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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선교사로서의 민로아(Frederick Scheiblin Miller) 연구

        이홍석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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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의 목적은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교회의 한국선교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영향들 중에서 청주지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민로아(Frederick S. Miller)의 교육선교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 위함이다. 연구를 통해 민로아 선교사를 비롯한 당시의 내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한국의 복음화뿐 아니라 근대화에 있어서도 영향을 주었음을 논증하였다. 특히 교육사역을 주로 다뤘는데 이는 그 동안 다른 논문을 통해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전도지(소책자)의 사도’로 알려질 만큼 문서사역에 힘을 썼기 때문에 그의 문서들을 통해 드러난 교육관을 살펴보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교육에 있어서 민로아는 전인적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사회, 남녀차별이 현저히 존재하는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선교사들이 사회변혁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교육관을 보면 이타주의가 두드러지는데 그는 이타주의를 ‘불고자신’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이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함’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의 실천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알게 하고 행하게 하는 것을 가정교육의 주요한 주제로 삼아 그의 글들을 통해 교육하고 있다. 그는 또한 경험주의적 교육관을 가지고 있으며 실용주의적 특징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장 사용가능한 지식과 기술에 대해서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복음적 사역뿐 아니라 복음의 실천으로서 이타주의를 교육하고 자신의 삶에서도 이를 실천함으로 그의 사역지인 한국 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청주 최초의 교회와 학교, 병원, 기관 등은 민로아 선교사와 상당부분 관련이 있으며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불고자신’의 실천과도 관련이 있다.

      • 해방 후 개신교의 건국이념 연구 : 1945~1948년 김재준과 한경직의 건국이념을 중심으로

        함신주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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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해방 후 개신교 건국운동이 어떤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져왔는지 건국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김재준과 한경직 두 개신교 지도자의 건국이념을 비교하여 개신교내에서 건국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 한국 개신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해방 후 건국운동은 갑작스런 해방정국으로 인해 혼란스러움 속에 시작되었다. 해방이 한반도내에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좌우익간의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부터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면서,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상회의에 의해 신탁통치 제안을 하게 된다. 이에 우익과 좌익은 반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다가 점차 좌익계에서 찬탁을 지지하면서 좌. 우익간 갈등이 심화된다. 결국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남한은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이,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또한 본 연구는 해방 후 개신교의 건국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였다. 정치적 성향분석을 통해서 당시 개신교의 건국운동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았다. 당시 해방 후 개신교는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재건 운동이 이루어졌다. 출옥성도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이들로서 북한지역 교회재건에 앞장을 섰다. 북한지역의 교회는 교회재건 운동에 힘쓰는 반면 남한교회는 내부적 요인의 신학적인 갈등이 주된 문제로 드러났다. 남한교회는 1945년에 열린 기독교남부대회 등을 통해 기독교이념에 의한 국가재건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기독교남부대회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기독교적 건국론을 다양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해방 후 개신교의 주요 정치적 성향은 반탁을 중심으로 한 우익계 노선을 취하였고, 이들은 대다수가 유학파 출신으로서 미군정의 인재로 등용되어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운동을 지지하였다. 본 논문은 김재준의 건국이념이 철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바탕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밝힌다. 김재준의 『기독교의 건국이념』은 1945년 8월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의 내용이다. 특히 김재준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를 참고하였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하나님 주권에 기초한 건국이념을 소개한다. 더 나아가 정부의 권위의 소재, 국토경영, 민정의 실재 등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나라 사상과 연결되어 김재준의 건국론은 영역주권과 같은 화란계통의 칼빈주의 계열에 있다. 정부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것이며 정부는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상호경의를 강제하도록 교회와 관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상호경의를 강제하는 것이 김재준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이며 정교분리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정교분리원칙은 국가와 교회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교회는 건국에 필요한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할 임무를 지닌다고 보았다. 즉 인물양성론을 제시한다. 김재준은 공산주의를 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한다. 건국이념에서는 공산주의도 교회와 제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1950년 이후 6.25를 겪으면서 그 태도가 반공적으로 바뀐다. 김재준은 죄악으로 자유를 상실한 인간이 해방되기 위한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그는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유신과 군사정부시절 인권운동과 반(反)독재정권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김재준이 『기독교의 건국이념』에서 친일자에 대한 문제를 아주 소극적으로 다루었음을 발견하였다. 이는 해방 공간을 공동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해방공간에서 친일자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소극적으로 친일 문제를 다룬 것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해방 후 민족 공동체적 입장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과 기독교』를 다룸으로서 당시 월남 피남민들의 개신교 건국운동의 특성과 그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경직은 1945년 1월 1일 공산주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창립하였는데, 교회이름을 ‘베다니전도교회’라 하였다. 그 이듬해 11월 당시 ‘영락정’이라는 당시의 지명에 따라 ‘영락교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47년 3월 ‘영락보린원’을 설립하여 운영한다. 그리고 1949년 보린원에서 『건국과 기독교』가 초판발행하게 되었다. 당시 월남 피난민들의 공동체였던 영락교회는 강한 반공의 중심지가 된다. 한편 한경직의 건국이념의 배경은 먼저 애국계몽주의와 인물양성론으로 건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서북학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서북학회의 회원이었던 남강 이승훈에 의해 기독교적 애국이념은 한경직의 건국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미국 유학시기 동안에 미국 민주주의 사회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화란계통의 칼빈주의로부터 하나님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정교분리입장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유신정권에 정교분리원칙을 중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 친정부적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관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이념을 연구하면서 그의 강한 반공사상과 민주주의론을 연구하였는데, 그의 강한 반공주의는 서북지역에서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한경직은 공산주의자들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또한 공산주의를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겨,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평등을 위한 제도라고 하였다. 한경직은 기독교는 민주주의사상의 교육자이며,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자유, 평등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와 복음만이 민주주의 실행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경직은 반공주의를 대항하여 민족 복음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나라가 되기를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썼다. 이는 결국 사회책임의식을 더욱 약화시켰으며, 복음화 운동에 치중하여 개신교는 보다 더 보수화 되었다.

