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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변천과 사회변동 연구

        복문 국립목포대학교 일반대학원 2024 국내박사

        RANK : 1903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은 다양한 형식이 공존하고 지역별 상이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단순히 고고학적 접근만으로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변천과정을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고고학 자료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의 기존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고고학 자료와 백제의 대외적 및 대내적 환경 등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고고학 자료가 어떻게 변천하는지 조명하고자 하였다.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백제무덤에 관련된 주요 용어와 함께 백제 한성기의 사회변동에 대한 용어를 정리하였다. 또 한반도 중서부와 서남부에 위치한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공간적 범위는 산맥과 수계를 중심으로 한강 권역, 안성천 권역, 미호강 권역,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 영산강 권역 등 6개 권역으로 구분하였다. 다음으로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형식분류는 그간 지적된 시기성의 불분명성을 보완하기 위해 주요 구성요소 17개의 속성을 검토하였고, 이 가운데 시기성, 독립성, 대표성, 내구성을 가진 최하단석 축석 형태(Ⅰ/Ⅱ), 배부름 기법의 적용여부(A/B), 평면 형태(a/b) 등 3개 속성을 조합하여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을 7개 형식으로 구분하였다. 또 석실 형식의 발생순서배열을 적용하여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형식적 변화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편년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필자는 부장유물을 토기류와 철기류 그리고 위세품으로 대별하고 이 가운데 부장토기 조합양상을 권역별로 구분하며 토기류 기종별 상대순서를 결합하여 개별 석실의 상대순서를 검토하였다. 아울러 철기류와 위세품을 통해 개별 석실의 구체적인 역연대를 부여하는 한편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시기를 네 시기(Ⅰ∼Ⅳ기)로 구분하였다. 상기 형식분류와 편년수립을 통해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에서는 시기별, 권역별로 상이한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Ⅰ기(4세기 중엽∼4세기 후엽) 동안에는 한강 권역에 한정하여 횡혈식석실이 축조되고, Ⅱ기(4세기 후엽∼5세기 초)에는 한강 권역부터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까지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가 확대된다. Ⅲ기(5세기 초∼5세기 중엽)에는 앞선 시기보다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가 더 확장되어 기존 토착묘제가 강하게 잔존한 영산강 권역까지 다다르며 Ⅳ기(5세기 중엽∼475년)에는 앞선 Ⅲ기보다 석실유적이 축소되지만, 석실형식과 부장토기 조합양상 등에서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또 권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강 권역에서는 평면 형태에 따른 이원화된 축조 경향과 더불어 축조 공간의 확대가 관찰된다. 또 장방형 횡혈식석실에 한정하여 배부름 기법이 적용된다. 안성천 권역은 한강 권역과 달리 평면 형태에서의 변화상은 관찰되지 않고 방형인 횡혈식석실에서 배부름 기법이 적용된다. 미호강 권역 역시 안성천 권역과 같이 방형인 횡혈식석실을 중심으로 축조되나, 점진적으로 한강 권역과 같이 장방형인 횡혈식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은 방형인 횡혈식석실에 배부름 기법이 적용되며 다양한 형식의 횡혈식석실이 축조되나, 점진적으로 방형인 횡혈식석실로 형태적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도 장방형인 횡혈식석실이 주로 축조되다가 점차 내륙방향으로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 변화가 이루어지고 방형인 횡혈식석실의 축조로 전환된다. 영산강 권역은 가장 늦은 시점에 방형인 횡혈식석실이 축조되가가 이후 장방형인 횡혈식석실이 축조된다. 다음으로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기원과 서울 송파구 일원의 횡혈식석실 조영주체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먼저 본 연구에서는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기원으로 지목되던 고구려, 군현, 중국의 횡혈식 묘제와 관련한 연구성과를 분석한 결과,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은 석촌동 4호분 내 석실을 근거로 고구려 적석총에 기원을 둘 수 있고 축조재료의 전환이 이루어진 군현지역에서 1차 간접영향, 배부름 기법의 적용 및 장제적 측면에서 중국 강남지역으로 부터 2차 간접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으로 서울 송파구 일원의 횡혈식석실 조영주체와 관련하여 그간 연구성과를 토대로 검토한 결과, 우절각·천장형태·바닥시설 등에서 송파구 일원의 횡혈식석실은 한강 권역의 여타 석실과 차이점이 없고, 송파구 일원의 횡혈식석실을 신라고분으로 비정한 주요 근거인 단각고배는 비혈연적 관계에 따른 재사용의 결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출현기에 해당하는 Ⅰ기에는 백제 중앙세력에 의해 새로운 최상위 계층의 묘제로서 횡혈식석실이 도입되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일부의 집단에 한정하여 우호적 역학관계 아래 횡혈식석실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백제 중앙의 횡혈식석실 수용은 백제의 성장에 따른 고구려와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빈번한 접촉에 의한 대등 정치체 교호작용이 작동한 결과로 추정된다.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확산기에 해당하는 Ⅱ기에는 인적 및 물적 집산이 용이한 교통의 결절지를 중심으로 횡혈식석실이 축조되어 지정학적 위치가 횡혈식석실의 전파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안성천 권역 가운데 오산천 일원과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 중앙은 횡혈식석실의 전파에 있어서 지역 내 역학관계도 고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이 시기 동안 백제가 고구려와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횡혈식석실이 확산된 점을 고려할 때, 문헌기록과 달리 백제는 내부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갈등이 백제 중앙과 지방 간 우호적인 역학관계를 강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발전기에 해당하는 Ⅲ기에는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가 영산강 권역까지 확대되고 배부름 기법이 적용된 석실이 한강 권역과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등 석실 형식이 더욱 다양해진다. 이 가운데 배부름 기법이 적용된 한강 권역의 하남 감일동유적 등은 선행묘제나 생활유적이 불분명한 점에서 상대적으로 백제 중앙의 영향력이 강하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의 배부름 기법이 적용된 횡혈식석실은 선행묘제가 분명한 점에서 백제 중앙과 우호적 역학관계에 있던 토착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Ⅲ기는 백제와 고구려 간 갈등관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로, 활발한 대외 교섭과 영산강 권역까지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가 확대되는 점에서 백제의 국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한편 백제 중앙과 지방 간 우호적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지방으로 횡혈식석실의 전파와 수용이 이루어지나 한강 권역을 중심으로 강화된 백제 중앙의 영향력도 관찰된다. 정착기에 해당하는 Ⅳ기에는 유적의 수가 감소되지만 석실 형식과 부장토기 조합양상 등에서 정형화가 이루어져 백제 중앙의 강화된 영향력을 상정할 수 있다. 이는 한강 권역에서 몽촌토성 기점 반경 30㎞까지 횡혈식석실의 축조범위가 확대되며 영산강 권역을 제외한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 및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 등에서 이루어진 지역 내 역학관계의 변화가 관찰된다. 이는 개로왕대 실시된 왕권의 강화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편, 이러한 역학관계의 변화는 백제 중앙의 개입 아래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횡혈식석실의 변천과 역학관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한강 권역에서는 우호적 역학관계 아래 Ⅰ기부터 Ⅱ기까지 거점 확보 및 확대가 이루어지고, Ⅲ기에 이르러 1차 영역화가 이루어지며 Ⅳ기에 이르러 2차 영역화가 이루어져 점진적인 백제 중앙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안성천 권역은 Ⅱ기에 이르러 횡혈식석실이 축조되지만, 이미 수혈식석곽이 축조되던 집단을 중심으로 백제의 거점 확보과정에서 횡혈식석실이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 Ⅲ기에는 오산천 東岸 등으로 횡혈식석실의 확산이 이루어져 토착적 성격이 강한 오산천 東岸까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미호강 권역은 Ⅱ기부터 남한강유역과 연결된 교통로의 결절지를 중심으로 횡혈식석실이 축조되며 거점 확보가 이루어진 후 Ⅲ기까지 유지되다가, Ⅳ기에 이르러 새롭게 목천분지를 경유한 교통로 확보과정에서 지역 내 세력 재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 상류 및 중류 권역은 Ⅱ기에 이르러 거점 확보가 이루어지고 Ⅲ기에 이르러 다수의 토착집단에 의해 횡혈식석실이 수용되어 거점 확대와 더불어 위세품 부장양상 등에서 우호적인 역학관계 아래 지역 내 1차적인 세력 재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Ⅳ기에 이르러 해당 권역은 정형화된 석실이 한정된 유적에 집중되는 점에서, 이 시기 동안 지역 내 2차적인 세력 재편이 이루어졌으며, 위세품 부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점에서 백제 중앙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은 Ⅱ기부터 서해안과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횡혈식석실이 축조되어 거점 확보가 이루어고 Ⅲ기까지 유지된다. 하지만 위세품의 부장과 석실 분포의 변화 등에서 Ⅳ기에 이르러 금강 하류 및 주진천 권역도 백제 중앙의 영향력 아래 지역 내 세력 재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영산강 권역은 Ⅲ기에 이르러 영산강 권역 내 토착집단 가운데 하나인 나주 복암리에 방형의 횡혈식석실이 전파되며 거점 확보가 이루어지고, Ⅳ기에 이르러 또 다른 토착집단인 영암 내동리일원에 장방형의 횡혈식석실이 축조되며 거점 확대가 관찰된다. 다만 백제 중앙과 물리적으로 원거리에 위치하고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의 전파가 상대적으로 늦기 때문에 백제 중앙의 개입에 따른 지역 내 세력 재편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고학 자료인 횡혈식석실의 변천을 통해 백제 사회변동을 살펴보았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古尒王代 이후 阿莘王代까지 연맹왕국(연맹국가), 腆支王 이후 집권국가로 발전하고, 蓋鹵王代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다는 견해가 고고학 자료의 변천과 잘 부합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It is difficult to explain the transition process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during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simply by an archaeological approach because various forms coexist and show different patterns by region. In this regard, this study attempted to examine how the archaeological data and the external and internal environment of the Baekje were exchanged and how the archaeological data changed in the process by utilizing the existing research results of the historical academia as well as the archaeological data. Prior to the study, the main terms related to Baekje tombs and the terms of social change were summarized. In addition, the spatial rang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Kingdom located in the midwest and southwest of the Korean Peninsula was divided into six region, including the Hangang region, Anseongcheon region, Mihogang region,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and Yeongsangang region, centering on mountain ranges and water systems. Next, in order to compensate for the uncertainty of the timeliness revealed in the classification of the existing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17 attributes frequently used in the existing classification were examined. Among them,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was divided into seven types by combining three attributes: the lowest end stone form (I/II), the application of the Baebureum technique (A/B), and the planar shape (a/b). In addition, by applying the occurrence seriation of the stone chamber type, the typological chang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of the Hanseong period was estimated. And the chronology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Hanseong period of Baekje was considered. For this purpose, the author classified the burial artifacts into pottery, ironware, and prestige goods, divided the burial pottery combination patterns by region, and examined the relative order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by region according to the burial pottery combination patterns. In addition, specific historical dates of individual the corridor stone chamber were given through ironware and prestige goods, and the phas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was divided into four phases(I∼IV phase). First,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hase and each region on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were considered. The scharacteristics of each phase are as follows; During the I phase (the middle 4th century to the late 4th century),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only in the Hangang region, and during the II phase (the late 4th century to the early 5th century) The scope of the construc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expanded from the Hangang region to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In the Ⅲ phase (the early 5th century to the middle 5th century), the range of construc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extended more than the previous phases, reaching the Yeongsangang region where traditional local burial practices were strongly prevalent. In the Ⅳ phase (the middle 5th century