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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 시의 낭만성 연구 : 국민의식과 관련하여

        양도웅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247631

        This study looks at romantic art view(romanticism) of Kim Soo-young, a Korean poet, and his nation in his poetry in a diachronic perspective. The below is the summary of the result. As the driver of Romanticism was the failed French Revolution (or Reason in the age of Enlightenment,) what led Kim Soo-young to Romanticism in the 1950s was hatred against socialist North Korea, state violence (his experiences with the Korean War and prison camps), and his wife's breakup (they got back together after the War). Because of a series of these events, Kim lived a simple life in Seongbuk-gu and Mapo-gu, the outskirts of Seoul. He despised the city which went through state-led post-war restoration projects and repeated inner-self revealing and self-soothing. Interestingly, his physical move from the downtown (state = capital) to the outskirts was in line with his move of the poetry theme from certain subjects to inner side. However, he focused on external side after he witnessed the April Revolution. He felt sympathy and empathy for students who sacrificed in the crackdown and had 'companionship (love)' which is an emotional turning point to form a national consciousness. This love gives an important signal to interpret his poetry written in the 1960s. For example, his poem, Variations on the Theme of Love in 1967 showed utopian (revolutionary) love, meaning as he witnessed the April Revolution in the 1960s, he found a feeling of love as an alternative to the reality. If that is true, then he put focus on inner side in the 1950s, because he could not find the alternative. He lived such a simple life far away from the reality of state-led industrialization he does not want to face without finding any alternative. Looking at the Modes of Exchange of Kojin Karatani, interestingly, people and the rural community are communities based on his 'reciprocation'. In the modern era, capitalism has expanded and the rural community has collapsed or reduced. And this rural community was restored imaginarily. This 'imaginary community' is people. Unlike the rural community, people is imaginary community. However, people being imaginary community is reciprocation of exchanging gift and counter-gift. Given that this exchange is related with a feeling of love, Romantic poets found people as the alternative. Considering the Modes of Exchange of Kojin Karatani, Kim Soo-young's poetry in both periods of the 1950s and 1960s is explained in a consistent manner. Like Kim Soo-young in the 1950s, Kim Soo-young in the 1960s did not do political actions or remarks pro-actively which should be paid attention. Rather, he repeatedly reproached himself for doing not political actions or remarks. What's hidden by this self-depreciation is his excessive self-consciousness that excludes others. He could not stand with his reduced self-consciousness he had to face in the reality. That is why he stayed in the imaginary and ideal world and was immersed in imagining his own utopia. In this sense, his self-depreciation can be seen as just 'gesture' he hated, because his self-depreciation did not cause any changes in his action. As a result of this research, the April Revolution was the main cause behind Kim Soo-young's change as seen in prior studies, but Kim is basically Romantic in the 1950s and 1960s. In other words, his changes in the 1960s were possible because he had Romantic tendencies. This gives a signal that can consistently solve various questions as mentioned before. He is 'political Romantic Poet' who focused on inner struggles rather than real-life struggles. 본고는 김수영 시의 낭만성을 그의 국민의식(네이션)과 관련하여 통시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이를 위해 본고는 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론을 참고하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현재의 근대세계시스템을 자본=국민=국가가 보로매오의 매듭처럼 연결된 체계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근대세계시스템은 교환양식에 근거한 것인데, 자본은 ‘화폐와 상품의 교환’, 국민은 ‘호수적reciprocal 교환’, 국가는 ‘수탈과 분배의 교환’이다. 본고는 이 중에서 국민과 김수영의 관계를 고찰해본 것이다. 범주를 넓혀 말하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김수영의 입장과 대응을 고찰해본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국민=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를 인용하며, 이러한 상상물인 국민을 실체적으로 인식한 이들이 낭만주의자라고 말하였다. 