      • NCCK의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 및 고찰 : NCCK 아카이브 통일위원회 자료를 중심으로

        이상훈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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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처음 소단원은 은 1945년부터 1988년(‘88선언’의 해)까지 NCCK 통일운동에 대해서 다루었다. NCCK는 ‘7?4 남북정상회담’(1972년) 이후로 민주화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해외동포 기독자들의 모임들(1981년 비엔나회의, 1982년 헬싱키회의)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운동이 먼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NCCK의 통일운동은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1981년)의 건의로 설립된 통일문제연구원운영위원회(1982년 설립)에 의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통일문제연구원운영위원회는 설립초기에 조직기구를 갖추는 데 주력하다가 1984년부터 해외기독자들의 회의에 참석함과 더불어 구체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NCCK는 해외의 도잔소회의(1984. 11), 제5차 한일교회협의회(1985. 3) 등에 참여하였고 국내에서는 통일문제협의회(1985. 2)를 개최하여 다양한 통일에 관한 논의들을 하였다. 이런 NCCK의 통일운동들로 인해 통일운동의 주도권이 전점 해외교회에서 한국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NCCK의 통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자료화된 사실은 통일운동의 발전을 이루게 하는 원천이 되었고, 도잔소회의를 통해 북한 기독교대표를 초청하는 것이 건의된 것과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의의가 크다. 1986년이 들어서면서 해외기독자들의 북한 방문이 늘어났다. WCC의 북한 방문(1986. 1)을 처음으로 미국NCC(1986. 4), 일본NCC(1987. 5)가 뒤를 이어 북한을 방문했다. NCCK의 과제는 북한기독교 대표자들을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제1차 글리온회의(1986. 9)에 실현되었고, 이에 탄력을 받아 NCCK는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통일문제협의회와 해외기독자회의 참석 등으로 통일운동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88년에 ‘88선언’을 발표하였다. 많은 보수교단과 보수단체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7?4 남북공동선언’ 이후에 더 구체적인 통일방안이 없던 시기에 민간단체에서 이룬 획기적인 통일선언이 되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정부뿐만 아니라 보수교단 단체까지도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88선언’ 이후에 글리온선언(1988. 11)이 발표되어 정부와 대중들도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 소단원은 ‘88선언’ 이후부터 ‘통일희년’(1995년)까지의 NCCK의 통일운동을 다루었다. ‘88선언’은 NCCK의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많은 나라에 전해 졌고 세계교회가 NCCK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NCCK는 제2차 글리온회의(1988. 11)에서 결정되었던 ‘통일희년’(1995년)을 위한 준비에 집중하는 쪽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으로 정국은 냉각되었고 보수교회 진영이 NCCK로부터 뒤돌아서게 되었다. 보수교회 진영은 연합하여 한기총(CCK)을 창설하고 NCCK와 분리된 통일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NCCK는 ‘통일희년’을 위해 세계교회와 모든 한국국민과 연합할 수 있게 하는 통일운동단체로 ‘평화통일희년준비위원회’를 창설하였다.(1990. 6) 평화통일희년준비위원회를 통해 해외에서 열리는 세계교회 회의, 국내에서 열리는 교회회의, 희년을 위한 예배와 협의회가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NCCK는 희년을 준비하면서 세계교회와 연합하면서 타 종교와의 연합도 시도하였는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 10)’의 참여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통일희년’(1995년)이 가까이 다가오자 NCCK는 전 국민의 연합을 목표로 남북인간 띠잇기 대회를 개최(1993. 8)하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정부의 지원과 전 국민이 방송으로 볼 수 있었던 좋은 행사였다. 8?15 직전 주일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연합예배와 희년 국제 협의회도 함께 하게 되어 희년을 위한 기대감이 점점 커져 갔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으로 정국은 냉각되었고 남북인간 띠잇기 대회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995년에도 정부당국의 민간단체 통일운동에 태도는 변하지 않게 되자 NCCK의 통일희년운동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임직각 예배와 희년 국제 협의회로 한 해를 마감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조용술, 이해학, 홍근수 목사의 구속과 NCCK 총무의 불구속 사건으로 NCCK는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소단원은 ‘통일희년’ 다음 해부터 2001년까지의 NCCK의 통일운동의 쇠퇴기를 보여준다. NCCK는 이 시기에 통일운동에 대한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보수교회 단체와 연합하는 남북나눔운동의 일환으로 북한동포돕기에 집중하게 된다.