to 475) the remains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are reduced compared to the preceding III phase, but the standardization is made in the typ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and the combination of the burial pottery. The characteristics of each region are as follow; In the Hangang region, the expansion of the construction space is observed along with the tendency of dual construction according to the planar shape, In addition, the Baebureum technique is applied only to the rectangular-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Unlike he Hangang region, the Anseongcheon region does not observe any change in tthe planar shape, but the Baebureum technique is applied in the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The Mihogang region is also built around the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like the Anseongcheon region, but gradually the rectangular-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like the Hangang region is mainstream. In the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the Baebureum technique is applied to the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and various types of corridor stone chamber are built, but the morphological standardization is gradually made into the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the rectangular-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mainly constructed, and gradually the construction rang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changed in the inland direction, and it is converted into the construction of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Yeongsan region, a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built, and then a rectangular-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built. Next, this study explored the origins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Hanseong period and the issue of the construction agents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Songpa District of Seoul. As result by analyzed the origins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Hanseong period is originated from the Goguryeo's stone-piled tomb on the basis of the stone chamber in Seokchon-dong No. 4 and the Gunhyeon region where the conversion of the construction material is made, was the first indirect influence and It was judged that the application of the Baebureum technique and the funeral aspect were influenced by the second indirect influence from the Gangnam area in China. Furthermore, regarding the constructors of the tombs in the Songpa District of Seoul, based on existing research, inferred that these tombs, given their similar corner angles, ceiling forms, and flooring structures to other tombs in the the Hangang region, do not differ significantly and that the short-mounted cups, previously considered key evidence for Silla-style tombs, are likely results of reuse due to non-blood relations. And the transi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was considered. It is judged that the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introduced as a new top-class tomb by Baekje central power in the I phase corresponding to the emergence phase, and the propaga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carried out under the favorable mutual relationship limited to some geopolitically important groups. In addition, the acceptanc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center of Baekje is presumed to be the result of the interaction of equal politics through frequent contact in the process of intensifying conflict with the Goguryeo due to the growth of Baekje. It is presumed that the geopolitical location has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 propaga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because it was built around the nodule of traffic which is easy to collect human and material in the II phase corresponding to the diffusion phas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the Hanseong period. In addition, as can be seen on the Osan stream area in the Anseongcheon region and the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Baekje central area is presumed to have considered the dynamics in the area in the propaga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addition, considering the fact that Baekje continued to wage war with the Goguryeo during this period, the Baekje had accumulated considerable capacity internally, unlike the documentary records, and the conflict with the Goguryeo strengthened the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the Baekje central and local areas. In the III phase, which corresponds to the expansion phas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Hanseong period, the range of construc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expanded to the Yeongsangang region, and the corridor stone chamber with the Baebureum technique appears around the Hangang region and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Among them, it is presumed that the influence of the Baekje center was strongly applied to the Hanam Gamil-dong remains of the Hangang region where the Baebureum technique was applied. However, it is presumed that the corridor stone chamber to which the Baebureum technique of the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was applied was built by the indigenous group which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the Baekje central in that the preceding tombs were clear. In addition, in the Ⅲ phase, the conflict between Baekje and Goguryeo was in a lull, and Baekje's national power was rapidly restored in terms of active foreign negotiations and the expansion of the construction rang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to the Yeongsangang region. On the other hand, the propagation and acceptance of 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carried out in the provinces based on the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the Baekje central, but the influence of the the Baekje central strengthened around the Hangang region was also observed. In the Ⅳ phase, which corresponds to the fixed phas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Hanseong period, the number of sites is reduced, but it is possible to assume the strengthened influence of the Baekje center by being stereotyped in the typ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and the combination of burial pottery. This is seen in the expansion of the construction range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from the Hangang region to the 30km radius of MongchonTosung,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forces in the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and the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excluding Yeongsangang region. This is presumed to be closely related to the strengthening of the kingship carried out during the reign of King Gaero, while the reorganization of power within the region is believed to be the result of the intervention of the Baekje Central. Finally, the dynamics between the central and local areas and the change of the Baekje society during the Hanseon period of the Baekje in relation to the transi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were examined. In the Hangang region, the base is secured and expanded from the Ⅰ phase to the Ⅱ phase under the friendly mutual relationship and it is confirmed that the influence of Baekje central is gradually strengthened by the first territorialization and in the III phase and the second territorialization in the IV phase. In the Anseongcheon region,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in the Ⅱ phase, but it was confirmed that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in the process of securing the base of Baekje centered on the group where the pit-style stone burial chamber was already built. In addition, in the III phase, the spread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made by the Osan stream east, and it seems that the influence of Baekje central was extended to the Osan stream east, which has a strong indigenous character. In the Mihogang region,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around the nodule of the traffic route connected to the Namhan River basin from the Ⅱ phase. After securing the base, it was maintained until the III phase. In the Ⅳ phase, It is judged that the power reorganization took place. In Geumgang upstream and midstream region, the base was secured in the Ⅱ phase, By the III phase, it is estimated that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constructed by a large number of indigenous groups, and the primary reorganization of the power in the region was carried out under favorable mutual relations in terms of the expansion of the base and the appearance of the prestige goods. In addition, the scope of construc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concentrated in the Ⅳ phase, and it is possible to assume the second reorganization of the power in the region. In the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around the area adjacent to the west coast from the II phase, and the base was secured and maintained until the III phase. However, it is judged that the power in the area was reorganiz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Baekje central in the Geumgang downstream and Jujincheon region in the Ⅳ phase due to the change of the aspects of prestige goods and the distribu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n Yeongsangang region, in the III phase, a square-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propagated to Naju Bokam-ri, one of the indigenous groups in the Yeongsangang region, and a base was secured. By the Ⅳ phase, a rectangular-shaped the corridor stone chamber was built in Yeongam Naedong-ri, another indigenous group. However, it is presumed that it has not reached the reorganization of the forces in the region because it is located physically far from the center of Baekje and the propaga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is relatively late. In addition, the changes of Baekje society through the transition of the corridor stone chamber were considered. The view that the Baekje stayed the kingdom of the Federation from the King Koi to the King Asin, and entered the centralized state from King Geonj, and attempted to strengthen the royal power during the King Gaero was confirmed to be consistent with the archaeological data.

