이후부터 특히 인조대부터 본격적으로 건립이 문란해지기 시작하는데 왕권의 의지와 금지령에 따라 다소간 그 숫자의 차이가 나타나다가 세도정권이후 전국적으로 남립(濫立) 현상이 나타난다. 조선후기 급격한 증가 양상을 보이는 선정비를 고찰해봄으로써 조선후기 사회상 또는 문화를 이해함에 보다 용이하다고 판단된다. 키워드 : 경북, 선정비(善政碑), 수령(首領), 입비전(立碑錢), 금지령, 남립(濫立) This study investigates the monument for good governance of which represents the culture of pursuing honor, based on data of old documents, a map of cultural heritage distribution and a book of monuments. The monument for good governance, which continued to be constructed until the end of the Choson Dynasty, is one of various relics from the Choson period, and it can be found common. The total number of the monuments for good governance in Gyeongbuk province is 1,108. Sangju has 66 monuments, the most in the province, and Daegu where the local government office of Gyeongsang was located has 65 monuments, 1 less than Sangju. Meanwhile, there are only 3 monuments in Andong, the least of all. One of particular characteristics of the monuments of good governance in Gyeongbuk province is the rare presence of the monument built in the early period of Choson, since the monuments constructed before King Sunjo were only 6. Most of monuments in Gyeongbuk province are assumed to be built in the latter period of Choson. Yi-im, Hyang-im, and Su-ryoeng, local officers of the province, usually were in charge of building monuments during the latter period of Choson. If it was decided to build the monument, overall processes for its construction were discussed by the committee of Sarim and Yakjeong from each county. Processes included selection of Gamgwan and Dojeong, assurance of necessary funds, hire of masons and sculptors, assignment of inscription and editor, and the opening ceremony. Securing Ipbujeon and transferring stone materials, the most important process, were assigned to and driven by each county. A cost for inscription was the most expensive one in constructing the monument. Planning and assuring the funds for the monument were relatively simple so that it would not take a long time to complete its construction. Constructing the monument for good governance was not active in the early period of Choson. There were no official constructions in the early period due to the government ban on the monument construction. Even after the ban was lifted, the official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was governed by strict rules and regulations until King Jungjong.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especially since King Injo, its construction became disorganized. The total number of the monuments was varied depending on the degree of royal authority and the type of bans, and since ruling by the political power, monuments were built all over the country with no regulations. By reviewing the rapidly increased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for good governance in the latter period of Choson,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social status and culture of the latter period of Choson. Keywords: Gyeongbuk, Monument of Good Governance, Su-ryeong(首領), Ipbujeon(立碑錢), Ban, Nam-rip(濫立)

      • 평상시 및 태풍시 해양환경에 따른 선박의 표류해석을 통한 인천신항 인근해역의 위험성 평가

        채광수 인하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47631