즉 내셔널리즘=낭만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낭만주의는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근대를 완성시킨 하나의 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고가 주목한 낭만주의의 특성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낭만주의는 이성을 감성화 하였다. 이것은 낭만주의가 일원론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이성과 감성은 상상력을 통해 종합된다고 하였는데, 칸트 이후에 등장한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에 의한 이성과 감성의 종합을 실체적인 종합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칸트적으로 말하면 낭만주의는 일종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낭만주의를 단순히 감성으로만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낭만주의는 감성으로의 일원화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영역에서 ‘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이 갖고 있던 사회주의적인 면모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으로 종결되자 프랑스혁명을 계몽주의적 이성의 실패로 간주하였고, 감성으로 프랑스혁명이 추구하였던 것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성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이성이다.) 그 과정에서 자본·국가와 대비되는 국민을 실체화 하고 기대를 건 것이다. 이를테면 피히테가 대표적이다. 세 번째, 초기 낭만주의자인 슐레겔의 ‘낭만적 아이러니’에 대한 헤겔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는 곧 ‘자아(주관)의 절대화’이다. 때문에 낭만주의에서 타자는 배제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것을 ‘과잉된 자의식’이라고 불렀다. 자아는, 예측 불가능한 타자를 조우할 수밖에 없는 경험론적인 자기(대상화 되는 자기)를 경멸하고 초월론적 자기(대상화 하는 자기)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낭만주의에서의 반성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입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고는 이상의 낭만주의의 특성들을 염두에 두고 김수영의 낭만성을 통시적으로 고찰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대를 걸었던 프랑스혁명(계몽주의적 이성)의 실패가 낭만주의의 주요한 원인이었듯이, 1950년대의 김수영을 낭만주의적으로 이끈 원인은 기대를 걸었던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 한국전쟁과 포로수용소에서의 국가에 의한 폭력, 그리고 아내에게 당한 실연(전쟁 이후 재회한다) 등이었다. 이로 인해 김수영은 서울의 외곽 지대인 성북구와 마포구에서 시골생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는데, 여기서 김수영은 국가 주도의 전후 복구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국가)를 경멸하며 내면 탐닉과 자기 위로를 반복하였다. 김수영이 국가=자본의 도심에서 시골로 이동한 것이 시에서 내면으로 이동한 것과 겹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을 목도한 뒤 외면적으로 변화하는데, 혁명 진압 과정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국민의식이 형성되는 데 주요한 감정적 계기인 ‘우애(사랑)’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1960년대 김수영을 읽는 데 주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1967년에 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에 기초한 유토피아적인(혁명적인) 상상을 보여준다. 즉 1960년대에 김수영은 4·19혁명을 목도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현실의 대안으로서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에 김수영이 내면적이었던 것은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땅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국가주도의 산업화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농촌 생활과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교환양식으로 보았을 때, 국민과 농촌공동체는 모두 ‘호수적 교환’에 근거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 자본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해체되고 축소된 농경공동체를 상상적으로 회복한 공동체가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농경공동체와 달리 국민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 증여와 답례의 호수적 교환이라는 점, 이 교환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련이 있다는 점 때문에 낭만주의자들은 국민을 대안으로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라타니 고진의 교환양식으로 보았을 때 1950년대의 김수영과 1960년대의 김수영은 일관성 있게 해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의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의 김수영은 정치적인 발언이나 정치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그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자신을 책망하였는데, 이러한 자기비하에 가려진 것은 그의 ‘과잉된 자의식’이다. 그는 현실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 축소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상상의 영역에서, 관념의 영역에서 머무르면 자신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데 열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기비하는 그가 극도로 경멸하였던 ‘제스쳐(gesture)’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격한 자기비하 이후에 어떠한 행동의 변화도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주관적인 반성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선행 연구들이 밝혔듯이 4·19혁명이 김수영을 변화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김수영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1960년대의 변화도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김수영에 대한 여러 난제들을 ‘일관성 있게’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적 투쟁보다 내면적 투쟁에 집중했던 ‘정치적 낭만가’에 해당하는 시인이었다. 그에게 현실은 시(詩)의 계기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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