      • 영산강 수계의 이화학적 수질에 관한 시공간적 변이 분석

        강선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1871

        본 연구는 영산강 수계 내 10개 지점의 이화학적 수질에 관한 시공간적 변이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측정된 환경부 수질데이터를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이용된 수질 변수는 전기전도도 (Conductivity), 생물화학적 산소요구량 (BOD), 화학적 산소요구량 (COD), 용존산소량 (Dissolved oxygen), 총인 (Total phosphorus), 총질소 (Total nitrogen) 및 총부유물 (Total suspended solids)의 7개 항목으로서 계절별, 연별, 조사지점별 농도변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영산강 수계 내에서의 이화학적 수질측정값은 계절 강우에 따라 수질 측정값의 변동 폭이 심하며, 대부분의 수치 농도변이는 7-8월에 집중되는 하절기 몬순 강도에 의해 조절되었다. 장마기에 이온희석의 지표로 사용되는 전기전도도와 총인, 총질소와 같은 영양염류들의 경우 강우량과 역 상관관계 (|r|>0.32, p<0.01, n=119)를 보였으나,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과 화학적 산소요구량의 경우에는 강우분포와 통계학적 유의성 (p>0.05, n=120)을 보이지 않았다. 총인, 총질소, 전기전도도는 대부분 장마중인 7-8월에 최소값을 보였는데, 이는 강우에 의해 오염물질이 희석되기 때문으로 사료되었다. 반면, 총부유물의 유입은 하절기 몬순 동안에 최대치를 보여 이온 감소와는 대조적인 특성을 보였다. 생물학적 산소요구량의 계절적 변화 패턴은 화학적 산소요구량과 유사한(r=0.592, p<0.01) 양상을 보였으며, 마찬가지로 총질소의 변화패턴 또한 총인과 유사한(r=0.529, p<0.01) 양상을 보였다. 용존산소량의 계절별 변화에 따르면, 수온이 낮은 겨울에 최대값을 보이며 온도가 높은 여름에 최소값을 보여 수온과의 역 상관관계를 보였다. 지점별 변화 패턴 분석에 따르면, 전기전도도를 제외한 총인, 총질소, 생물학적 산소요구량, 화학적 산소요구량, 총부유물은 상류 및 하류역 보다 중류역에서 높은 농도를 보인 반면, 전기전도도의 경우에는 하류역에서 높은 농도를 보였다. 특히, 총인, 총질소, 생물학적 산소요구량, 화학적 산소요구량의 수질값은 지점 4(광주 2)에서 급격히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광주 도심으로부터 유출되는 가정하수 및 인접한 공단에서 배출하는 폐수유입에 의한 영향으로 사료되었다. 따라서 영산강의 수질 개선을 위해서는 이런 도심지역의 오염부하 저감을 통한 효율적 수질관리가 요구된다. The objective of the study was to analyze longterm temporal trends of water chemistry and spatial heterogeneity for 10 sampling sites of the Yeongsan-River watershed using water quality dataset during 1995-2004 (obtained from the Ministry of Environment, Korea). The water quality, based on multi-parameters of biological oxygen demand (BOD), chemical oxygen demand (COD), conductivity, dissolved oxygen (DO), total phosphorus (TP), total nitrogen (TN) and total suspended solids (TSS), largely varied depending on the sampling sites, seasons and years. Largest seasonal variabilities in most parameters occurred during the two months of July to August and these were closely associated with large spate of summmer monsoon rain. Conductivity, used as a key indicator for a ionic dilution during rainy season, and nutrients of TN and TP had an inverse function of precipitation (absolute r values>0.32, p<0.01, n=119), whereas BOD and COD had no significant relations (p>0.05, n=119) with rainfall. Minimum values in conductivity, TN, and TP were observed during the summer monsoon, indicating an ionic and nutrient dilution of river water by the rainwater. In contrast, major inputs of total suspended solids (TSS) occurred during the period of summer monsoon. BOD values varied with seasons and the values was closely associated (r=0.592, p<0.01) with COD, while variations of TN were had high correlations (r=0.529, p<0.01) with TP. Seasonal fluctuations of DO showed that maximum values were in the cold winter season and minimum values were in the summer seasons, indicating an inverse relation with water temperature. The spatial trend analyses of TP, TN, BOD, COD and TSS, except for conductivity, showed that the values were greater in the mid-river reach than in the headwater and down-river reaches. Conductivity was greater in the down-river sites than any other sites. Overall data of BOD, COD, and nutrients (TN, TP) showed that water quality was worst in the Site 4, compared to those of others sites. This was due to continuous effluents from the wastewater treatment plants within the urban area of Gwangju city. Based on the overall dataset, efficient water quality management is required in the urban area for better water quality.

      •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조 음악 연구 : 강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1871

        Kang,Ki was a famous litterateur and Sajo musician in the Southern Song Dynasty of China. His 17 Sajo works are the only collection of Sajo works of Song Dynasty with music score that has been handed down to this day. It is regarded as “a rare treasure in the history of music”and an extremely important and precious cultural heritage in the music Treasury of China and even the world. Kang,Ki has been studied for a long time in Chinese academic circles. With reference to the previous research results of Kang, Ki’s Sajo works, combined with the analysis of examples, starting from Kang, Ki’s life, times and cultural background, and in the context of music theory that modern people can understand, the author makes an in-depth analysis of the words, tunes, the relationship between words and tunes, and the aesthetic features embodied in the lyrics and tunes of the 17 Sajo works, Through exploring the creative skills of Kang, Ki’s Sajo works, we hope to better understand the creative style and artistic characteristics of Sajo music in the Southern Song Dynasty.