        인천항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조수간만의 차를 가지고 있고, 갑문의 사용으로 선박의 접근성 제한 및 화물의 선적/하역 작업 등 항만운영에 어려움이존재해왔다. 인천항만공사는 이러한 물동량 체선 및 체화가 심화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인천항을 동북아 물류중심 항만으로 건설하기 위해 종합화물유통 기능을 수행하게 될 비즈니스 거점 항만인 인천신항개발을 2020년까지 계획 및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인천신항 인근해역은 국적선 및 외국선을 포함하여 연간 4만척이넘는 선박들이 항행하는 항로가 존재하며, 비상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묘박지들이 복잡하게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인천신항 인근해역은 조류의 속도가 빠르고 항로와 묘박지, 항로와 항만시설이 서로 근접해 있어 선박의 갑작스런 사고가 발생하여 표류하게 되면 주변 선박 및 항만시설에 충돌할 위험 성이 높다. 본 논문에서는 상용코드인 ANSYS AQWA를 이용하여 대상선박의 표류해석을 통해 인천신항 인근해역의 위험성을 평가하였다. 평상시 및 태풍 시 해양환경에 따른 인천신항 인근해역의 위험요소를 파악하고 사고발생 시나리오를 선정하였다. 평상시 선박의 표류궤적에 지배적인 해양환경은 조류이며, 태풍 시에는 해양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류궤적을 예측하기 어려움을 밝혔다. 인천신항 인근해역에서 선박이 표류하면 주변 선박 및 항만시설과의 충돌가능성이 높게 나타났고, 특히 태풍 시에는 앵커를 투묘하여도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워 표류하는 선박을 제어하기 위한 별도의 대안을 마련해야함 을 제시하였다. 본 논문의 결과는 향후 인천신항 개발 시 인근해역의 위험요소 분석을 위한 참고자료 및 기타 다른 해역의 항만 개발 시 선박의 표류에 의한 위험성 평가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 물리교육 선행 학습과 학습 성취도 연구를 통한 물리교육 개선 방안

        채광수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7631

        한글초록:기초과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이해, 규명, 예측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며 산업기술의 밑바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해, 규명, 예측이라는 활동이 그 이외의 목적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호기심에 의해 촉발되는 학문영역이다. 이 학문을 “기초” 또는 “기본”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해, 규명, 예측이라는 활동이 그 이외의 목적에 의해 구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촉발된다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그러한 탐구의 결과가 다른 목적의 활동에 선행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공간적으로는 핵자의 하부구조에서부터 우주의 크기까지, 시간적으로는 수십억조분의 일초에서 우주의 나이까지, 그리고 생명체를 만들어 내고 있는 복잡계 현상까지 자연의 모든 현상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강력한 실험기자재를 개발하고, 그들을 이용해 얻어진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것이 기초과학의 학문적 목적이다. 기초과학의 역사는 자연을 보는 현미경과 자연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기술의 개발 역사와 맥을 같이하며, 따라서 기술 발전에 급진전을 보인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현재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 물질의 기본 구성 입자들, 이들 입자간의 상호작용, 물질의 다양한 양상과 변화에 의한 생성, 생명체의 양상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베일을 빠른 속도로 벗겨가고 있다. 기초과학은 이와 같은 학문적 성과와 더불어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자극을 주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기초과학은 연구 단계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창의력을 요구하고 있어 우리에게 합리적 사고와 도전정신을 가르쳐 왔다. 또한 자연 질서의 새로운 발견은 인간의 자연관과 의식구조에 큰 변화를 주어 왔으며, 뿐만 아니라 좀더 세밀한 측정이 가능한 새로운 기술개발은 응용 및 개발과학에 원천기술이 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기초과학이 우리 인류의 일상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주어왔다. 