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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관련 한시 연구 : 왕실 본향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우갑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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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전주에 관련된 한시 중 특히 왕실 본향과 관련된 한시를 연구한 것이다. 본향이란 고려시대에 유민들을 관리하고 호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제도인데, 처음에는 성씨의 조상들이 대대로 거주하던 지역을 뜻하였지만, 고려 말에는 인물을 평가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왕실 본향은 다른 본향과 마찬가지로 왕실 성씨의 조상들이 살던 세거지라는 의미를 가지면서도, 특히 임금이 탄생할 징조인 특별한 기운이 서린 장소로, 또 창업군주의 조상들이 덕을 쌓고 인을 베풀며 건국을 준비한 장소로 간주되어 특별한 장소로 존중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왕실 본향으로 존숭된 곳은 바로 전주였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이 살던 곳으로서 조선이 개국하면서 왕실 본향이라는 위상을 확보하였고, 특별한 도시로 여겨졌다. 전주가 왕실 본향이라는 의미 역시 단순히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이 살던 세거지라는 의미를 넘어 시대와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의미들은 다른 무엇보다 한시에 반영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처럼 시대와 상황을 반영하여 한시 속에서 그려진 왕실 본향의 이미지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이미지가 어떻게 도시의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논문에서는 먼저 고려시대 전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인상인 ‘견훤도성’이라는 이미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견훤도성은 통일신라 말기에 발흥한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도읍이라는 의미로서 고려시대의 전주에 대한 대표적 별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개국 임금인 태조와 대항하였던 후백제의 견훤을 신라의 배신자, 악인이라고 규정하였고, 그와 더불어 후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고려 태조가 지었다는 훈요십조에서는 풍수지리를 내세워 전주를 포함한 금강 이남은 반역의 땅이라며 이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고, 김부식의 삼국유사나 문인들의 시속에서는 백성들이 불안한 도시, 태조가 미움하던 도시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시각과 묘사는 조선 초기 까지도 이어져 조선 건국 후에도 오랫동안 전주는 견훤 도성으로 불리며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논문에서는 한시 속에 나타난 고려시대의 전주에 대한 인상을 살펴보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견훤도성으로서의 전주에 대한 인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불식되며 왕실 본향으로서의 전주로 재탄생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각 각 다른 이미지로 그려진 왕실 본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조선 초기 왕실 본향으로서의 전주는 천명을 상징하는 가기(佳氣)가 서린 공간으로 또 유가의 이상국가인 주나라의 도읍인 태(邰)와 빈(豳), 기(岐), 풍(豐)과 호(鎬)의 이미지를 통해 그려졌다. 이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전주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와 비교 되었는데,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한고조와 견주기 위한 것으로 창업 군주의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풍패는 이후 왕실 본향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건국 과정이 완료되고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왕실 본향의 정치적 역할은 사라졌으며, 그 이미지 역시 변화 되었다. 풍패라는 별칭을 통하여 왕실 본향에 대한 전형 이미지는 형성, 고정되었지만 조선 초기의 건국자에 대한 칭송이나 선조들의 공업에 대한 칭송의 의미는 사라졌다. 대신 시 속에서 전주는 단순히 왕실 본향이라는 사실로서만 언급 될 뿐 새로운 의미를 찾지는 못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 초기 왕업에 대한 송축을 담당한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이 조선 초기의 창업과 관련된 정치적 격동기가 지난 후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는데 치중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 전주에서 왕실 본향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지 역할을 한 것은 경기전이었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서, 임금이 현존하는 곳으로서의 왕실 본향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다른 곳에 있던 어진이 모두 불에 타 버린 가운데 경기전에 모시고 있던 어진은 지역민들의 손으로 보존되었다가 다시 환안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관념적으로나마 임금이 현존하는 곳으로서의 왕실 본향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왕실 본향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변전된 것은 조선 후기였다. 1600년대 중반 무렵 전주의 객사에 ‘풍패지관(豐沛之館)’이라는 편액이 걸리고 전주 부성의 남문에 ‘풍남문(豐南門)’이라는 편액이 걸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편액들은 전주가 왕실 본향이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왕실 본향의 의미도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러한 편액 이전에 왕실 본향의 의미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면, 이러한 편액 이후에는 전주 내부에서 왕실 본향의 의미를 찾는 시도들이 생겨났다. 즉 시 속에서는 왕실 본향이란 백성들이 왕화를 입고 태평세상을 누리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고려 시대에 전주를 왕으로부터 미움 받는 도시로, 그리고 불안한 지역이라고 묘사하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새롭게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의 왕실 본향 이미지의 완성은 왕실 성씨인 전주 이씨의 시조묘(始祖墓)를 봉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졌다. 즉 조선 초기 큰 의미가 없었던 전주의 건지산이 우연한 계기로 전주의 진산(鎭山)이 되면서 그 곳에 시조묘가 있다는 풍문이 형성되었고 마침내 조선말에 시조묘가 봉축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주의 건지산은 왕이 태어난 지리적 조건을 갖춘 봉황이 춤추는(舞鳳) 길지라고 간주되었으며 풍수적으로 완벽한 곳으로 재인식 되었다. 이러한 풍수적 해석은 고려 시대에 훈요십조에서 풍수를 통하여 전주를 비롯한 백제의 지역을 ‘배역의 땅’이라고 규정지으며 미워했던 관념을, 다시 풍수를 통하여 극복하고 지워버리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주를 배경으로 한 왕실 본향 관련 한시 속에서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왕실 본향을 각 각 다른 이미지로 그리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왕실의 선조들의 공업(功業)이 이루어진 곳, 천명을 부여 받는 장소로서 왕실 본향이 그려졌다면, 조선 중기에는 경기전을 통하여 왕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서 묘사되었다. 그리고 후기에는 보다 주체적 해석을 통하여 백성들이 태평세상을 누리는 장소, 지리적으로 완벽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통하여 고려 시대에 형성되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간, 장소로서의 왕실 본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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