      • 범죄 집중지점 경찰력 강화방안(Hot Spots Policing)에 관한 연구 : 서민보호 치안강화 구역을 중심으로

        강선 한세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1871

        <국문초록> 범죄 집중지점 경찰력 강화 방안에 관한 연구 범죄예방을 위한 접근법은 범죄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서 변화하 여 왔다. 과거 고전주의와 실증주의적 이론들은 범죄원인을 범죄인이라는 이념적인 부분에 두면서 범죄예방은 다른 사람과 달리 범죄의 유혹에 굴복 한 범죄인을 격리, 갱생시킴으로써 가능하다는 논리를 주창하였으나, 최근 의 입장은 미시적이며 실천적인 부분에 중심을 두려 하면서, 범죄를 유발 하거나 쉽게 하는 환경, 상황 등에 방법론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의 이론적 경향은 범죄 실행을 위한 3가지 요소, 즉 범죄자, 대상 그 리고 실행 장소를 거론한다. 다시 말해 범죄자가 범죄를 실행하기 위해서 는 이성적인 판단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때 실행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인 은 적합한 대상의 유무와 장소가 제공하는 시간적, 공간적 상황이다. 따라 서 이 두 가지 요소의 변화를 통해서 범죄인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면 서 근본적으로 범죄를 제지, 포기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특히, 이 중에서 장소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 지역 내에서도 범죄가 집중되는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 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찰력을 집중, 강화하여 범죄를 통제하려는 전술이 198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에서 시작된 “범죄 집중지점 경찰력 강화 방안 (Hot Spots Policing)”이다. “범죄 집중지점 경찰력 강화 방안(Hot Spots Policing)”은 과학적 통계분 석을 통한 사전 범죄예측과 중간단계의 효율성 평가, 여타 지역과의 비교 분석 등 과학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하면서 완전히 경찰력 중심적인 전술이 - vi - 기 때문에 경찰력 외적인 요소에 관심을 두는 환경개선을 통한 범죄예방, 지역 공동체 경찰활동 등과는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전통적인 순 찰활동의 증원이나 검거율을 높이는 방식과도 차별되는 전술이다. 다만, 한 장소에 대한 경찰력 집중이 범죄를 인근 지역으로 전이시킬 뿐이라는 비판 과 함께 집중력이 완화되면 다시 범죄가 발행하는 단기적 효과에 불과 할 뿐이라는 점, 지역 주민과의 공감대 없는 경찰력 집중이 오히려 불안감을 증대하고 반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 사 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의 연구사례들을 바탕으로 Hot Spots Policing 의 전반에 대해 검토하고 범죄 전이현상 등 문제점 외에 “이익의 파급효과 (diffusion of benefits)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더불어, 우리나라 경찰에서도 이를 원용하여 2009. 8부터 “서민보호 치안 강화 구역”을 시행 중에 있으며 본 연구에서 서울 강서경찰서에서 시행 중 인 제도에 대해 제도 운영의 취지, 사전 및 사후 평가, 경찰력 강화 방안 등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강․절도와 성범죄 등 주거지 밀집 지역에 집중 되는 범죄의 통제를 목적으로 번지수 중심의 지점을 지정, 경찰력의 강화 를 꾀한 점 등은 새로운 전술적 접근법으로 평가되어 질 수 있으나, 단순 통계 비교에 머문 효율성 평가의 미비, 경찰력 운용의 탄력성 부족, 범죄 전이 효과에 대한 판단 누락 등은 개선되어야 할 점으로 도출 되었다. 따 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바탕으로 보다 발전된 모델을 제시함 과 동시에 범죄가 어느 한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 써 통제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경찰의 전술 또한 복합성과 다양 성이라는 방향으로 고찰되고 실행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 를 제안하였다. 주제어: 경찰, 장소, 문제중심, 상황, Hot spots, 치안강화 구역 <Abstract> The Study on the Hot Spots Policing KANG, Sun Graduate School of Police and Judical Affairs Hansei Univer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in depth the theoretical change in the approach to crime prevention and to examine the new crime preventive method, "Hot Spots Policing", which is the enforcement oriented policing tactic, reflecting the Problem oriented and Evidence based Policing Strategies. Since 1980s, the theoretical focus of the crime prevention has moved from the macro level to the micro, that is, the place where the crime is concentrated unlike other places in a neighbour. Various theories related to the environmental and spatial elements, such as the Situational Crime Prevention Theory, Routine Activity Theory and Crime Pattern Theory were appeared and affected fundamentally the Crime Justice policy making as well. In accordance with this trend, the Police, one of the most crucial state's organization for Crime control, is also shifting their policing paradigm from the rapid-response and the broad area covering strategy to the problem-solving strategy, which means the police is paying attention to the temporal and spatial elements of the place and controling crimes through blocking them, rather than arresting or isolating criminals. - 82 - The Hot Spots Policing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methods, implementing the new policing strategy and is based on the logic that the more effective result of crime preventing can be obtained through the concentration of limited police resources on narrow and specific area(spot) where the crimes or callings for police service are concentrated. It is true that there are several critiques against it, such as the crime displacement, the short term effect and the lack of specialized police agents, etc. Nevertheless, the effectiveness of Hot spot policing is proved by various empirical researches. Korean police also adopt it as the new policing tactic with the name of "The Fortified Policing on the Zone of Common People". This tactic of Korean police can be estimated as good initiative, especially for controling the increasing crime problems and disorders in the residence area where theft, burglars and sexual violences are committed frequently, even though several basic elements should be complemented, such as expanding the specialized knowledge on Hot spots policing, the necessity of effective pre and post evaluation system, and preparing the institutional system for flexible management of police strength, etc. Therefor, through this study we will analyse and assess it, and the developed model will be looked for. Key words: police, place, problem-oriented, hot spots, Fortified Policing.

      • 高句麗와 北方民族의 관계 연구 : 鮮卑.契丹.柔然.突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강선 淑明女子大學校 2003 국내박사