그중 물리학의 발전으로 자연의 기본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한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기초과학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맥스웰(maxwell)의 전자기이론은 현대문명을 만드는데 중추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부터 알려진 전기 및 자기현상을 패러데이 등 물리학자들은 수많은 실험실 실험을 통해 그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관측된 사실을 종합하여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력을 매개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공식화 한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전자기파, 태양복사과정 등 자연의 전자기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이 이론은 라디오, TV, 레이더 등 전자제품 발명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현대의 정보통신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등 현대생활에 있어 이 이론이 닿지 않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완전히 별개의 현상으로 여겨졌던 전기, 자기, 빛이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또 한 기초과학은 실로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형성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계기를 이룬 것은 20세기 초 만들어진 양자역학이다. 물질의 미세구조, 원자 스펙트럼, 하전입자 운동 연구로부터 자연의 실체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은 원자, 분자, 물질구조를 이해하는데 길을 열어 놓았다. 현재 양자역학은 물리, 화학, 생물뿐만 아니라 다른 자연과학에서도 바탕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반도체, 광통신 등의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였고, 신 물질 및 레이저 기구 등 신기술 개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반도체라고 불리는 전기・전자재료의 연구는 컴퓨터 혁명을 이루었고, 결국 정보기술이 주도하는 현대의 지식기반사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기초과학은 학문적, 사회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실로 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식기반사회에서 모든 정보는 디지털화 되어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활용하게 되었다. 이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빠른 시간 내에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을 쉽고 빠르게 유도한다. 따라서 지식기반사회에서 자원의 풍부성은 자연 재원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보다는 구성원이 얼마나 정확히 문제의 개념을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현대사회는 끊임없는 개개인의 자기 계발을 요구하고 있고, 이것은 기초과학자들이 걷고 있는 일련의 연구 수행 과정과 유사하다. 창의적 아이디어, 명료한 개념파악, 다양한 역량개발은 기초과학자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 덕목이다.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기초과학 지식과 교육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수련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은 이공계 기피 현상 등으로 인한 기초 자연 과학의 위기 아니 이미 위기수준을 넘었는지도 모른다.국민소득 200만 불을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지식정보사회와 첨단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분명 기초자연과학의 발전과 큰 연관성이 있다하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인적자원의 결핍에 직면해 있다. 2002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6.9%에 불과했던 자연계 지원율, 정부의 병역 특례 등의 조치로 작년 2003학년도 지원율은 30%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양적 증가일 뿐 질적인 면은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한민구. 이공계 우수인재 양성 전자신문 2000. 1.12 2003학년도 대학입시에 대비해 입시학원들에서 내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모든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이 최상위 등급인 1~6급간에 속해 있으며 서울대 공대의 인기 학과가 6급간에 턱걸이하고 있고 자연과학대학은 지방대 약학과보다도 낮게 자리 매겨져 있다. 의약계열 지원율은 90년대 말부터 수직상승하여 작년엔 9대1에 육박하였다.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에 가지 않으면 우수한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은 자명하며 향후 연구개발 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할 것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한 대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몇몇 교수님들의 제언은 이공계 대학에 고등학생들을 많이 입학시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주요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가 어느 한방향의 문제 해결로 극복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한 실마리를 통해 풀려나감으로서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그 실마리 중 하나가 교육이다. 