      • 세계교회협의회 형성과 여성 에큐메니칼 선구자들의 공헌

        김은하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7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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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변혁기마다 여성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가장 앞장서서 창조적인 사역의 길을 개척하고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교회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성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안정화되면, 여성들만의 특수성을 가졌던 여성공동체는 전체공동체에 흡수 혹은 통합됨으로써 여성들이 다시 소외되는 역사를 반복하여 왔다. 본고는 여성공동체가 “창의적 사역 개척-여성공동체 형성-통합위원회로 변화-여성의 특수성 약화”라는 역사의 순환이 반복되어왔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여성, 청소년 및 장애인을 강조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에큐메니칼 선구자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성찰과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해 여성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령,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여성선교사들은 해외선교 현장에서 기독교 문명화 정책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난민구호활동 NGO 단체인 시마데 사무총장이었던 마들렌 바롯은 교회가 연합하여 난민을 돕는 사역을 하도록 주도함으로써 교회를 전 세계적인 존재로 보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촉발하였다. 또한 에반스톤 총회에서 캐슬린 블리스는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켜 남성 위주였던 초기 세계교회협의회 조직에서 여성들의 참여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더 나아가 세계교회협의회의 첫 아시아 회장이었던 사라 차코는 서구기독교 중심이었던 에큐메니칼 운동을 아시아로 확대함으로써 세계기독교중심으로 무게 중심을 아시아로 돌리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수잔 드 디트리히는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를 통해 수많은 평신도를 양성하였다. 이들을 공헌은 20세기 교회론과 선교론의 변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본고는 세계교회협의회 임시위원회(1938)부터 에반스톤 중앙위원회(1955)에 이르기까지 여성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연대순으로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집행위원회 또는 중앙위원회의 회의록, 세계교회협의회 문서보관소 및 세계 YWCA 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본고의 결론으로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완전하고 동등한 참여를 위해서는, 여성공동체는 전체 공동체의 일치를 보호하고, 전체공동체는 여성공동체의 특수성을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숙한 관계 형성과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사역 참여는 진정한 교회 개혁의 가시적인 표현이며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BSTRACT The Format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Contribution of the Women Ecumenical Pioneers to it. Throughout history, women have been more sensitive than anyone else in a rapidly changing era, pioneering creative ministry; and they formed a women's community and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development, and growth of the church. However, once the church has stabilized, the women's community, which had had its own peculiarities, came to repeat the history of re-alienating women by being absorbed or integrated into the whole community. This dissertation argues that women's participation in the church has not been active because the women's community repeated the cycle of "pioneering creative ministry - forming a women's community-changing into a whole committee-weakening the peculiarity of women." or the same pattern was found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hich is known to emphasize the empower of women, youth and the disabled today. Nevertheless, Women ecumenical pioneers have contributed greatly to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rough joint reflection and ecumenical dialogue based on trust. For example, Women missionaries who consisted of the mission force at the time of the majority of the 1910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in fact practised "Missio Dei" through their civilizing ministries in overseas mission field by “Women’s Work for Women” Project. During the World War II, Madeleine Barot, as the General Secretary of CIMADE, helped numerous people, and paved the way for the church’s social ministry. In addition, Kathleen Bliss developed a “Theology of Laity” in the Evanston General Assembly to expand women's participation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its early years, which was predominately male-centered. Furthermore, Sara Chako, the first Women presid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Asia, helped to shift the center of gravity of Christianity to Asia from the west by expanding the ecumenical movement, which was centered on Western Christianity, to Asia. And Susan de Dietrich equipped numerous lay people through the Ecumenical Institute at Bossey. They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change of the ecclesiology and the missiology in the 20th century. This study chronologically reviewed the ecumenical movement work of women committee during the period from the Provisional Commis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1938) to the Central Committee of Evanston(1955). To do this, it surveyed the minutes of the Executive Committee or Central Committee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ith documentation and reports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rchives and World YWCA Archives. The Conclusion drawn from this study is that for the full and equal participation of men and women in the Churches, the women's community should protect the unity of the whole community, and at the same time, the whole community should seek the ways to maintain the uniqueness of the women's community. The matur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women in the Churches and the equal participation of the work of the church will be a visible expression of the genuine church reformation and help to create a new Christian culture in the new era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 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 연구 : 전도입국론을 중심으로