        RANK : 1871

        Koguryo(高句麗) was related to the various nations because of its location. Especially the relation of Koguryo and the northern nations appeared variously according to the situation of Koguryo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the northeast Asia. The first northern nation related with Koguryo was Hsien-pei(鮮卑). Hsien-pei Mu-jung tribe(慕容部) and Koguryo crashed several times because their borderlines adjoined each other. King Michon(美川王) of Koguryo pressed Mu-jung tribe by driving the foreign expansion policy. But Mu-jung tribe was getting powerful and established the Earlier Yen(前燕). The Earlier Yen invaded Koguryo and was subsided its capital, and then took King kogugwon(故國原王)s mother. Koguryo had to bring a tribute to the Earlier Yen to be come back kings mother. After that time Koguryo had been powerful through the reorganization of the national system. Koguryo drove the foreign expansion policy again. Meanwhile in China, the Earlier Chin(前秦) unified the northern china. But a little later the Earlier Chin had been weak that the Earlier Chin fought against the East Chin(東晋) and was defeated. The northern china was divided again and Mu-jung tribe established the Later Yen(後燕). Koguryo and the Later Yen were hostile each other. These time the Kitan(契丹) located in the northwest of koguryo invaded Koguryo. But Kitan did not organize the unified political system and could not intimidate Koguryo strongly. Koguryo strengthened an attack against Kitan. Kitan was getting weak and a part of its tribes became the army of Koguryo. Koguryo made use Kitan army when the war was broken out. Meanwhile in China, the Northern Wei(北魏) unified the northern china again and was keeping up rivalry against Jou-jan(柔然) of the north. Koguryo united with Jou-jan to restrain the Northern Wei. Koguryo succeeded in the restraint policy against the Northern Wei and drove the southward expansion policy. Koguryo transfered its capital to Pyongyang(平壤) and invaded Hansong(漢城), the capital of Paekche(百濟) later. In 6th century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the northeast Asia had changed extensively. The northern Wei divided the east and the west. Jon-jan was getting weak by the intimidation of Tu-ch eh(突厥). Especially Tu-ch eh invaded Koguryo to prevent an alliance of Koguryo and Jou-jan. Koguryo also lost the area of the Han river by the allied forces of Paekche and Shilla(新羅). Koguryo could not deal with an invasion of Paekche and Shilla because of its internal trobles. In 555 Tu-ch eh was collapsed Jou-jan and appeared as a supreme ruler of the northern area. A little later Sui(隋) and Tang(唐) established the unified empire in turn in china. Sui and Tang, both of them endeavored to weaken Tu-ch eh. That was why Tu-ch eh intimidatided the security of the empire. As well Sui and Tang invaded Koguryo several times. But they could not defeated Koguryo because of the strong resistance of Koguryo. But Tang succeeded to weaken Tu-ch eh and then invaded Koguryo with Shilla later. At that time Koguryo could not unite with Tu-ch eh because Tu-ch eh was under Tang. Finally Koguryo was in an isolated situation and was collapsed. Koguryo was an advantageous post in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the northeast Asis when Koguryo took the leadership in the relation with the northern nations. The other side Koguryo was in a difficult situation when Koguryo lost the leadership. In this view point the relation of Koguryo and the northern nations has an important meaning in Koguryo history. 고구려는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에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며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고구려의 국내 정세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때로는 이들과 연계하여 중국 세력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鮮卑·契丹·柔然·突厥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구려가 가장 먼저 접촉한 북방민족은 선비였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선비가 처음으로 접촉한 시기는 기원전 9년이나 본격적인 접촉은 3세기경 선비 慕容部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모용부는 날로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선비족 내에서 부족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하여 宇文部·段部와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모용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견제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모용부의 침입을 받았다. 그 후 고구려는 美川王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모용부와 충돌하게 되나 모용부가 前燕을 건국하고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위축되었다. 전연은 중원 평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일련의 체제정비를 통해 착실히 국력을 축적하였다. 전연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고구려를 제압함으로써 후방의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전연은 고구려의 방어가 치중되어 있는 평탄한 北道 대신 험난한 南道를 택해 침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전연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북도의 방어에 치중하다 수도가 함락 당하고 故國原王이 피난 가는 참패를 당하였다. 더군다나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가 전연에 볼모로 잡혀가자 전연과의 관계에서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를 송환받기 위해 전연에 朝貢을 바치고 稱臣하였다. 그 후 고구려는 전연과의 전쟁에서 참패당한 것을 교훈 삼아 일련의 체제 정비를 통해 국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고 廣開土王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前秦이 일시적으로 북중국을 통일하나 水戰에서 東晋에게 참패당하여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자 북중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이 틈을 타 모용부는 後燕·西燕·南燕을 차례로 건국하였다. 그 중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後燕은 여러 차례 고구려와 공방전을 펼쳤지만 고구려에 밀려 점차 쇠퇴하였다. 이 시기 선비 우문부에서 갈라져 나온 거란이 처음으로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고구려가 契丹과 처음 접촉한 것은 소수림왕 8년(378년) 때이다. 중국 史書 중 거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책이 『魏書』이므로, 고구려가 중국보다 일찍 거란과 접촉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에 대한 고구려의 반격은 광개토왕 때부터 이루어졌다. 광개토왕은 거란족의 일부인 稗黎를 치고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선비와 달리 거란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못해 주변 국가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479년 고구려가 柔然과 공모해 地豆于 분할을 모의하였는데 그 와중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거란의 8부 연맹체가 붕괴되었다. 고구려에게 쫓긴 거란은 大凌河 동쪽으로 옮겨가 정착하여 북위에 의탁하였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거란에 대한 공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들을 附庸兵으로 활용하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유목민인 거란은 잘 훈련된 騎兵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군사력 강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거란을 세력권 내에 두고 적절히 통제하여 지속적으로 말을 확보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거란에 대한 정책이 주로 거란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던데 반해 柔然에 대한 정책은 이와 다른 것이었다. 북위의 북쪽에 자리잡은 유연은 거대한 유목제국을 형성하고 북위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북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는 북위와 유연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하여 유연과 連和함으로써 북위를 견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처럼 북위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정책은 유연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당시 동북아시아는 북위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유연 그리고 南朝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4강 구도 속에서 전개된 국제정세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 서부 국경에서 안전을 확보한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平壤遷都를 단행하고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물길이 북위와 연결하여 고구려를 압박하려고 하자 유연과 연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즉 고구려는 물길과 북위의 연결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에 대한 분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와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고 북방에서는 突厥이 부상하여 유연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4강 구도 속에 유지되어 오던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변화를 가져왔다. 고구려는 북위의 분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돌궐의 부상에 대해서는 주목하였다. 돌궐이 鐵勒을 격파하자 고구려는 신성과 백암성을 수리하고 서북방의 국경수비를 강화하였다. 『三國史記』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돌궐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551년이다. 그런데 돌궐이 유연을 격파한 해가 555년이므로 551년에 고구려를 침입하였다는 것은 연대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와 유연의 우호적인 관계를 잘 알고 있던 돌궐은 유연을 치기에 앞서 고구려와 유연의 연계를 경계했을 것이다. 때문에 돌궐은 유연을 본격적으로 치기에 앞서 고구려를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돌궐이 유연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552년부터이므로 그 전 해인 551년에 고구려를 침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돌궐은 고구려와 유연의 연계를 차단한 후에 유연에 대한 공략을 본격화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隋와 唐이 차례로 건국되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급변하였다. 수·당은 건국과 동시에 북방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역대로 북방민족은 중국의 안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북방민족에 대한 대책은 중요하였다. 수는 돌궐과 혼인관계를 통해 우호관계 유지에 힘쓰나 돌궐이 중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 때는 당나라에 들어와서 이다. 당은 대규모의 토벌에 이어 羈 정책을 실시하여 돌궐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당은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 전에도 고구려는 여러 차례 수와 당의 침략을 받았으나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오히려 수는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이 내부 반란을 야기시켜 멸망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 死後에 고구려의 지배층이 분열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한 당이 침입하자 고구려는 힘없이 무너졌다. 과거 남북조 시기 고구려는 유연과 연계하여 북위를 적절히 견제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동북아시아 4강 구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7세기의 국제 상황은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북방의 돌궐은 이미 당의 지배하에 놓인 상태이고 고구려는 홀로 당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돌궐과의 연계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백제마저 멸망하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이것은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한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북방민족이 지니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를 보면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가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일련의 체제정비를 통해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선비가 북중국에 진출하여 帝國을 건설하는 것을 보며 북방민족의 저력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이후 고구려가 북방민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거란에 대해서는 그들의 군사력에 주목하여 附庸兵으로 활용하였고, 유연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북위를 견제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북방민족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국익을 확대하였고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궐이 중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자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의 연계가 필요했지만 그것이 곤란해지자 對중국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맞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 속에서 내분까지 겹쳐 멸망하였다. 요컨대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고구려의 발전 뿐 아니라 멸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실험적 타이포그래피의 시각 표현에 관한 연구 : 실험성이 강한 타이포그래퍼들의 조형언어를 중심으로

        모란 경희대학교 산업정보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1871

        오늘날과 같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인 문자는,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적 기능 이상으로 시각적 표현과 조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컴퓨터의 발달로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를 좀더 쉽고 편리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달 매체인 문자를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이포그래피에 있어서 실험이라는 의미는 시각적 매개체를 표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며, 이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또한 실험성이 강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추구하려면 전통적으로 내려온 규범이나 관습 등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하며, 그것이 실험적 타이포그래피의 접근이나 시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관습이나 규범의 틀을 뛰어넘는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 연구는 실험 타이포그래피의 시각표현을 전제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실험성이 강한 타이포그래퍼인 프랑스의 로베르 마쌩(Robert Massin), 독일의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 미국의 에이프릴 그레이만(April Greiman), 영국의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 미국의 데이비드 카슨(David Carson), 한국의 안상수(Ahn, Sang-Su)와 원유홍(Won, You-Hong)등의 조형언어를 비교, 분석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험적 타이포그래피의 디자인 철학, 문자의 접근방식, 작품의 영감, 디자인 사조를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실험의 의미를 숙지하고, 더 나아가 실험적 타이포그래피의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타이포그래퍼는 적극적이고 넓은 안목을 갖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타이포그래피에 과도한 “멋 부리기” 보다는 작품의 의도나 표현에 대한 인식, 정보의 전달이 애매 모호해 지지 않도록 좀더 신중한 판단을 해야만 한다. 또한 새로운 시각표현의 자유로운 창조 활동을 위한 무한한 시각적 표현방법으로서 문자 정보에 다양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타이포그래피의 진정한 실험을 위해 여러 가지 타이포그래피 요소들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을 신선한 관찰력과 접목시킴으로써 진취적이며 도전적인 방향으로 그 능력을 키워야만 하겠다. 앞으로의 실험적 타이포그래피는 기존의 원리들이 충분히 이해된 가운데 변화하는 시대감각에 맞는 실험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언어로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증폭시켜나가야 하겠다. Today, The character as tools for communication in the flooding of the information must be more than linguistic functions and has another function, such as visual expression and formative language. And we can access lots of information easily, conveniently and transfer it more quickly, as being growth of the computers. The meaning of the experiments in Experimental Typography is new possibility to present visual mediation and a kind of tool for effective communication. Additionally we are supposed to keep traditional customs sufficiently to pursue experimental new Typography, which is the most important part to overcome limitation of traditional customs. This case will be having experimental typography's discussion about the concept, design philosophy, access method of character, inspiration, and trends and presenting creative possibilities based on Robert Massin, Wolfgang Weingart, April Greiman, Neville Brody, David Carson, Ahn Sang-Su, Won You-Hong. To fulfill the needs for the 21st century we should concentrate on getting objective views and careful judgment not to transfer ambiguous information. We should take responsibility to make various possibilities about character information as visual expression and throw prejudice away, and raise progressive and challengeable possibilities by merging fresh observation. Consequently, we must attempt to new approach on the sufficient understanding of experimental typography and increase continuing possibility and implication of formative language.