일선 교사들 대학교수님들 그리고 교육을 특히 자연과학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해결해야할 큰 숙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고등학교 교사들과 재학생들이 꼽는 이공계 기피의 첫째 원인으로는 항상 고교과정의 수학과 과학이 너무 어려워서 학생들이 흥미를 잃고, 당장 점수가 나오지 않으니 수학과 과학을 기피하게 되고, 결국 수학과 과학이 더 어렵고 비중이 높은 이과 선택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 수학과 과학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한 후 더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 당연하므로,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습에는 흥미가 있어야한다. 흥미를 형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선행 학습이다. 본 연구는 선행학습과 물리 교육 학업 성취도의 관계를 연구, 선행학습의 유형, 선행 학습에 대한 공교육의 대처 등을 연구, 학생들에게 물리교육을 철저하면서도 흥미를 갖고 학습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제언해 보고자한다

      • 18세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 연구

        채광수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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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 연구 본고는 조선후기 존재는 했으나 학계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남 노론계 서원을 대상으로 삼았다. 먼저 조선후기 영남 노론의 분포와 형성과정에 대해서 정언 이수해가 언급한 제 가문들을 대상으로 그가 속한 선산부의 덕수이문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았다. 이들은 단순히 신향세력이 아니었음은 물론 혼반・학맥 등을 통해 밀접한 상호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서원 건립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영남 노론계 서원 건립추이를 개관적 차원에서 정리하였다. 영남 38개 군현에 총 63개소가 건립이 되었고, 대구부・상주목・경주부・성주목 대읍에 그 숫자가 많았다. 시기적으로는 18세기의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중 사액 원사는 6개소에 불과했고, 대원군 원사 훼철령 당시 2개소만 존치를 한다. 또 송시열 제향 원사가 14개소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이・주자, 김상헌・김창집・윤봉구 등의 순으로 제향처 건립이 이루어졌다. 2장에서는 영남 남인계 지역으로 이주한 노론[서인] 사족과 영남 내에서 노론으로 전향한 사족의 서원 건립과 활동을 살폈다. 상주목의 창녕성씨 청죽공파의 파조 성람은 서울 출신이자 화담・우율 문인임에도 상주 정착 뒤 서애문인・임란 의병활동・도남서원 운영 등에 참여하면서 향촌사회에 착근하였다. 후손들은 서인계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전통적인 남인지역에서 그 기반을 확립하려는 노력들을 경주한다. 삼안 입록이 그 노력이었고, 기호학 계승과 노론계 정치활동 등은 가문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향촌사회에서 이들 가문이 주도한 흥암・서산서원, 충의단 건립과 운영 활동에서 잘 드러났다. 특히 영남의 대표 노론가문으로 성장시킨 성만징을 비롯해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 운영된 영남 노론계 으뜸서원 흥암서원, 자파의 또 하나의 거점이었던 낙론계 서산서원의 이건과 사액 사업, 남인계 충렬사에 비견되는 충의단 건립은 제향자와 시기는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다. 즉 중앙 노론의 후원 속에 창녕성씨와 동지의식을 가졌던 지역 노론계 세력의 연대의 결과물로서 향촌사회 및 영남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시켜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주목 노강서원은 1702년(숙종 28) 벽진이씨 가문의 이지완에 의해 건원 발의 후 대구 옥천전씨 가문과 노론계 목사의 협조를 얻어 1712년(숙종 38) 영당으로 건립된 다음, 1740년(영조 16) 승격 및 서원 기반 구축이 이루어졌다. 1766년(영조 42) 윤봉구가 강학규목을 작성하고, 이후 문인 등에 의해 노론 호론 핵심 인사들인 권상하・윤봉구・한원진・송환기를 차례로 추향하였다. 󰡔원임안󰡕 분석을 통해 드러난 인적구성과 운영은 노론계 서원의 원임 구성 특징인 원장 – 장의 – 유사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원장 구성은 경원장과 원장 또는 향원장 체제를 유지했다. 1729년(영조 5)부터 도입된 경원장제는 영조연간 집중 운영되었다. 원임 구성의 또 다른 특징인 일・이유사 체제는 서원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으로 지방관을 원장 또는 일유사에 위촉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노론계 서원의 특징인 지방관과의 연계성을 본 서원이 잘 보여주는 요소이다. 방문자의 거주지는 영남이 40개 지역으로 절반이 넘는 60%를 차지했는데 주로 우도 거주자들로 조선후기 노론계 인물들은 우도에 많았음을 알 수가 있었다. 1728년 무신난의 여파로 영남은 외부적으로는 반역향에 낙인 찍혀 중앙 환로(宦路) 진출의 어려움이 더욱 가시화 되고, 내부적으로는 집권 노론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 나아가 노론화가 더욱 가속화 된 시기였다. 이는 영남좌도 보다 진원지 우도가 더욱 두드러졌다. 