        김일석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3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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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을 살펴보아 교회 내외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했고 동시에 어떠한 한계를 갖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한경직은 해방 당시 서북 지역을 대표하는 목회자였으며 월남 이후 영락교회를 창립하여 부흥시키는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이 견지하던 국가관 및 정교분리관 곧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을 추적하여 밝히는 작업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국가관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해방을 맞아 한경직은 건국이라는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과제 앞에서 영락교회 강단을 통해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기를 열망하는 설교를 행한다. 그러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교회로서는 직접적인 정치운동에 나설 수가 없다고 생각한 한경직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건국운동을 창안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전도였다. “전도가 곧 최대의 정치운동”이라는 이른바 전도입국론(傳道入國論)을 확립하여 건국을 위한 교회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대의민주제를 교회정체로 삼는 장로교회가 많이 세워지면 그 교회를 통하여 민주제도를 접하고 익힌 성도들이 사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민주정신을 발휘하면서 새로이 세워진 나라 역시 자연스레 민주화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은 어디에서 기원했고 어떻게 형성되어 등장했는지 그 지적인 배경을 탐구하는 것이 본 연구의 주 목적이다. 이를 위해 지적배경사 연구방법론을 원용하여 한경직이 학습한 사상과 사사한 스승들을 통해 배우고 익힌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나아가 해방정국기에 행한 설교 모음집인 『건국과 기독교』를 분석하여 여기에 드러난 한경직의 정체 이해와 국가관을 추출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등장하는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에 대한 시원을 고찰함과 동시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경직의 건국신학과 그 방법론, 또한 정교분리 이해가 오늘날에도 유효한지 되물음으로서 앞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의 국가관 재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Rev. Han Kyung-chik’s theology of nation-building during the period after Liberation, and investigates what kind of contribution it made to both inside and outside the church and what limitations it had. The Rev. Han was a leading pastor who represented northwest region of Korea at the time of Liberation, and after moving to the south, he emerged as a representative of the Korean church through the process of founding and developing the Youngnak Church. Therefore, since his view of the state and the principle of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in the post-Liberation years is one of the prototypical views of the related issues of the Korean church today, it is necessary to explore his theology of nation-building.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the Rev. Han began to deliver sermons to establish a Christian democracy through the pulpit of the Youngnak Church ahead of the national and historical task of establishing a nation. However, while the Rev. Han thought that the church could not engage directly in the political movement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he instead started the movement of nation-building in a way that only the church could do, that is, evangelism. He established the discourse on ‘Evangelism for Nation-building’, arguing that “evangelism is the greatest political movement,” and presented it as the church's methods for nation-building. He maintained that if many Presbyterian churches practising the system of representative democracy were established, church members would come to learn the system through church life, spread the spirit of democracy into every branches of the society and democratize a newly established country.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intellectual background of the Rev. Han’s discourse on Evangelism for Nation-building from where it came and how it was formed. To this end, by using the research methodology of intellectual background history, I intend to restore in detail the ideas that the Han encountered and what he learned through his teachers. Furthermore, by analyzing Nation-building and Christianity(『건국과 기독교』), a collection of sermons given during the period after Liberation, I attempt to unearth his identity and his view of the state. Through this, I want to examine the origin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hurch and state which has run through the modern history of Korea after Liberation and raise a question whether his theology of nation-building, his methodology, and his view of the principle of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re still valid, especially regarding the unification in the future. Finally, I want to contribute to the re-establishment of the Korean church’s view of the state.