      • 라스트마일 딜리버리 서비스충성도와 쇼핑몰만족도가 온라인 쇼핑몰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강선 대전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1855

        본 연구의 목적은 국내 라스트마일 배송 서비스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인 쿠팡의 로켓배송 서비스에 관한 연구를 통해 로켓배송 서비스충성도가 쇼핑몰충성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로켓배송 서비스 품질이 로켓배송 만족도, 로켓배송 충성도 및 전반적인 쇼핑몰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또한 쿠팡 소비자의 지각된 가치가 쇼핑몰 만족도와 쇼핑몰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로켓배송 서비스충성도가 쇼핑몰충성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금 더 확대하여, 라스트마일 딜리버리 관련 서비스충성도가 쇼핑몰충성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제시하였다. 본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가 전반적으로 로켓배송의 배송서비스 품질에 만족하고 있고, 배송만족도에 미치는 영향력을 살펴보면 신속정확성, 배송경제성, 반품처리성, 배송상태성 순서로 영향력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보여준다. 쿠팡 쇼핑몰에 대한 지각된 가치 중 서비스 성과 가치가 쇼핑몰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으로 감성적 가치, 편리성 가치, 브랜드 가치 순으로 나타났다. 즉, 쿠팡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혁신적이라고 인정받고, 고객은 정서적 행복을 느끼고 제공되는 서비스가 편리하다고 인식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는 쇼핑몰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쇼핑몰 충성도에 미치는 변수의 전체 영향 분석 결과 쇼핑몰 만족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로켓 충성도와 로켓 만족도가 그 뒤를 이었다. 독립변수 중 쿠팡 쇼핑몰의 지각된가치 중 서비스 성과가치가 쇼핑몰 충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정서적가치, 편의적가치, 신속정확성, 배송경제성, 브랜드가치, 반품처리성, 배송상태성 순으로 나타났다. 쿠팡의 서비스는 혁신적이며, 고객들은 그것에 대해 정서적으로 만족하고, 쿠팡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편리하다는 것이 쇼핑몰 충성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배송서비스 품질의 신속성과 배송경제성이 쇼핑몰 충성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료멤버십회원이 일반회원에 비하여 로켓배송 경제성에 대한 배송만족도가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유료멤버십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켓와우멤버십 서비스를 통한 로켓배송의 무료배송이나 무료반품 서비스가 훨씬 경제적이라고 소비자들은 판단하고 이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즉, 일단 유료멤버십회원이 되면 배송경제성 품질로 인한 배송만족도와 충성도가 크게 상승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배송경제성이 쿠팡의 락인효과를 이끄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을 분석해주는 결과라고도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마케팅 전략으로 이 성공적인 유료멤버십 프로그램을 로얄티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국내 라스트마일 배송 서비스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인 쿠팡 로켓배송 충성도 연구를 통해 라스트마일 배송 충성도가 쇼핑몰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정량화하여 연구모형을 통해 제시하였다. 또한, 본 연구의 결과 분석을 통해 쿠팡 로켓배송의 락인 효과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성별에 따라 소비자의 지각된가치가 쇼핑몰만족도 및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연구결과를 활용하여, 마케팅 전략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결과 남성의 쇼핑몰에 대한 지각된 가치는 서비스성능가치와 편의적가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반면, 여성의 쇼핑몰에 대한 지각된 가치는 감성적가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어서 서비스성능가치와 편의적가치 순으로 쇼핑몰 만족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남성은 쇼핑시 서비스성능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여성은 감성적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마케팅 전략에 활용하여 같은 제품이라도 남성이 주 고객인 경우는 서비스성능가치를 강조하여 광고하고 여성이 주 고객인 경우는 감성적가치를 강조하여 광고할 수 있다.