노론이 영남을 향촌 단위에서 붕괴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서원 건립을 선택했고, 이 같은 정책의 모범적 사례가 바로 거창현 포충사였다. 무신난 때 순절한 좌수 이술원은 향촌사회와 집권세력에 의해 조명을 받는다. 이러한 이술원의 각종 현창 사업은 조야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서 진행이 된다. 예장을 시작으로 1735년(영조 11) 마침내 서원 건립이 발의된다. 감사 유척기가 조정에 보고하고 노・소론 공동이 특별히 허가를 요청하자 영조는 건립을 재가한다. 이어 1738년(영조 14) 연명소(聯名疏)가 진달되자 이술원의 순절일에 직접 󰡔포충사󰡕라는 액호를 하사하고, 관의 지원으로 사당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후 이술원의 현양 관련 문자 필진은 모두 노론계 관료학자들 손으로 작성이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포충사는 영남우도에서 남계서원과 함께 노론계 대표하는 원사로 역할을 했다. 이는 심원록에 입록 된 지방관, 중앙관료, 영남 노론계 인물, 송병선 주관 향음주례 참석자 등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한말까지 노론계와의 연관성은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원록에서도 찾아졌다. 3장에서는 영남우도를 중심으로 노론계 서원의 확산 주체와 경주부 장산서원과 영양현 운곡영당을 통해 그 갈등을 탐색해 보았다 노론계 영남문인에 의해 건립된 거제도 반곡서원은 영남 최초로 송시열을 제향자로 창건된 상징성이 큰 서원이다. 영남의 대표적 송시열 문인 가문인 대구 옥천전문이 주도하고, 지역 인사들의 동조와 관(官)의 후원 속에 이루어졌다. 이 서원은 영남 노론계 서원 확산의 계기가 된 동시에 창건 방식에 좋은 모범이 되어주었다. 또한 철종연간 안동김문의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사액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노론계 영남문인이 건립한 삼가현 옥계서원은 윤봉구의 문인 최남두가 스승을 위해 세운 영당을 발전시킨 서원으로 그 건물과 운영에는 스승을 존모하는 정신과 철학이 반영되었다. 무엇보다 윤봉구의 영정을 이모(移摹)해오는 여정에서는 그 실상과 영남우도의 노론계 범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서원은 영남에서 드문 기호지역 노론계 학자와 영남 문인이 함께 제향 된 서원이기에 주목이 되었다. 다음은 문중서원에서 노론화 된 서원인 단성현 신안영당은 지역 노론계 두 개 가문이 연대해 주자와 송시열을 제향 한 문중 사우이다. 본 영당은 비교적 자료가 풍부해 노론계 서원의 직제・강규・경제적 기반・방문자 등 자세한 일면을 파악할 수 있어 관심을 살피기에 충분했다. 또 다른 노론화 문중서원인 수승대에 위치한 구연서원은 지역 출신인사들 모신 향현사 성격에서 출발한 서원이었다. 그러나 노론 낙론을 계승한 후손이 서원 운영을 관장하면서 노론계 문중서원으로 경도 된 경우였다. 이를 구심점 삼아 노론계 인사와 교류, 성천서원 이건 및 송준길 우거지 복원 등의 노론계 활동과 문중 현양사업을 병행해 나갔다. 장산서원의 제향자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의 파조는 회재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이며, 그의 후손들은 영남을 대표했던 서파 가문이다. 옥산파는 옥산별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언적의 현양사업과 옥산서원 창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665년(현종 6) 이전인이 회재의 학통을 계승했음을 시사하는 󰡔관서문답록󰡕을 간행하면서 적서 간 시비의 발단이 될 뿐 아니라 덕천・도산서원과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가문의 생존 차원에서 그들과 반대편에 있던 노론과 연대하게 된다. 옥산파는 이전인 문집 발간 이후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도 비록 실패는 하지만 이전인의 정려 청원·서당 건립·경현서원 추향 등을 기획 시도한 바 있고, 1780년(정조 3)에 마침내 숙원 사업인 장산사 건립에 성공한다. 장산사 건립은 옥산파가 주도한 가운데 혼반 관계에 있던 의흥현의 사족 함양박씨의 도움이 컸다. 또한 미 사액 문중 서원임에도 이례적으로 관청의 지원이 이어졌을 만큼 여타의 서파 가문과는 그 위상이 남달랐다. 1797년(정조 21)에는 도내 범 노론계의 도움으로 장산서원으로 승원하면서 향사는 노론의 총 본산인 화양서원의 법식을 따랐고, 원임 직제는 안동 서간사의 사규(祠規)를 준용하였다. 그래서 원임 구성도 기존 옥산파 위주의 산장 1인 – 유사 1인 체제에서 도내 명망가를 선임한 도원장 1인과 – 유사 2인으로 전환하게 된다. 당시 도원장은 영남을 대표하는 노론계 가문 출신으로 선임이 되었다. 다음은 17세기 후반 복현 된 영양현에서 발생한 신구향 즉 남노간의 향전을 신향측의 기록인 󰡔운곡영당장고󰡕를 통해서 치폐과정을 재구성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 하였다. 첫째 서원 신설 금령을 피하는 영당의 형식을 취하면서 반대 세력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주는 주자와 송시열을 제향인물로 선정하고 있다. 둘째 향중 공론이 아닌 성균관과 예조, 재경 고위관료 등 외부의 힘을 이용해 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셋째 영남 감사의 당색과 의지가 훼철과 중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넷째 본 사건 결과 향촌 내 기존 사족 지배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다섯 번째 조선후기 영남 특히 좌도에서 노론계 서원 건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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