      •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통일담론의 형성과 교회의 대응

        오혜신 장로회신학대학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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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 연구의 목적은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민족민주운동, 즉 자주·민주·통일운동(이하 자민통)과 한국교회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1980년대 이후 주목받은 민족민주운동이 교회구성원들의 운동이라는 측면도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첫 번째로,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참여와 기여를 조직적 차원, 개인적 차원, 학문적 차원으로 밝힘으로써 교회는 사회참여가 적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두 번째 목적은 첫 번째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는데,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참여에 대한 스스로의 불신과 회의에 대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자 한다. 세 번째로, 본 논문은 민족민주운동의 지도그룹의 헤게모니를 위하여 그동안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폄하하고 의도적으로 기여도를 낮추고 우연한 참여, 일회적 투쟁이었던 것으로 지속적으로 평가해온 역사기술 관행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네 번째로, 교단 안에서 묵묵히 교회를 섬기는 민족민주운동의 경험을 가진 목회자 및 평신도들이 운동의 경험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선교와 접목할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통일담론의 특징은 복잡 미묘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징에 따라, 특정 집단의 입장이 변화되고, 심지어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하는 등의 예상치 못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담론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민주운동의 통일담론에 대한 객관적 연구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 해방 전후 주한 미국 선교사에 관한 연구 : - 디캠프(E. Otto DeCamp) 선교사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

        문혜만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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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한국의 해방 전후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디캠프(E. Otto DeCamp, 감의도 甘義道) 선교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를 통해서 해방 전후 한국에서 활동했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사상에 대해서 알아본 연구이다. 이 연구의 주요 자료는 그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와 연락한 편지와 선교보고서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재구성했으며 그의 사상을 알아보았다. 디캠프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파송된 2세대 선교사이다. 또한 그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왔으며, 결국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서 옥고를 치렀다.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7년간 선교사역이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 육군 군목으로 복무하며, 또 방송 선교를 준비하는 등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복귀하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디캠프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제는 방송 선교사역을 주 임무로 하는 방송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받게 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으로 잠시 피난을 갔다. 전쟁기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구호사역, 피난민 및 포로선교사역, 영상선교사역 등을 감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종전이후, 이전부터 준비했던 ‘기독교방송’을 설립했고, ‘기독교방송’의 라디오방송을 중심으로 그의 선교사역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지역교회 선교사역, 서울외국인학교 이사로서의 사역 등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저항의식과 반공주의이다. 신사참배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다. 방화일 사건과 관련되어 미 군법원에 대해 저항했다. 한국의 4월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여 그의 저항정신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냉전시대 민주주의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반공주의를 드러내었다. 그가 방송 선교를 하게 된 계기중 하나가 반공주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계적인 반공주의 전선을 구축했던 기독교세계봉사회(CWS)와 협력함으로써, 그의 반공주의적 정서가 더욱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포로수용소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역을 한 것도 그의 반공주의를 드러낸다. 그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저항정신과 반공주의는 냉전 당시 미국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하고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디캠프의 생애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루고, 그의 저항정신과 반공주의가 드러났던 그의 활동을 살펴본다. 그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사상을 해방 전후의 선교사의 사역과 사상을 알아본다.

      • 민족대표 김병조에 관한 연구 : 생애와 설교를 중심으로

        정인근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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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바이러스로 한국교회가 갈수록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세상과는 동떨어져서 개인과 내면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는 세상 속에 들어가 백성들과 함께 웃고 고통과 고난을 함께 나누는 종교였다. 이러한 것은 3·1운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대표33인 중 개신교인이 16명이었고,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러한 일에 선두에 선 분 중 한 분이 김병조다. 민족대표로, 독립운동가로, 역사가로, 해방이 된 후에는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반공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병조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오해하거나 폄하하기도 한다. 특히 김병조의 신앙과 신학은 잘 모른다. 본 논문은 이와같이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민족의 큰 별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김병조의 생애와 설교 속에서 나타나는 김병조의 신앙과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병조의 생애와 설교를 살펴보면서 한 믿음의 거인을 만나게 되어 숙연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같은 목사로서, 참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이 논문이 되기를 바란다. 주제어 : 독립운동, 3·1운동, 민족대표33인, 김병조목사, 한국독립운동사략, 중생, 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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