      • 「感情」の比喩表現の研究

        이등강미 濟州大學校 大學院 2023 국내박사

        RANK : 1855

        비유는, 언어학 분야에서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언어화할 때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인지언어학에서는 표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언어의 인식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문학 작품 속의 언어 가운데, 감정을 나타내는 비유 표현을 대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 무엇으로 대체되어 인식되고 있는지를 인지언어학의 연구 방법에 따라 논의를 전개하겠다. 연구 대상으로 전쟁문학을 선정하고, 러일전쟁 작품에서 전후 작품까지(1906~1969)를 전쟁 배경별 다섯 시기로 나누어 고찰한다. 다섯 시기의 감정의 개념, 감정과 신체와의 관계를 분석·고찰하여 감정의 표현 방법, 언어화된 감정으로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지 구조를 밝힌다. 그리고 그 표현 방법이나 인지 구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통시적 고찰을 하겠다. 이 논문의 연구 대상이 되는 감정은 18종류이다. 긍정적 감정은 ‘기쁨, 애호, 안도, 즐거움’의 4종류, 상황에 따른 긍정・부정적 감정은 ‘추억, 흥분, 긴장, 놀람’의 4종류, 부정적 감정은 ‘슬픔, 분노, 공포, 불안, 절망, 원한, 혐오, 회개, 후회, 수치’의 10종류로 분류했다. 러일전쟁을 무대로 한 세 작품의 고찰에서, 군국주의의 작품은 전쟁에 대한 ‘흥분’이 많이 그려져 있고, 반군국주의의 작품은 ‘슬픔’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표현에서는 <흥분은 공격성이 있는 것>이라는 개념 메타파(은유)가 많이 보였다. 전투에 대한 흥분이 많이 그려져 있어 러일전쟁 시대의 군국주의적 사상이 작품 표현에도 나타났다. 또한, 신체 부위를 이용한 표현에서는 ‘눈’이 포함된, ‘눈물’을 이용한 표현이 풍부하게 나타난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신체 부위의 표현에서는 ‘원한’이 주로 ‘입’에서 삼키거나 ‘치아’로 표현되는 등 ‘입’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일 전쟁을 무대로 한 네 작품의 고찰에서, 정부가 파견한 글쓰기(펜)부대가 썼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에서는 동료의 죽음에 대한 한탄뿐만 아니라 외로움과 불쌍한 생각의 표현도 많이 나타났다. 전쟁터라 할지라도 긍정적 감정이 18%나 차지할 정도로 많이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에서는 <불안은 생물이다>라는 개념 메타파가 많이 보였다. ‘불안’한 감정이 ‘기어서 접근하다’나 ‘좀먹다’ 등과 함께 사용되어 왠지 불쾌한 기분으로 그려져 있었다. 또한 불안에 빠져 있는 상황을 신체 이상(異常)으로 표현된 것이 많았던 것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의 네 작품의 고찰에서, 전쟁터로 향하는 흥분보다는 병사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보도원의 감정, 그리고 죽음으로 향하는 병사에 대한 슬픔 감정이 주로 그려져 있었다. 표현의 특징으로는 ‘공포’와 ‘불안’에서는 <감정은 생물이다>라는 개념 메타파가 눈에 띄고, 이것은 감정이 체내에서 발생한다는 인식 이외에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함을 보여주었다. 또 <감정은 고체이다>라는 개념 메타파도 많아, 각 감정과 사물의 유사성에서 도출한 비유가 풍부하게 그려져 있어 폭넓게 표현되었다. 신체 부위에서 ‘분노’와 ‘회개’, ‘원한’ 등의 부정적 감정은 ‘입’과 깊은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자기 신체 일부를 자신과 분리해서 다루는 서양적 표현이 보인 것도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전후 바로 발표된 세 작품의 고찰에서는 종전 가까이까지 전투가 없는 대기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보내는 불쾌한 감정이 많이 그려졌고, 전투에 임하는 흥분은 적었다. 표현의 특징은 많은 감정에서 <감정은 생물이다>라는 개념 메타파가 많아, ‘감정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보다 감정의 의인화나, ‘감정은 소유물이 아닌 외부의 미지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또 <감정은 고체이다>라는 개념 메타파도 많아서 감정을 다양한 시점에서 보고 그리는, 즉 폭넓게 표현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신체 부위에서는, 신체의 상태뿐만 아니라 놓여 있는 상황을 문장 전체의 비유로 나타낸 예문이 몇 개 보였다. 단순히 감정을 유사한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아닌, 문장 전체를 이용한 비유 표현이 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신체 부위와 감정의 관계에서는, ‘마음’을 신체 일부로 파악하는 것보다 용기나 물체로 파악하고 있는 표현이 많아, ‘시대가 흐르면서 감정이나 신체 부위가 몸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식되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종전 때 10대였던 작가의 작품 고찰에서는 GHQ에 지배되고 있다는 억압된 감정 때문에 ‘분노’의 사용 빈도수가 아주 많았다. 또, 작가가 정한 주제에 따라 감정의 편향이 보인 것,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보다 문장을 꾸미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감정과 신체 부위의 관계에서 ‘분노’는 여섯 부위가 사용되었으며 ‘배’뿐만이 아닌 많은 부위와 관계있는 감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비유 표현의 양도 늘어나 창작 수준도 높고, 감정을 다양한 시점으로 파악하는 등 표현의 폭도 매우 넓어졌지만, ‘슬픔’을 나타내는 울음의 행위는 이 비유 대상에서는 적어지는 등, 관용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보였다. 통시적 고찰에서는 총 730개 예문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 중 가장 많았던 것은 ‘슬픔’, 다음으로 ‘흥분’, ‘혐오’, ‘공포’, ‘분노’ 순으로 이어졌다. 감정의 사용횟수는 내용이나 시대 배경과 관련이 있었다. 직유·은유에서는 <고체>에 비유한 것이 가장 많고, <용기 안의 액체>, <생물> 순으로 이어졌다. 긍정적 감정과 긍정・부정의 양 감정은 전체적으로 <액체>라는 인식이 강하고, <공격성이 있다>는 인식은 약했다. 부정적 감정은 ‘슬픔’만이 <공격성이 있다>는 인식이 강했고, ‘불안’은 <생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이외는 <고체>의 인식이 강하고, 부정적 감정이라도 <공격성이 있다>라는 인식은 약한 것도 있었다. 특히 ‘분노’의 감정은 <공격성>을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액체>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 감정에도 적용되지만, ‘공포’와 ‘불안’에서는 그 인식이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개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감정 종류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감정을 신체 외부의 것으로 파악하려는 표현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체 부위를 이용한 환유에서는 ‘얼굴’의 사용 빈도수가 가장 많았고, ‘눈’, ‘몸’으로 이어졌다. 감정과 신체 부위가 강하게 연결되는 것은 ‘기쁨·즐거움·혐오’와 ‘얼굴’ 특히 ‘미소’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슬픔’과 ‘눈’이며, 이 대부분은 ‘눈물’이 차지했고, 나머지는 ‘색’과 ‘빛’이 많았다. 그리고 ‘공포’와 ‘몸’인데, 체온 저하나 떨림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원한, 회개’와 ‘입’은 ‘치아’와 ‘입술’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환유 표현은 시대와 함께 줄었고, 신체의 일부를 본체에서 떼어내는 표현이 늘어났다. 이 논문에서는 감정을 나타내는 비유 표현을 대상으로 감정의 개념, 신체 부위와 감정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감정이 어떤 개념, 어느 부위를 사용하여 표현되는 경향이 있는지를 고찰하여 다양한 감정에 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표현의 통시적 고찰에서 감정의 사용횟수는 시대 배경과 내용에 좌우되지만, 감정의 개념 메타파는 시대가 변해도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사(喩辞)는 변화한다. 은유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복잡한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문장에 색을 입히기 위해서 거친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에서, 유사를 중심으로 자세히 분석한다면 감정에 대한 인식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례 수집을 늘려 고찰하면서 일본어의 독특한 표현을 발견하는 연구로 연결해 나가고 싶다. 比喩は言語学の分野では情報伝達の手段として重要な役割を果たすものとして注目されており、目に見えない抽象的なものを言語化する際、我々の理解の手助けをしている。その中で認知言語学では、表現に注目するのではなく、言語の認識に焦点がおかれ研究が行われている。 本論文では、文学言語の感情を表わす比喩表現を対象に、目に見えない感情が何に置き換えられ認識されているのかを認知言語学での研究方法に沿って議論を展開していく。研究対象として戦争文学を選定し、日露戦争の作品から戦後の作品まで(1906~1969)を戦争の背景別に5つの時期に分けて考察を行う。5つの時期の感情の概念と感情と身体の関係を分析・考察し、感情の表現方法および言語化された感情から我々の持つ認知構造を明らかにする。そして、その表現方法や認知構造は時代の流れによって違いがみられるのか通時的考察を行う。本論文での対象となる感情は18種類である。正の感情は「喜び・愛好・安堵・楽しさ」の4種類、状況によって正にも負にもなる感情として「追憶・興奮・緊張・驚き」の4種類、負の感情は「悲しみ・怒り・恐怖・不安・絶望・恨み・嫌悪・悔しさ・後悔・恥」の10種類である。 日露戦争を舞台にした3作品の考察では、軍国主義の作品は戦争への興奮が多く描かれ、反軍国主義の作品は悲しみが多く描かれていた。表現では<興奮は攻撃性のあるもの>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が多くみられた。戦いに対する興奮が多く描かれており、日露戦争時代の軍国主義的思想が作品の表現にも表われていた。また、身体部位を用いた表現では「目」の項目に含まれる涙を用いた表現が豊富にあったのも特徴のひとつとしてあげられる。身体部位の表現では「恨み」が主に口から呑み込むものであったり、歯で表現されたりと、口との関係が深い感情であることも明らかになった。 次に、日中戦争を舞台にした4作品は政府が派遣したペン部隊によって書かれているため、悲しみの感情では、仲間の死への嘆きでだけでなく、寂しさや哀れに思う気持ちも多く見られた。戦場であっても正の感情が18%と多く描かれているのもこの戦争作品の特徴といえよう。表現では<不安は生物である>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が多くみられた。不安の感情が「這いよる」や「蝕む」などと共起し、気味の悪いものとして描かれていた。また、不安に陥っている状況を身体の異常で表現したものが多かったことも特徴として挙げられる。 太平洋戦争の4作品では、戦いへ向かう興奮よりも兵士を見て心が動かされる報道員の感動の気持ち、そして、死へ向かっていく兵士に対する悲しみの感情が主に描かれていた。表現の特徴としては、「恐怖」と「不安」では<感情は生物である>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が目立ち、これは、感情が体内で生じるという認識以外に、外部からやってくるもので、制御できないものという認識が強いことを示している。また、<感情は固体である>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も多く、各感情と物の類似性から導き出した比喩が豊富に作られており、表現の幅に広がりがみられた。身体部位からは、怒りや悔しさ、恨みなどという負の感情は「口」との関係が深い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そして、自分の身体一部を自分と切り離して扱う西洋的表現がみられたのもこの時期の特徴のひとつである。 戦後すぐに発表された3作品では、終戦間近の戦闘がない待機の状態であるため、戦地で過ごす不快な感情が多く描かれ、戦いへ挑む興奮は少なかった。表現の特徴は、多くの感情で<感情は生物である>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が多く、「感情はコントロールできないもの」という認識よりは、感情の擬人化であったり、「感情は所有物ではなく外部の未知のもの」として捉えられていることが特徴であった。また、<感情は固体である>という概念メタファーも多く、これは感情を様々な視点からみて描くという表現の幅の広がりを表わしている。身体部位では、身体の状態のみならず置かれている状況を文全体を用いた比喩で表わしたものが数例みられた。これは今までのように単に類似しているものや状況に置き換えて表現するのではなく、文章全体を使った比喩表現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身体部位と感情の関係では、「心」を身体の一部として捉えるより、容器や物体として捉えている表現が多くあり、時代が流れるにつれ、感情や身体部位が体から切り離されて存在するものとして認識されていることが表現にはっきりと表われていた。 終戦時10代であった作家の作品の考察では、GHQに支配されているという押さえ込まれた感情として怒りの使用数が抜き出ていた。また、作者が定めたテーマに沿って感情の偏りがみられたことと、分かりやすさより文を飾るための修辞的な表現が多くみられたのが特徴であった。感情と身体部位の関係では、「怒り」は6個所の部位が用いられ、「腹」のみならず多くの部位と関係がある感情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全体的に比喩表現の量も増え、創作レベルも高く、感情を多視点で捉えるなど表現の幅も非常に広がっていたが、「悲しみ」を表わす泣く行為は本対象では少なくなるなど、慣用的な表現を好まなくなっているという傾向がみられた。 通時的考察では全730例の用例を用いて行った。その中で最も多かったものは「悲しみ」で、次に「興奮」、「嫌悪」、「恐怖」、「怒り」と続いた。感情の使用数は内容や時代背景と関係していた。直喩・隠喩からは<固体>に喩えたものが最も多く、次に<容器の中の液体>、<生物>と続いた。正の感情と正負の感情は全体的に<液体>の認識が強く、<攻撃性がある>の認識が弱かった。負の感情は悲しみのみ<攻撃性がある>の認識が強く、不安は<生物>の認識が強かった。それ以外は<固体>の認識が強く、負の感情であっても<攻撃性がある>の認識は弱いものもあり、特に怒りの感情は<攻撃性>をあまり持っていない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また、<液体>の認識はどの感情にも当てはまるが、恐怖と不安ではその認識は弱いことが分かった。これら概念は時代の流れによって種類の変化はみられなかったが、感情を身体外部のものとして捉える表現の増加はみられた。 身体部位を用いた換喩では、顔の使用数が最も多く、次に目、そして、体と続いた。感情と身体部位の強いつながりがみられたものは、「喜び・楽しさ・嫌悪」と「顔」、特に笑顔で表わされていた。次に「悲しみ」と「目」であり、これは涙が大部分を占め、それ以外では色や光が多かった。次に「恐怖」と「体」であり、体温低下や震えで表わされていた。最後に「恨み・悔しさ」と「口」であり、歯や唇などを用いて表わされてた。これらの換喩表現は時代とともに減少していき、身体の一部を本体から離して捉えている表現が増加した。 本論文では感情を表わす比喩表現を対象に、感情の概念、そして身体部位と感情の関係を中心に考察を行った。特に感情がどの概念を用いて表現される傾向があるのか、どの部位を用いて表現される傾向があるのか、様々な感情に関しての結果を示すことができた。表現の通時的考察では、感情の使用数は時代背景と内容に左右されるが、感情の概念メタファーは時代が移り変わっても変化がないことがわかった。しかし、喩辞(喩える語)は変化していき、比喩も時代とともに複雑な表現が好まれ、文章に彩りを沿えるための工夫を凝らした表現が使わ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今後は喩辞を中心に細かく分析することで、感情に対する我々の認識もさらに解明できると考える。そして、用例を増やし考察を行うことで日本語独特の表現の発見につなげていきたい。

      • 蟾津江 流域의 Stream sediments에 關한 地化學的 硏究

        복일 全南大學校 1988 국내석사

        RANK : 1855

        本 硏究는 全南 谷城都, 求禮都, 光陽觀과 慶南 河東都에 이르는 蟾律江 流域의 stream sediments를 對象으로 粒度分析한 結果를 기초로 重被選別, 顯微鏡 觀察. X-線 廻折分析等을 기초로 하여 鑛物學的 硏究를 遂行하였으며, Atomic Absorption spectrophotometer (以下 AAS로 略한다)와 Inductively Coupled Argon plasma emission spectrophotometer(以下 ICAP로 略한다)을 使用하여 主成分元素, 副成分元素, 微量元素를 定量分析하여 指示元素의 background 및 anomalous values를 산출함으로서 異常帶 調査等 地球化學的 特性을 究明하는데 硏究의 目的이 있다. 本 域의 地質은 花崗岩 및 片麻岩과 제四紀의 沖績層으로 구성되어 있다. 粒度分析 結果를 토대로 本 域에 含有된 重鑛物의 含量은 0.83∼1.45%이며, 重鑛物中 各 鑛物의 含量은 magnetite 12.29%이며, ilmenite 11.07%, monazite 3.71%, zircon 2.59%, garnet 4.99%, epidote 16.66 %이며, 기타 鑛物들은 hornblende, augite, muscovite, biotite, corundun 等이 48.67% 含有되어 있다. 主成分元素인 SiO₂와 Al₂O₃含量이 90∼95% 정도로 높았으나 K₂O, Na₂O, Fe₂O₃, CaO 平均含量이 3.65%, 1.12%, 0.69%. 0.40% 정도로 나타났다. 蟾律江 流域의 地域別 指示元素의 background 및 anomalous values를 산출하여 檢討한 結果 Cu는 上流地域에서 높고 Zn는 上流地域에서 낮게 나타났으나 Ni, Co, Li, Pb는 어느 地域에서는 一定한 分布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谷城郡 古達面 社柯里에서 pb異常帶, 求禮都 土地面 鑛坪里와 金內里에서 Cu異常帶, 求禮郡 士地面 鑛坪里와 龍頭里에서 Zn 異常帶가 나타났는데 이러한 地域에 對해서는 精密한 地質學的 및 地球化學的 調査가 實施되면 더욱 좋은 結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Sumjin river is located at Gurye-gun, Gokseong-gun, Kwangyang-gun in Chonnam Province and Hadong-gun in Gyengnam Province. The Geology of this area is consisted of gneiss, granite gneiss of the Precambrain system, granite of Mesozoic and Tertiary alluvium. The mineralogical studies of the stream sediments of Sumjin river area have been carried out by heavy liquid separation, observation of :microscope and X-ray diffraction analysis. Geochemical characteristic have been investigated to measure contents of main elements, accessary elements and trace elements by ICAP,AAS. The grade of heavy minerals in Sumjin river area is 0.831-1.45%, and heavy minerals are consisted of 12.29% magnetite, 11.07% ilmenite, 3.71% monazite, 2.59% zircon, 4.99% garnet, 16.66% epidote and 48.67% corundum, spinel, fergusonite, hornblende etc. inheavy minerals. Background and anomalous values of stream sediments in 85 samples show that Cu is highly in Sumjin A area, is similiar in Sumjin B and C area. And that Zn is low in Sumjin A area, Pb, Ni, Co, Li is distributed stedily in any areas. Samples with anomalous High contents of Cu are found at the Gwangpyeng-ri and Gumnae-ri, Toji-myeon in Gurye-gun and Pb are found at the Duga-ri, Godal-myeon in Gokseonggun and Zn are found at the Gwangpyeng-ri and youngdu-ri, Toji-myeon in Gurye-gun. More detailed geochemical surveys are needed in these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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